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 변화
1.
이상할 정도로 상쾌한 아침이었다.
얼마나 푹 잠을 잔 것인지 이불을 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는 몸이 너무 가벼워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세레스는 어제 일이 더욱 현실감 없게 느껴졌었다. 기억을 되새기던 그녀는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킨 상태로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매만졌다.
강제로 몸을 안긴 채 네토루와 키스를 하고…….
그다음 무슨 일이 있었지?
생각에 잠기던 세레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제 일을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노력해도, 필름이 끊긴 것처럼 그 이후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단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아침이 되어 있었고, 평소 때처럼 자신은 방에서 자고 있었다.
어째서 그 순간 정신을 잃었는지 잘 모르겠으나,
이건 어딘가 이상한 일이었다.
세레스는 분명 네토루가 그 자리에서 자신을 덮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강압적으로 몸을 껴안던 것도 그렇고, 입을 맞춘 것도 그렇고….
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린 세레스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옷을 벗으며 구석구석을 몸을 확인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이상할 정도로 몸은 깨끗했고, 정사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잠결에 흐트러진 머리카락만이 전부다.
그 남자는 정말 몸에 아무런 손도 대지 않았다.
“…어째서?”
자신의 매끄러운 허리를 손가락 끝으로 매만지며, 거울 안에 비쳐진 새하얀 나신을 바라보던 세레스는 아연해졌다.
왜 아무런 흔적이 없는 거지? 그 남자는 정말 아무런 짓도 안 하고 방으로 돌려보낸 건가?
혹시 내가 매력이 없었나?
아니, 이럴 거면 왜 강제로 입술을 맞췄던 걸까.
긴밀한 남녀 관계라고는 책으로밖에 모르는 세레스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보통 거기서는…….
“…아.”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머리가 과열된 것처럼 어지러웠다. 세레스는 거울에 비쳐진 자신의 모습을 보다가 획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울 정도로 표정이 너무 엉망진창이었다.
차라리 그가 거기서 일을 벌였으면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저 그런 수준의 남자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면 그만이었으니. 하지만 이래서는 괜히 머릿속만 복잡해진다.
그렇지만 역시 마음 한편으로는 조금 안심이 된다.
“…다행히 짐승은 아니라는 건가요.”
덕분에 무심코 입술을 비틀고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도대체 네토루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세레스는 평소 때처럼 거울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고는, 자기 자신에게 가면을 덧씌웠다. 부대 안에서 수년간 반복했던 일이기에 표정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그 남자 앞에서도 이걸 유지할 자신이 없다는 건데, 어차피 그 남자에게는 소용 없는 일. 그러니 아무튼 부대원들에게만 평소 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면 된다.
그러한 생각으로 새롭게 하루를 맞이했을 때였다.
그런 세레스의 의지는 카렌을 만나고서 얼마 지나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어제 탈의실에서 만났을 때 하고는 너무나도 다른 카렌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딱 봐도 어딘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기색이었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했었나?’
세레스는 그 이유를 고민했다. 어제 카렌에게 무언가 실수 한 게 없는지 계속해서 기억을 되새겼다.
하지만 끝내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단서는 발견했다.
식당 안에서 카렌의 시선이 계속 네토루, 그에게 머물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으니.
…어제 둘 사이에도 무언가 있었다.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러한 의심은 식당에서 나가려던 카렌이 네토루에게 몰래 속삭이는 모습에서 확신이 되었다.
그 순간 세레스가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어제 일을, 네토루가 카렌에게 혹시 말한 걸까?
그저 예상이었지만, 세레스는 심장이 쿵 내려떨어지는 걸 느꼈다.
2.
“그건 카렌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무덤덤한 목소리가 왜 이렇게 무서운 걸까.
처음에는 애써 웃으려고 했다. 어제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가면을 아무리 써도, 쉽게 부서지고 마니까.
그의 시선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세레스는 사고가 얼어붙는 걸 느꼈다.
게다가 거짓말조차 어렵지 않게 간파하는 그의 날카로움은 무섭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건 반드시 물어야 한다.
“…설마 카렌에게 어제 일을 이야기한 건 아니죠?”
그것은 절대로 카렌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던 자신의 추악함인 동시에 나약함이었다.
세레스는 카렌은 물론이고 부대원들에게 믿음직스러운 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만약 숨기고 있던 이런 자신의 본모습이 부대원들에게 알려지면…. 세레스는 그런 일 따위는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393부대는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보금자리였으니까.
여기서 자신의 위치를 잃고 싶지가 않았다.
세레스는 애타는 얼굴로 네토루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낮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걱정 마. 아무런 말도 안 했으니까.”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정말이야.”
“…그러면 갑자기 왜 카렌이 저를 피하는 거죠? 당신도 식당에서 카렌하고 저의 분위기를 봤을 거 아니에요.”
“글쎄. 어째서일까?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그냥 오버 히트 때문에 기분이 안 좋은 거 아니야?”
모르겠다면서, 네토루의 얼굴에는 조금의 의문도 없었다. 오히려 뻔뻔할 만큼 태연하다.
저건 분명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덕분에 세레스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거짓말 마요. 분명 당신은 뭔가 알고…!”
“쉿. 그렇게 목소리 키우지 마. 다른 부대원들이 듣겠어.”
“……읍!”
네토루는 별안간 손으로 세레스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능청스러운 태도에 세레스는 그를 노려보면서도 아무런 저항을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의 말대로 복도를 지나가던 부대원 한 명이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제법 심각한 분위기로 느껴졌는지 걱정스러운 눈길이었다.
이윽고 그런 부대원의 시선을 피해, 네토루가 세레스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비겁하게 피할 생각 말고 직접 확인해. 안 그래도 카렌도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 하니까.”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끼이이익
기다렸다는 것처럼 방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인가 네토루가 카렌의 방문을 연 것이다.
“자. 들어가.”
그렇게 세레스는 그의 힘에 떠밀려 얼떨결에 방안으로 들여보내 졌다.
“…세레스?”
그러자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카렌이 보였다. 준비가 안 된 세레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시선을 교환한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금발 사내는 그저 태평하게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세레스는 네토루가 너무나도 미워졌다.
3.
“……”
“……”
지금까지 세레스와 작은 말다툼조차 해본 적 없는 카렌에게 지금 상황은 너무 낯설었다. 언제 이렇게 세레스와 단둘이 있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적이 있을까.
‘…네토루. 나쁜 자식.’
─둘이 잘 이야기 해봐.
이러한 상황의 원흉인 금발 사내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그리 말하더니 혼자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름 제멋대로 도와줄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덕분에 일이 더 꼬여버렸다.
카렌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세레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말이다.
적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맞이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다.
‘…어쩔 수 없나.’
계속 침묵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카렌은 속으로 낮은 한숨을 쉬며 세레스를 쳐다보았다.
세레스가 이렇게 어두운 얼굴을 하는 건 처음 본다.
아침부터 계속 피한 게 그렇게 충격이었던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게, 어제 그런 세레스의 모습을 보았는데 마음 편히 대할 수 있을리가 없다. 카렌에게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일단 그건 모르는 척 해야겠지.’
당연하지만 카렌은 어제 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세레스에게 이야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건 철저하게 비밀로 해야 했다. 괜히 세레스가 알았다가는 더욱 사이만 어색해질 게 뻔했으니까.
그런 건 싫다. 비록 아침에는 어쩔 수 없이 어색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지만, 카렌은 여전히 세레스가 좋았다.
매번 온화하게 웃어주는 믿음직스러운 언니.
카렌은 그러한 관계를 잃고 싶지 않다.
그러면 자신은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차피 원하는 목표는 하나다.
세레스와 네토루의 커플링을 최대한 막는 것.
카렌은 인정하기로 했다. 현실적으로 두 사람의 커플링을 완전히 막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네토루 말대로 큰 전력이 될 텐데 무작정 막는 건 어리석다.
하지만…. 자잘한 전투 정도는 스와핑 해도 괜찮지 않을까? 굳이 세레스가 매번 네토루랑 계속 커플링할 필요는 없잖아.
그래, 일단 여기부터 시작하자.
머릿속으로 그리 정리한 카렌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쓸데없이 말을 돌리는 것보다는 정면 돌파가 그녀의 취향이었다.
“세레스.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어. 한 번 들어줄래?”
“제안이요? 그게 뭔가요?”
“그…. 이번에 하는 스와핑 말인데.”
“네.”
다행히 세레스도 지금의 침묵이 불편한 건 똑같았는지 귀를 기울여주었다.
다만 문제는 네토루랑 서로 커플링을 번갈아 가면서 하자는 제안을 어떻게 제안할지가 문제였는데,
이미 판은 벌어졌다.
카렌은 속으로 정리하던 자신의 생각을 세레스에게 최대한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이야기했다.
이와중에도 어제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모른 척해야 했기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튼, 그래서 우리 번갈아 가면서 스와핑하는 게 어때?”
이윽고 그렇게 이야기가 끝났을 때였다.
조금은 고민이라도 해볼 줄 알았는데, 세레스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카렌. 그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안 된다고? 어째서?”
“…그건. 카렌도 잘 알고 있잖아요.”
“……”
뭐라 따지려던 카렌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아?
지금 세레스의 말, 어제 네토루가 했던 거랑 너무 똑같다.
그래서 카렌은 저도 모르게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세레스는 지금 내가 네토루의 커플링 파트너로서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예. 당신이 저를 대신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세레스는 네토루랑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어제 그런 모습을 보였으면서 말이다.
으득─.
카렌은 이런 식으로 괜히 강한 척 하는 세레스를 보며 순간 울컥 하는 감정을 느꼈다.
왜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주지 않는 걸까?
카렌은 세레스가 솔직한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주어도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대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것은 분노보다는 서운함에 가까웠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앱없나님, 스라님 후원 감사합니다!
세레스 일러 후원자 명단
(에어프라이 졸린듯 앱없나 미르마루 천경 광휘 테조스 연초 팬텀_743 앱없나 스라)
댓글 보고 제목을 바꿔볼까 생각했는데,
솔직히 이 이상으로 잘 맞는 제목은 못 찾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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