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52화 (52/148)

EP.52 NTL-001

1.

일부러 적을 도망치게 놔두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의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지금 버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전략적인 판단’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본래 지금까지 버그들은 단순 무식한 공격만을 하였다. 병력이 모이면 적진에 그냥 그대로 쑤셔 넣는 것이 녀석들이 사용하는 전략 전술의 전부였다.

그러니 녀석들에게 무언가 특정한 목표를 위해 도망치는 적들을 일부러 놓아준다는 개념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지난 수년간 그러했는데 오늘 갑자기 패턴이 바뀌었다고 하니 믿기 어려울 수밖에. 특히나 오랫동안 버그들의 패턴에 학습되어 있던 사령관-리엔에게는 더욱 충격이 컸을 것이다.

그래도 어찌하여 합류 지점을 바꾸어 소대원들이 방향을 튼 가운데,

적을 막기 좋은 이상적인 길목에 홀로 성기병이 멈춰서자 세레스는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우리 둘끼리 괜찮겠어요?”

“글쎄. 어쨌든 해볼 수밖에 없잖아. 그렇다고 우리만 혼자 도망칠 수도 없고.”

네토루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얼핏 보면 무책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모습에 세레스는 오히려 안심이 되고 말았다. 말투와 달리 말에 담긴 의미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세레스는 점점 뒤처지고 있는 소대원들을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건 네토루 역시 마찬가지였나보다.

‘……’

그 사실이 세레스는 신기했다. 아니, 조금 놀랐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까…. 뭔가 생각하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이질감 때문에 세레스는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뇌리에 한 가지 의문이 스쳤다.

그리고 보니…. 며칠 전에도 그렇다.

“…네토루. 혹시 국경 지대에서 버그들이 넘어왔을 때도 이렇게 미끼를 자처했던 거에요?”

“……”

물어보자 네토루는 왜 그런 걸 묻냐는 듯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부정은 안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정답인 듯하다.

하지만 세레스가 원하는 건 그의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네토루는 끝내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마치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조금 자랑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자랑스럽게 말했을 텐데, 그런 것도 없다. 오히려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타박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의외로 자기희생적인 사람인가?

네토루를 힐끔 쳐다보던 세레스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획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제 곧 버그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네토루가 합류 지점을 포인트 97로 바꾼 건 단순히 적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곳으로 가는 길목 중간에 시간을 끌기 좋은 이상적인 장소가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나마 적들의 경로를 틀어막는데 적합한 곳.

그렇지만 아무리 위치가 좋다고 해도 적의 숫자가 상당하다. 네토루는 적당히 시간만 벌고서 곧바로 빠질 거라고 하지만 과연 그게 쉬울까.

아무리 네토루라도 센티페드 수십 마리한테 포위당하면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을 터.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역할을 자처했다. 세레스는 커플링을 통해 느껴지는 그의 흔들림 없는 심장 박동을 믿기로 했다.

초조한 기다림 속에서도 네토루는 여전히 차분했다. 덕분에 커플링으로 연결된 세레스도 조금씩 두근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이럴 때는 서로의 심상이 연결된 게 도움이 된다. 두렵고, 긴장되어도 파트너에게 의지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세레스.”

“…예. 준비됐어요.”

네토루의 낮은 목소리에 세레스는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네토루가 조정간을 쥐고서 성기병의 출력을 서서히 높이기 시작했다.

그의 마력이 몸 안에 스며들며, 하복부로 밀려들어온다. 한 번의 전투로 이미 예열되었던 몸인데도 세레스는 떨림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삽입되는 마력의 양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력은 점점 높아지는 가운데, 그만큼 세레스가 제어하는 마력의 양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마력 신경계를 툭툭 건드리는 네토루의 마력은 여전히 난폭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그렇게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늘 짓궂은 모습 안에 숨겨진 상냥함을 조금은 보았기 때문일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세레스는 저도 모르게 놀란 얼굴로 고개를 획획 저었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중요한 건 네토루의 이면이 아니다. 그래서 최대한 신경 쓰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그때 그가 별안간 뒤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세레스. 한 가지 미리 말해둘 게.”

“으응…. 읏…. 뭘 말이죠?”

조금 놀라서 목소리가 샜다.

그렇지만 네토루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이번에는 완급 조절을 못 해줄 것 같으니까, 너무 원망하지 마. 아마 오늘 부대에 복귀하면 고생 좀 할 거야.”

마치 통보하는 것처럼 여전히 무덤덤한 목소리다. 하지만 왠지 별로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자기가 언제부터 이런 걱정을 해주었다고.

“…괜찮아요. 그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그렇지만 왠지 표정 관리가 어려워진 세레스는 네토루의 시선을 피해 정면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시커먼 지네들이 빠르게 바닥을 기며 달려오는 게 보인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꿀렁이는 검은 무리의 모습은 몇 번을 봐도 역겹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다지 무섭진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은 믿어도 되는 남자였으니까.

2.

그곳은 협소한 협곡 같은 곳이었다. 가파른 암석 절벽이 양옆에 존재했고, 아슬아슬하게 성기병 두셋 정도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길목이 비좁았다.

─적성 개체 확인

도망치는 적성 개체들을 쫓아 움직이던 추격형 센티페드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갑자기 적성 개체가 나타나자 즉각 거리를 벌렸다.

그것은 누가 봐도 전투를 피하는 모양새였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섬멸이 아니라 적과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추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센티페드들은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새로운 명령을 갱신해주기를 기다렸다. 이런 식으로 적이 먼저 접근해왔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명령이 없었으니까.

덕분에 적성 개체와 미묘한 대치가 이어졌다.

적성 개체들을 쫓아 움직이던 추격형 센티페드 무리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전투할 의지가 없었고, 확인된 적성 개체 또한 이 이상 접근하지 않으면 굳이 싸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게 10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키리리릭!

돌연 대치하고 있던 추격형 센티페드들이 매섭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에 적을 섬멸하고 기존의 임무를 속행하라는 새로운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새롭게 지정된 명령에 추격형 센티페드들은 망설임 없이 적성체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괴물은 멀리서 지켜보았다.

당연하지만 전투는 동족들이 유리했다. 적은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전투가 일방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지형의 특성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진입이 어려운 비좁은 지형이다. 막는 쪽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

그래서일까. 전투가 시작되자 기세 좋게 달려들던 센티페드들은 정작 숫자의 우위를 살리지 못한 채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자색 성기병은 노련했다.

지형의 장점을 살리면서 그와 동시에 자신의 주변이 포위당하지 않도록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며 치열한 일진일퇴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용감하게 싸우는 듯하면서도 필요할 때는 망설임 없이 물러선다. 그 움직임은 누가 봐도 그곳에서 동족들의 발목을 붙잡기 위한 시간 끌기로 밖에 안 보였다.

그 결과 기동성 좋은 추격형 센티페드 무리가 그 움직임을 쫓지 못하고 계속 놓치고만 있었다. 몇몇 무리가 주변 절벽을 타고 뒤를 노렸지만 적에게 빈틈은 없었다.

피와 살점이 흩날린다. 성기병이 움직일 때마다 센티페드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상황 판단도, 성기병의 조종 능력도, 훌륭하다.

그렇기에 괴물은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본래 괴물이 알던 저 적성 개체는 저렇지 않았다.

지금 길목을 막고 있는 자색 성기병은 당장 며칠 전만 해도 형편없이 싸우고 있던 보잘것없는 성기병들 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어제 있었던 전투도 그렇고, 오늘 전투도 그렇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움직임이 달라졌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인가?

그 답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성기병 안에 타고 있는 파일럿이 바뀐 것이겠지.

적어도 전에 타고 있던 미숙한 파일럿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숙련된 자일 것이다.

그러면 과연 저 안에 지금 누가 타고 있는 걸까?

관찰하면서 쌓이는 데이터가 곧 답을 알려주었다. 다행히 자색 성기병의 전투 패턴은 이미 괴물에게 익숙한 형태의 것이었다.

─등록 코드 NTL-001

관측될 때마다 타는 성기병이 달라지는 특성 탓에 군단의 관심을 받는 특별한 적성 개체.

설마 이번에도 또 성기병을 바꾼 것인가.

안 그래도 ‘협력자’들 중 일부가 NTL-001의 데이터를 원하던 중이었다.

괴물은 추격형 센티페트들의 희생을 토대로 기록되고 있는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광역 네트워크에 실어 쏘아 보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본래 예상과 다르게,

지금까지 묵묵하게 프랑기아 왕국의 공략에 협력 중이던 협력자 하나가 새롭게 관심을 보이더니 흥미로운 요구 사항을 전했다.

─세레스의 성기병을 절대로 파괴하지 말 것

그가 관심을 보인 건 NTL-001이 아닌, 관찰 대상이 타고 있는 ‘자색 성기병’이었다. 아무래도 자색 성기병의 주인이 세레스라는 여성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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