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46화 (46/148)

EP.46 변화

1.

네토루는 여성들의 숙소로 향했다.

남성들과 여성들의 숙소는 두 건물로 서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냥 건물만 다를 뿐이지 사실상 서로 한 건물처럼 붙어 있는 형태였다.

남녀 간의 왕래는 자유롭다.

다만 그래도 눈치가 아예 안 드는 건 아니었기에 모여드는 몇몇 시선을 느끼며 네토루는 여성들의 구역에 발을 내딛었다.

확실히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공간이라 그럴까.

공기의 분위기부터가 남다른 느낌이었다. 남성들의 숙소들과 다르게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이러니까 마치 남자를 꺼리는 금단의 구역에 들어온 기분이다.

두 여자 때문에 어젯밤에도 은근슬쩍 한 번 들어오기는 했지만, 상황상 둘러볼 여유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네토루는 느긋하게 안을 구경하며 카렌의 방으로 향했다.

그렇게 복도를 따라 걷고 있자니 부대원들의 이름이 적인 명패가 길게 이어지는 가운데,

이윽고 네토루는 [카렌]이라는 명패가 달린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기가 직접 쓴 것인지 제법 귀여운 글씨체가 특징이었다.

피식 웃은 네토루는 가볍게 방문을 두들겼다.

──들어와.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답은 빨랐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네토루는 자기 침대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카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늦었네.”

어제 일을 떠올린 걸까.

살짝 고개를 든 채 새초롬하게 쳐다보는 것이 딱 봐도 카렌은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다. 검은 눈동자에 유난히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

식당에서는 최대한 의연한 티를 냈지만,

역시 어제 일이 고스란히 가슴에 남아 있는 거겠지. 오히려 쉽게 흘려넘기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네토루는 그런 카렌을 흘겨보다가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흐음.”

방 안의 풍경은 어제 그대로다.

깔끔하고, 가지런한. 딱 카렌이라는 느낌.

그러다가도 침대 구석에는 귀엽게 생긴 곰 인형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혹시 잘 때 저걸 안고 자는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던 그때였다.

카렌이 게슴츠레 노려보며 말했다.

“…너무 여자 방을 노골적으로 살펴보는 거 아니야?”

“너도 어제 내 방을 살펴봤을 거 아니야.”

“……”

그냥 툭 찔러본 말인데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차마 부정은 못 하겠는지 카렌이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불만스레 쳐다보며 항의하는 듯한 시선을 보낼 뿐.

네토루는 그런 카렌과 딱히 기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 대하던 대로 그녀에게 물었다.

“바로 치료 시작할까?”

“……”

그런데 카렌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표정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피는 그 눈빛에 네토루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카렌이 투덜거렸다.

“……네토루. 역시 너는 너무 뻔뻔해.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그리 태연하게 있을 수 있는 거야?”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원하는데.”

“…그건.”

카렌이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지만,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속으로 삼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끝내 카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조금은 미안한 기색 정도는 보여줘도 되잖아.”

그것은 스스로조차도 자신감이 없는, 들릴 듯 말듯한 작은 목소리였다. 네토루가 그런 그녀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려던 그때였다.

“…아무튼, 됐어.”

낮은 한숨 소리와 함께 이러한 기 싸움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건지 카렌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드물게도 카렌이 먼저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그것에 네토루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짓자,

“…뭐야, 그 표정은.”

발끝을 살짝 들며 네토루의 가슴팍에 두 손을 대며 밀착하던 카렌이 눈을 가늘 게 좁혔다.

“아니. 그냥 신기해서.”

“뭐가.”

“네가 멀쩡한 상태에서 이런 식으로 먼저 다가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

잠시 생각에 잠기던 카렌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얼른 시작하자. 네가 내 방에 오래 있으면 다른 부대원들이 오해할 거야.”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듯 카렌이 급하게 옷깃을 잡아당기며 입을 맞췄다. 네토루는 그런 그녀의 리드에 저항하지 않고 따라주었다.

─쪽

입술을 열자 카렌의 혀가 먼저 비집고 들어왔다. 서로의 침이 자연스럽게 교환되며, 어느새인가 발끝을 세우던 카렌이 팔과 손으로 목을 감싸 안기 시작했다. 마치 좀 더 가까이 오라는 것처럼.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런 카렌은 뭔가 낯설다.

카렌의 분위기는 네토루가 알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그래도 풋풋한 소녀처럼 낯간지러워하는 태도가 있었는데, 지금은 어딘가 딱딱하면서도 무미건조했다.

그래, 마치 정말로 치료를 받는 것처럼.

어제 일 떄문에 뭔가 변화가 있던 건가. 의아해 하면서도 네토루는 카렌과의 키스에 의식을 집중했다. 그동안 하던 대로 마력 패스를 형성하고, 오버히트로 과열된 그녀의 마력 신경계를 가라앉힌다.

그러한 과정에 남녀 간의 달콤함은 없다. 건조한 침묵 속에서 치료를 위해 몇 분 동안 계속 서로의 입술이 연결되며, 뒤얽히는 혀를 통해 서로의 입안으로 침이 수차례 오갔을 때였다.

“……후.”

이제는 괜찮다고 판단한 걸까. 키스의 여운을 즐길 여유도 없이 카렌이 네토루의 목에 걸고 있던 팔을 풀고는 가슴팍을 넌지시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자신의 옷차림을 정리하더니 카렌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토루. 세레스랑 스와핑 하지 말라고는 안 할게.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

“내 몸 상태가 좋아지면 나랑도 커플링 해.”

“……”

이건 무슨 의미로 하는 이야기일까. 그런 고민을 할 여유조차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카렌이 은연히 다가오며, 키스로 인해 흐트러진 네토루의 옷깃을 정리하더니 말했다.

“…솔직히 이 정도 부탁은 들어줘도 되잖아. 평소에 그렇게 나를 험하게 다뤄놓고서.”

낮게 깔린 카렌의 목소리에는 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투덜거리는 듯하면서도, 거절하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낮은 울림. 네토루는 이걸 거절하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카렌이 제시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그래서 대답은?”

옷깃을 정리하던 턱 밑에서 카렌이 눈을 치켜뜬 채 올려다본다. 째릿 노려보는 것이 도도하면서도 어딘가 명랑하기까지 하다.

이건 사실상 부탁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깝다. 흐림 없는 깨끗한 검은 눈동자가 마치 고양이과 맹수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그런 카렌의 눈빛에 못 이긴 척 네토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카렌, 네가 그걸로 괜찮다면야.”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원래 두 사람하고 계속 커플링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다만 문제는 세레스인데.

마침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카렌이 먼저 말했다.

“…걱정 마. 세레스는 내가 설득할게.”

2.

네토루는 방에서 나오기 전에 다시 한번 몸가짐을 확인했다.

아무래도 여자애의 방에서 나오는 일이다. 다른 부대원들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받으면 곤란하다. 카렌도 그걸 의식했는지 옆에서 도와주었다.

─이런 것도 확인해야 하나?

─…혹시 모르니까.

즐거운 느낌이었다. 여자애가 옷차림을 점검해주는 건 말이다. 카렌은 작은 구겨짐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을 정도다.

그렇게 옷차림을 정리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카렌의 방에서 나왔을 때였다.

네토루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

방문을 열고 나오니 타이밍 나쁘게도 세레스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방문이 열리자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흐린 표정을 지으며 네토루를 응시했다.

갑자기 카렌의 방에서 나온 것에 놀란 표정은 없다. 단지 불안해하는 눈초리다.

거기서 네토루는 깨달았다. 이건 타이밍이 나쁜 게 아니라 단순히 세레스가 계속 내가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혹시 방에 들어가는 것도 지켜보고 있었나?

거북한 분위기의 침묵이 서로의 시선 속에서 맴돌았다. 네토루도, 세레스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말문이 쉽게 열리는 게 이상했다. 솔직히 변함없이 당돌했던 카렌이 이상한 일이다.

세레스는 그렇게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 와중에 두 자색 눈동자에는 온갖 감정이 스치면서 옅은 분홍빛 입술은 줄곧 달싹거렸다. 그 미묘한 몸짓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보는 이가 도리어 애간장이 탈 정도로 안타깝다.

만약 다른 부대원들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꽤나 놀라겠지. 이건 그들이 아는 세레스가 아니니까. 식당에서는 그나마 평소처럼 행동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어젯밤의 세레스에 가깝다. 꺾인 백합처럼 그저 연약하게만 느껴지는 여인.

그래도 세레스가 여기서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도 제법 큰 용기를 낸 거겠지. 아침부터 네토루를 계속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세레스였다.

이윽고 세레스가 애써 부드럽게 웃더니 말했다.

“그, 어제는 제가 실례가 많았네요.”

과연. 이야기는 거기부터 시작하는 걸까. 네토루는 복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부대원들이 없는 걸 확인하고서 나직이 물었다.

“정확히 어떤 것들이?”

“읏…. 그게….”

이런 짓궂은 태도는 생각 못 한 걸까. 애써 태연하게 웃던 세레스는 안절부절못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 끝내 눈을 슬며시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제 방에 있더군요. 혹시 당신이 데려다준 건가요?”

“그러면 누구겠어?”

“…역시 그렇겠죠?”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무의식적으로 자기의 입술을 매만지고 있었다.

새하얗던 얼굴이 조금씩 붉어진다.

네토루가 그런 세레스의 행동에 담긴 의미를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제 네토루는 방 안에서 세레스와 강제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거기가 끝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이후의 기억이 없어서 세레스는 지금 이렇게 혼란스러워하는 거겠지.

카렌이 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녀는 아마 그대로 남녀 간의 관계로 이어질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걱정 마. 이상한 짓은 안 했으니까.”

“…그, 그렇죠? 그냥 키스만 한 거죠…?  역시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던 거군요.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냐고?”

세레스가 뭘 말하려는 건지 대충 알것 같다.

사실 하려고 하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세레스와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겠지. 네토루가 원하는 건 그런 식으로 자포자기한 여자가 아니었다.

“혹시 그 이상 무언가 해주길 원했어?”

“아, 아니요…. 그냥. 놀라서요…. 저는 분명 당신이……. 키스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니까….”

“……”

두서 없는 이야기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한 세레스가 또 고개를 푹 수그렸다. 이래 가지고는 제대로 된 대화도 하기 힘들다.

자칫하다가는 세레스가 또 어제와 같은 상태가 될 것 같았기에 네토루는 이 이상 어젯밤 이야기로 질질 끌지 않기로 했다.

여기서 그가 진정으로 궁금한 건 세레스가 여기서 왜 기다리고 있었느냐였다.

“세레스. 그래서 카렌의 방앞에서 나를 계속 기다린 이유는 뭐야?”

“…네?”

설마 자기 생각을 꿰뚫릴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흠칫 놀란 세레스가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자, 잠시만….  저는 그냥 카렌을….”

“괜히 내 앞에서 되지도 않는 거짓말은 하지 말고.”

“…죄송해요. 저는 그게…. 궁금해서요.”

“궁금하다니. 뭐가?”

“…. 지금 카렌의 방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나온 건가요?”

무엇을 상상하는지 모르겠지만, 조심스레 묻는 세레스의 자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세레스를 보며 네토루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그건 카렌한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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