EP.58 토벌
버그가 언제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계속 긴장한 채 부대 안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기서는 사령관을 믿어야 했다.
세레스가 알고 있는 리엔이라면 버그들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충분한 체력을 비축해두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
물줄기가 쏟아진다. 세레스는 잠시 눈을 감고서 온몸에 흘러내리는 물의 감촉을 느꼈다.
이미 다른 부대원들은 전부 씻고 나간 것인지 넓은 목욕탕 안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레스는 그 적막감을 느긋하게 즐겼다.
온몸이 노곤하다.
네토루와 커플링하는 건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전력으로 달린 것처럼 온몸이 땀투성이였으며, 팔다리는 물론이고 특히 하복부가 저릿했다. 마력 신경계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세레스는 이 모든 원흉의 주인을 떠올려보았다.
‘···음.’
정말이지···. 네토루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
날카로운 이면 너머로 종잡을 수 없는 성격도 그렇고, 이상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도 그렇고. 오늘 소대원들을 위해 노력하던 모습도 그렇고,
뭔가 알면 알수록 더욱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보여준 능력.
세레스는 그 정체가 너무 궁금했다. 그런 능력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그 동안 여성 파일럿들이 괜히 오버 히트로 고생하는 게 아니었다.
──뚝
세레스는 틀어놨던 샤워 꼭지를 잠그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나신을 물끄러미 응시하였다.
“정말로 괜찮은 건가···?”
세레스는 자신의 배를 쓸어만지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천천히 배꼽 밑으로 미끄러지던 손길은 곧 마력 신경계가 있는 문양에 닿았다.
조금 욱신거리는 느낌이 적지 않게 있지만,
그래도 단지 그것뿐이었다.
아픔은 별개로 과도한 출력 유지로 인해 과부하가 걸려 있던 마력 신경계는 어느새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오버 히트 상태가 완전히 치료된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게 키스로 가능한 거라고?
“······”
직접 경험해봤음에도 여전히 믿기 어려운 네토루의 능력에 세레스는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몇 번이나 그와 입술을 맞추고,
그의 열기와 관심을 갈구하는 듯한 자신의 모습.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아무리 치료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걸 또 좋다면서 그냥 받아주던 네토루도 왠지 얄밉다.
잘 보면 서로 나이는 비슷한 거 같은데···.
어쩌면 나이는 이쪽이 한 살 정도 더 많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연상이라는 느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왜 이렇게 계속 질질 끌려가기만 하는 걸까.
아무튼, 마냥 이렇게 부끄러워할 수는 없다.
“···한두 번으로 끝나지 않겠지.”
무언가 뚜렷한 부작용이 없다면 그와 입을 맞추는 건 오늘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네토루가 오버 히트를 치료할 수 있다는 건 몇 번이나 격렬한 전투를 반복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그것은 분명 세레스에게 힘든 일이 되겠지만,
그래도 이번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면 어느 정도 각오해둔 상태였다.
데스 웜.
그런 걸 눈앞에서 봤는데 주저할 수는 없다.
그건 상상도 못 해본 터무니없는 괴물이었다. 기사단에 있던 시절에 온갖 버그들에 대한 정보를 접해보았던 세레스조차도 그런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과연 부대원들의 힘으로 그걸 죽일 수 있을까?
그 물음에 세레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
그런 건 불가능하다.
부대원 모두 좋은 아이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뛰어난 파일럿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재능조차도 말이다. 그나마 유일한 성인 남성인 챈들러조차도 사람 됨됨이는 좋을지언정 실력 좋은 파일럿은 아니었다.
39구역의 전력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비루했다. 평균 연령도, 그 전투 경험도, 심지어 장비조차도.
기사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러한 부대 현실에 세레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여기서 믿을 건 네토루 뿐인가?”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그 남자밖에 없다. 적어도 그의 실력만큼은 신뢰해도 좋을 테니까.
─…당신이라면, 믿어도 되겠죠?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부끄러워서 죽고 싶은 말이었지만, 그래도 리엔 앞에서 괜히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좋든, 싫든 그것 나름대로 세레스가 합리적인 판단을 한 결과물이었다.
게다가 그가 보여준 헌신적인 모습을 생각하면 못 믿을 것도 없고 말이다. 실력을 떠나 오늘처럼 부대원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오히려 여기서 진심으로 걱정해야 할 건 네토루가 아닌 세레스, 자신이었다.
과연 그가 데스 웜을 상대할 수 있도록 내가 그의 역량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세레스는 자신이 없었다.
성병기 관련해서 리엔에게 강력하게 의견을 표출하기는 했지만, 만약 나 때문에 정작 성병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그의 역량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중요한 순간에 성병기를 사용할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분명 많은 부대원들이 죽게 될 것이다.
혹시 모를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숨이 가파라지며,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그런 건 싫다.
모두 무사히 살아남으면 좋겠다.
그러니···.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로지 하나.
일치율 ─ 29.5407%.
이 낮은 수치를, 어떻게든 끌어올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합리적인 선택···. 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
그걸 인정하며 세레스는 자신의 하복부를 쓸어만지던 손길을 더욱 아래로 이끌었다.
그렇게 마력 신경계의 문양을 지나쳐 손가락이 닿은 곳은, 두 허벅지 사이의 작은 균열이었다.
“으응···.”
평소에 잘 손대지도 않던 곳에 손가락을 밀어 넣어보자 세레스는 온몸이 떨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멈추지는 않는다.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억누른 채,
그대로 더욱 깊숙하게,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가능할까?”
평소에는 망측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하나둘씩 상상해보던 세레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게 이곳에 들어가면 분명 아플 것이다.
그리고 설령 아픔을 참는다고 해도,
단순히 남녀 관계를 맺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무작정 남녀 관계를 가진다고 커플링 파장의 일치율이 높아지지는 않는다. 정작 정신적으로 서로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즉···. 그와의 관계를 정신적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자신의 모습이 쉽게 상상이···.
“··하앙···. 으읏···.”
천천히 열 띤 숨소리를 흘리던 세레스는 그 순간 그하고 콕피트 안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오버 히트가 치료되었으면서도 계속 키스를 강요하던 네토루의 모습이 뇌리에 선명히 그려졌다.
─세레스. 그러면 지금도 굳이 안 될 것 없지 않아?
그게 무슨 의미었을까. 그걸 깨닫기도 채 전에 그에게 다시 손목이 붙잡히고, 몸이 이끌려간다.
그때 세레스는 그의 난폭함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저항하지 않은 건가?
모르겠다.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만약 그때 카렌이 오지 않았다면···.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그냥 단순히 키스만으로 끝났을까?
그 역시 남자인데?
그때 보여준 강압적인 모습을 생각하면···.
···잘 모르겠다. 그런 걸 알리가 없다.
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다.
강제로 그에게 팔이 꺾이고, 다리가 벌려지며···.
실체 없는 마력이 아닌, 그의 것이 몸 안쪽으로···.
뭘 상상하든 간에 조종석에서 강제로 그에게 안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렇게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수십번의 혹시 모를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며.
“으읏···. 흐앙···.“
이윽고 세레스는 숨길 수 없는 작은 비명과 함께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런 건 처음이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손발이 부들부들 떨리며, 하복부에 무언가가 응어리진 것처럼 욱신거렸다.
“······으읏.”
거기서 세레스는 손가락 끝에서 묻어나오는 자신의 애액을 멍하니 바라보며 얼굴을 붉혔다.
손가락 두개를 살짝 벌리자 그 사이로 끈적끈적한 은빛 실줄기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아···. 하아···.”
투명하지만, 음란한 빛깔이었다.
그걸 멍하니 보던 세레스는 숨을 정리하다가 고개를 힘없이 떨궜다.
뒤늦게 깊은 자괴감이 찾아왔다.
지금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
몸이 달달 떨린다.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무겁고 기분 좋은 쾌락이 오랫동안 몸안에 잔류하고 있는 가운데, 온갖 부끄러운 감정들이 가슴을 조여오고 있었다.
“이, 이건. 아닌데···. 나는 이럴 생각이···.’’
아무도 없는 목욕탕에서 이게 뭐 하는 짓거리일까.
여기는 부대원들이 다 같이 쓰는 공공장소였다. 상식적으로 이런 짓을 할 곳이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차마 일어나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용기가 안났다. 아니,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아마 엉망진창으로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겠지.
···지금 이곳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그 사실에 세레스가 진심으로 안도하던 그때였다.
─드르륵
“······!”
이 늦은 시간에 누구인지 모르지만 목욕탕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뿌연 수증기가 주변을 맴도는 가운데 세레스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흑···. 자, 잠시만···.”
이 창피한 모습을 보기 전에 얼른 일어서야 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망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자니,
그러자 곧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가슴팍부터 하복부까지 긴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들어온 사람은, 생각지 못하게도 카렌이었다.
“······”
“······”
문이 열린 입구에서 자연스레 눈이 마주친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맴돌았다.
하지만 그러한 침묵도 길게 유지되지는 않았다.
“···세레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세레스를 보며 카렌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런 카렌을 보며 세레스는 생각했다.
···정말 최악이라고.
왜 하필 들어온 사람이 카렌일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광휘님 후원 감사합니다!
린과 란 일러스트 후원자 명단
(에어프라이님, NeoGGM 광휘)
주인공 일러는 나중에 h씬 비슷한 장면에서 뒷모습 정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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