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변화
1.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아침 식사가 끝나고 카렌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던 세레스는 한숨을 쉬었다. 설마 카렌하고 그렇게 진심으로 말다툼을 하게 될 줄이야.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인가 서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목소리를 높이며 말다툼하고 있었다. 그걸 처음 깨달았을 때는 큰 충격이었다.
내가 말다툼이라니….
세레스는 지금까지 말다툼은 커녕 누군가한테 제대로 화를 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애초에 화를 내는 방법 따위를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어린 시절부터 배운 거라고는 순응하는 방법뿐
그렇기에 기사단에서도 하라는 건 그냥 하였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않았다. 파트너를 상대할 때도 그러했다. 언제나 순응하는 삶이었다.
그건 393부대에서도 비슷했다. 그런 점에서 부대원들에게 친절하고 온화할 수 있던 건 그래서였다. 기사단에서 늘 했던 것처럼 자신이 먼저 한발 뒤로 물러나며 배려하는 척해주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처음으로 세레스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물러나지 않는 카렌,
그리고 그런 카렌을 이해할 수 없는 자신.
서로의 감정을 소모한 채, 평행선을 달리던 이야기의 종착지는 당연히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양보할 수 없는 문제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그래도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그렇게 카렌하고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없었는데.
“…하아.”
느지막한 점심시간. 출격을 위해 탈의실에서 파일럿 슈트로 갈아입고 있던 세레스는 또 다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싸우고 나서도 계속 생각해봤지만, 세레스로서는 카렌이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남들과 이렇게 감정적으로 싸워보는 것도 그렇고,
카렌과 이렇게 어색해지는 것도,
모두 마음이 편치가 않아서 씁쓸한 미소만 나온다.
그래도 다른 한 편으로 세레스는 조금 안심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최악은 피했으니까.
‘…다행히 어제 일은 모르는 거 같은데.’
혹시나 싶어서 세레스는 대화 중에 여러 번 카렌을 떠보았다. 그렇지만 딱히 어제 일을 아는 기색은 아니었다. 네토루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그건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나는 네토루랑 커플링 할 거야.
─카렌. 제가 말했을 텐데요. 그건 안 된다고.
─세레스…. 아니, 세레스 언니! 지금 내가 아예 파트너를 다시 바꾸자는 게 아니잖아! 그냥…. 스와핑만 가끔 하자고…. 그것도 안 되는 거야?
카렌은 어째서 이렇게 네토루를 집착하는 걸까.
어째서? 분명 그동안 힘들었을 텐데.
당장 지금만 해도 오버 히트로 고생하고 있지 않은가. 낮은 커플링 일치율 때문에 힘들어하는 카렌의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세레스는 더 이상 자신의 짐을 카렌에게 떠넘기가 싫었다. 그건 너무 추악하고 비겁한 짓이니까.
하지만 이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 절망하며, 그렇게 몇 번이나 다시 한숨이 반복되자,
“…에휴. 또 한 숨소리.”
옆에서 파일럿 슈트를 입으며 그 소리를 듣고있던 린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세레스와 카렌의 난데없는 어색한 분위기가 너무 신경 쓰인 탓이었다.
“세레스 언니, 정말로 카렌이랑 싸운 거야?”
“그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왜? 두 사람이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린이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있던 란도 그게 궁금한 것인지 귀를 기울였다.
세레스의 성격상 누군가랑 싸울 일이 없을뿐더러,
그 대상이 카렌이라고 하니 더욱 의아할 수밖에.
평생 싸울 일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갑자기 냉전 상태에 빠진 것이다.
린의 질문에 갈아입은 파일럿 슈트의 차림새를 점검하던 세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왠지 모르지만 카렌은 이번 스와핑이 마음에 안 드나 봐요.”
“흐음…. 역시 그런가?”
“네?”
어딘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세레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나만 모르고 있던 걸까?
카렌이 이번 스와핑에 부정적이라는 걸 말이다.
“…혹시 린은 알고 있었나요?”
“그야…. 뭐 그렇지? 어느 정도 짐작은 했어.”
“세레스 언니는 잘 모르겠지만, 어제 카렌이 얼마나 심각했는데…. 계속 우리 앞에서도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어.”
마지막에 끼어든 것은 아까부터 잠잔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란이었다. 그녀의 말에 세레스는 침음을 삼켰다.
……역시 카렌은 스와핑을 하기 싫었던 건가.
점점 확실해지는 사실에 세레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세레스는 여전히 카렌이 네토루와 커플링 하는 걸 원치 않았다.
그러니 카렌이 아무리 고집 부려도, 그와 커플링하는 건 자신이었다.
2.
이번에 관측된 버그 무리는 별 볼일 없었다.
활강포로 무장한 강력한 공격력을 지닌 버그─ 스파이더는 아예 없을 뿐더러, 비교적 화력이 낮은 로커스트 무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이번에 출격하는 건 세레스가 소대장으로 있는 2소대뿐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며칠간 쌓인 부대원들의 피로가 상당했기에 출격 인원을 최소한으로 줄인 상태였다.
슈트로 갈아입은 세레스는 자신의 성기병 위에 올라탔다. 콕피트 안에는 이미 네토루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중이었다.
조종석에 앉아 있던 그가 힐끔 쳐다보니 말했다.
“세레스. 조금 늦었네.”
“…죄송해요.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요.”
늦은 건 사실이기에 세레스는 순순히 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는 성기병과 커넥팅을 하기 위해 마력 신경계가 있는 하복부를 조종석에 맞추고, 양 허벅지를 벌렸다.
───이잉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온갖 소형 마법진들이 떠오르며 세레스의 몸을 천천히 훑기 시작했다.
여성 파일럿이 성기병의 ‘키’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인증 작업이었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변함없는 커플링 과정 속에서.
“……”
세레스는 평소보다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겨우 두 번째 커플링이라 그런 걸까. 뒤에서 느껴지는 네토루의 시선이 그녀는 무척이나 낯설었다.
게다가 왠지 모르지만 네토루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처음에는 애써 무시 하려고 했지만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세레스였다.
“…저한테 뭔가 할 말이라도 있나요?”
“아침에 카렌하고 이야기가 잘 안 풀렸나 봐?”
“…그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던져지는 의문 어린 그의 목소리가 가슴을 콕콕 찌른다. 세레스는 조종석의 손잡이를 강하게 쥐고는 이를 악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카렌과 관련된 일이다.
출격 때문에 최대한 의연하게 있으려고 했지만,
세레스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조종석에서 네토루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았다.
“……네. 잘 안 풀렸죠. 그리고 이건 전부 당신 탓이기도 하고요. 그때 갑자기 당신이 저를 방 안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면 이렇게 카렌하고 싸울 일은 없었을 걸요.”
“……”
“어째서 그런 짓을 한 거죠? 저랑 카렌을 재미 삼아 싸우게 만들고 싶기라도 한 건가요?”
울분을 토하내는 감정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네토루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지 세레스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을 뿐. 이윽고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일은 미안. 나는 굳이 미뤄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 판단이 틀렸나 보네. 아침 일은 내가 사과할게.”
“…네?”
네토루가 드물게도 먼저 사과를 했다. 덕분에 세레스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설마 저 남자가 먼저 사과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오히려 뻔뻔하게 모른 척 할 줄 알았다.
“자, 잠시만요. 당신이 그렇게 순순히 사과를 하면….”
차라리 평소처럼 능글맞게 굴 것이지 갑자기 왜 이러는 걸까. 저 남자가 이렇게 선뜻 사과하면 아침에 있었던 일을 따지는 것도 힘들어진다.
그래서일까.
“이건 조금 비겁해요…. 당신이 이렇게 사과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게 아닌데….”
네토루를 응시하던 세레스의 입가에서 무심코 그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사실상 어린애 투정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렇지. 확실히 이번 일은 내 실수야.”
“……”
그렇지만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단순히 상황을 넘기기 위한 게 아니라, 정말로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럴 거면 정말로 아침에 왜 그렇게 일을 벌인 것인가.
‘뭐야. 도대체….’
당연하지만 세레스는 그런 네토루가 낯설었다. 도저히 사람을 알 수 없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왠지 이런 네토루가 더욱 얄밉게 느껴졌다. 덕분에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애매해졌으니까.
끝내 세레스는 응어리진 감정을 전부 토해내지 못한 채 안으로 삭히고는 말했다.
“…일단 커플링에 집중하죠.”
“그래.”
이윽고 그렇게 기동을 위한 커넥팅이 끝나고,
세레스는 네토루가 조정간을 쥐는 동시에 서로의 마력 패스가 연결되는 걸 느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열린 통로로 그의 마력이 몸 안으로 침범해들어온다. 자궁구에 위치한 마력 신경계가 그의 마력으로 파르르 떨렸다.
변함없이 네토루다운 난폭한 마력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몸 안에 탁류처럼 밀려들어오는 그의 마력이 저번 보다는 조금 편안하게 느껴졌다. 역시 두 번째 커플링이라 그런 걸까. 어쩌면 그새 자신의 몸이 그의 마력에 조금 익숙해진 걸지도 모른다.
물론…. 성교도 안 했으면서 사람의 체질이 그렇게 빨리 변할리가 없겠지만. 착각일 것이다.
3.
─비록 관측된 버그의 숫자가 적더라도 절대로 방심하면 안 됩니다.
저번 전투에서 혼자 마력 방출로 돌진을 해서 그럴까. 목표 지점으로 가는 도중에 리엔이 몇 번이나 똑같은 내용을 경고하였다.
부대 전력에 큰 손실이 있는 현 상황에서 혹시 모를 사태만큼은 반드시 막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리엔의 걱정은 내심 이해하지만, 벌써 몇 차례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으니 이제는 괜히 흘려듣게 된다.
그렇게 순조롭게 목표 지점으로 향하는 가운데,
생각에 잠겨 있던 네토루는 세레스의 성기병을 움직이며 미간을 좁혔다.
카렌과 세레스 때문이었다.
설마 카렌과 세레스─ 둘이 방 안에서 그렇게 개판 싸울 줄이야.
얼마나 심각하게 싸운 것인지 벌써 모든 부대원들이 두 사람의 갈등을 알고 있다. 옆 방에 들릴 정도로 서로 목소리를 높였다고 하던가.
‘…좋지 않은데.’
네토루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그는 어떻게든 두 사람과 사이좋게 커플링 하는 게 목표였다. 그러니 당연하지만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
그런데 서로 커플링 파트너가 되겠다고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네토루로서는 황당하면서도, 웃지 못할 일이었다.
이야기가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도대체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던 걸까.
세레스를 걱정하는 카렌의 진심을 생각하면, 이렇게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예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빨리 두 사람이 화해하면 좋은데.’
덕분에 조급해진 건 네토루였다.
일단 부대원들은 크게 의식하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네토루는 저번에 관측탑에서 보았던 지하를 여전히 신경 쓰고 있는 상태였다.
그 정체 모를 커다란 구덩이를 가볍게 넘기기에는 보고서를 받은 리엔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뭔가 알고 있는 게 있냐고 물어보니 리엔은 일부러 대답을 피했다. 아직 확실한 정보가 아니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누가봐도 정보를 숨기는 모양새였다.
‘도대체 그게 뭐길래.’
보고서를 받았으면서도 사령관이 이렇게 일부러 정보를 숨기려는 경우는 많지 않다. 굳이 숨겨서 좋을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볼 때, 굳이 공개해서 좋을 게 없는 경우라면…….
안 그래도 어수선한 부대 분위기다.
리엔이 숨기려는 건 이런 상황에서 부대원들에게 알려봤자 좋지 않을 정보라는 거겠지.
즉, 사기를 떨굴 만큼 위험한 무언가라는 것이다.
애초에 네토루는 지금까지 그런 형태의 구덩이를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다른 건 몰라도 지금껏 보지 못한 형태의 버그라는 건 확실하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까지 잠잠한 걸 봐서는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도대체 그런 커다란 구덩이를 팔 정도면 얼마나 거대한 놈인 거지?
“읏…! 가, 갑자기 뭐에요?”
그때 세레스의 가냘픈 신음소리가 네토루의 상념을 깼다. 뭔가 싶어 고개를 내려보니 세레스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무의식적으로 출력을 높인 듯하다. 갑작스럽게 과도한 마력이 삽입되자 놀란 거겠지.
“아. 미안. 잠시 생각 좀 하느라.”
“하아…. 저는 갑자기 어디선가 적이라도 나타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요.”
불만스레 흘겨보면서도 차마 꾸짖지는 못하는 세레스를 보며 네토루는 무심코 웃고 말았다.
티는 안 내고 있지만, 안 그래도 카렌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그녀다.
그렇기에 네토루는 사과의 의미로 조이고 있던 주도권의 일부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전투 중에는 다시 회수할 거지만.
그래도 그걸로 어느정도 기분이 많이 나아졌는지 세레스의 얼굴에 불만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일단 이 정도로 시작하는 게 좋을 듯했다.
오늘은 가벼운 전투이니 세레스를 느슨하게 풀어줄 생각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자중이님 후원 감사합니다!
세레스 일러 후원자 명단
(에어프라이 졸린듯 앱없나 미르마루 천경 광휘 테조스 연초 팬텀_743 앱없나 스라 자중이)
색채 작업 중입니다. 아직 수정될 게 많기는 한데, 대충 성기병과 커넥팅 중인 상태 입니다.
참고로 저 마법진은 속박 플레이가 아닌,
전투 중에 몸이 흔들리는 걸 보조하기 위한...
흠. 아무튼 그렇습니다.
---------8/29 리메이크 사정으로 일러 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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