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5 변화
아침이 되었다.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이 가득했고, 따스한 햇볕이 온 세상을 비춘다. 그 아래서는 제 각자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채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시민들의 얼굴에 그늘은 없었다. 서로 자기 할 일 바쁜 그 모습은 평상시의 일상을 그대로 만끽하는 듯했다.
그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 평화로운 모습들이 괜히 나츠오의 가슴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내가 이렇게 느긋한 곳에 있어도 되는 걸까.
후방에 오래 있다 보니 우습게도 언제 버그들이 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이제는 그리울 지경이다.
‘하아.’
그렇게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 한숨을 쉬던 나츠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늘 아침에 퇴원한 391부대의 칼라일 대신 익숙한 얼굴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어저께 입원한 393부대원들이었다.
그 숫자는 무려 6명. 부대 전력에 큰 영향을 끼칠 정도의 대인원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며칠 전에 격렬한 전투가 있었던 듯했다.
그야말로 하루종일 싸웠다고 하던가.
한 번 출격하는 것만으로도 큰 체력을 소모하는데, 쉬지 않고 싸운다는 건 남녀 따지지 않고 몸에 엄청난 무리를 주는 일이었다.
게다가 아직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미숙한 상태의 10대 연령의 파일럿들에게는 더욱 힘들었겠지.
심지어 그 전투 때문에 부대원들이 죽었다. 나츠오는 물론이고 카렌하고도 친한 애들이었다.
괴로운 일이다. 다들 나츠오보다 한두 살 어린 애들이었다. 그렇지만 버그의 총탄과 포탄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이제는 보지 못할 죽은 부대원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던 나츠오는 주먹을 꽈득 쥐었다.
만약 내가 그 전투에 있었다면 뭔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어쩌면 한두 사람이라도 더 살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렇게 후방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나츠오는 이러한 무력감이 너무나도 싫었다.
“나츠오 형. 뭘 그리 멍 때리고 있어?”
그때였다. 393부대에서 병원으로 요양 온 타쿠야가 등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그 목소리에 나츠오는 올라오던 감정을 억누르고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타쿠야 역시 나츠오와 비슷하게 마력 신경계에 무리가 와서 입원한 상태였다. 정확히 말하면 과도한 마력사용으로 인한 마력 탈진이라고 해야 하나.
성기병의 장기간 기동이나, 한계 이상의 출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경우 종종 겪는 일이었다.
…특히 상대가 세레스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나츠오가 직접 상대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지만 세레스의 성기병은 연비가 무척이나 나쁜듯했다. 마력 소모율이 다른 성기병과 비교할 때 최소 두세 배라고 하던가.
아스나 정비 반장이 말하길, 세레스는 기관에서 육성된 파일럿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른 존재랬다.
여러 남성 파트너를 상대할 수 있도록 범용성 좋은 마력 신경계를 구축하는 기관 출신의 여성 파일럿들과 다르게,
여기사들의 경우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서 어릴 때 몸 안에 마력 신경계를 구축하기 마련이었으니.
그렇기에 세레스는 기관 출신의 파일럿이 다루기는 어려운 여인이었다. 마력 신경계의 구조부터가 기관 출신의 파일럿에게는 이질적인 것이다.
그 덕분인지 실제로 세레스의 커플링 파트너는 종종 바뀌고는 했다. 나츠오가 기억하기로 대부분 반년 이상을 버티지 못하고 스와핑 하고는 했다. 그러니 타쿠야 정도면 나름 오래 버틴 편이었다.
“오호. 혹시 카렌 누나 생각하고 있던 거야? 안 그래도 요즘 얼굴 못 본 지 오래돼서 보고 싶을 거 아니야.”
창밖을 보며 궁상떨고 있던 걸, 그렇게 오해했는지 문득 타쿠야가 음흉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꺼냈다.
나츠오는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솔직히 말해서 카렌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던 건 아니니까.
“…그야, 당연히 보고 싶지.”
“그러면 빨리 회복하고 퇴원해. 안 그래도 카렌 누나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언제까지 딴 사람이랑 커플링 하게 놔둘 거야?”
…딴 사람이라. 나츠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빨리 회복할 수 있으면 벌써 퇴원했다. 내심 나츠오도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언제까지 카렌을 혼자 놔둘 것인가.
게다가 카렌이 다른 사람하고 커플링하는 건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같이 입원했으면서, 먼저 퇴원한 칼라일이 온갖 이야기를 꺼내두고 간 탓인지 더욱 신경 쓰였다.
─뭐야? 아직 파트너가 19살이 아니라고? 그러면 둘이 아직 섹스도 못 해봤겠네?
─아, 아니… 칼라일 씨! 남들이 듣겠어요! 안 그래도 복도에 간호사들이….
─나츠오! 내 말 잘 들어라. 처녀는 무조건 네가 먹어야 한다.
─아…. 제발! 목소리 좀 낮춰요!
─멍청아! 지금 네가 상황의 심각성을 잘 모르나 본데 성인이 된 여성 파일럿에게 첫 경험이라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야. 알겠어?
─주, 중요한 일…?
칼라일의 얼굴이 사뭇 심각해졌다. 덕분에 나츠오도 부끄러움을 가라앉히고 조금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녀 간의 육체적 관계가 커플링에 여러 영향을 준다는 건 기관에서 여러 번 교육받았기에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첫 경험에 관한 이야기는 나츠오도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첫 경험이 그렇게 중요해요?
─암! 중요하지. 애초에 여성의 마력 신경계에 제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마력 패스가 어디인지 알아?
─어디인데요?
─여성의 질이야. 즉, 보지지.
─……
─야야…. 나츠오 그렇게 쓰레기처럼 쳐다보지 마.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니까. 아무튼, 내 이야기 잘 들어라. 왜 첫 경험이 중요한지 지금부터 자세하게 설명해줄 테니까.
칼라일─391부대의 남성 파일럿. 병원에서 매일 같이 음담패설을 즐겨하던 경박한 사내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중에는 진지하게 새겨들을만한 조언들도 있었다. 행실이 어떻든 그 역시 나름 베테랑 파일럿이라는 거겠지. 나츠오가 모르는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첫 경험은 여성 파일럿의 체질에 큰 변화를 주는 듯했다. 일부러 성인 이전에 남녀 간의 성교를 금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 때문이었다.
커플링 파장에 중요한 영향을 주는 요소들은 여럿 있지만, 그중 하나가 대표적으로 친밀감…. 즉 남녀간의 의식 교류였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성 파일럿’의 마력 속성이 여성 파일럿의 체질과 얼마나 적합한지였다.
여성 파일럿은 남성 파일럿의 마력을 몸 안으로 받아들여 성기병의 동력으로 이끌어낸다.
그러니 여성 파일럿이 남성 파일럿의 마력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면 성기병을 기동할 수 없었고, 마력 성질에 따라 성기병의 동력으로 이끌어내는 효율마저도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이러한 마력 속성 문제는 사실상 태생적인 문제인지라 어떻게 해결 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마력은 개인이 지닌 고유적인 특성이었기에, 마력의 속성은 훈련으로 바꿀 수 없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남성 파일럿의 마력을 바꿀 수는 없지만, 반대로 여성 파일럿의 체질을 어느 정도 개선할 방법은 있다.
그게 바로 남녀 간의 성교였다.
대체로 남성의 정액은 농도 높은 마력을 품기 마련이었고, 그것을 여성의 자궁 안에 흘려 넣는다면 손실 없이 여성의 마력 신경계에 커다란 자극을 줄 수가 있었다.
마력 신경계에 직접 강한 자극을 새김으로서 여성의 체질을 인위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여성 파일럿의 마력 신경계가 자궁구에 자리 잡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여성 파일럿의 첫 경험이 중요한 건,
첫 경험에서 얻게 되는 자극이 여성 파일럿의 체질 개선에 꽤나 유의미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
‘…첫 경험인가.’
카렌을 생각하며 계속 이상한 상상만 하고 있어서 그럴까. 왠지 쑥스러워진 나츠오는 볼을 긁적였다.
그리고 보니 이제 곧 카렌의 생일이다.
즉 카렌도 성인이 된다는 소리다. 물론 그래봤자 다른 사람 눈에는 겨우 드디어 생일 지난 19살 소녀에 불과하겠지만, 어쨌든 이제는 남녀 간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시기.
솔직히 말해서 야한 생각이 안 들면 거짓말이겠지. 카렌보다도 먼저 성인이 된 나츠오에게는 무척이나 고된 기다림이었다.
청소년 간의 풋풋함도 좋지만, 나츠오 역시 남자인지라 성인 남녀간의 야릇한 관계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안 그래도 카렌은 기관에서부터 나츠오가 항상 바라보던 여자애였다. 즉 첫사랑이었다.
성실하고 이지적인 성격도 그렇고, 여성으로서나, 커플링 파트너로서나 어느 하나 완벽하지 않은 게 없다.
게다가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면도 좋다.
그 덕분에 가끔식 누나 노릇을 하며 애 취급하던 탓에 서로 투닥거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것도 나쁘진 않다.
어떻게든 놓치기 싫은 여자애. 옆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소중한 존재. 그게 바로 카렌이었다.
‘…빨리 보고 싶네.’
서로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다.
어릴 때부터 식사도, 훈련도, 공부도.
언제나 그 녀석이 옆에 있었다.
어쩌면 빨리 복귀하고 싶다는 초조함의 진짜 원인은 사실 카렌이 보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초조함 속에서 병원 생활에 질릴 대로 질린 나츠오는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빨리 회복할 방법이 없을까.
카렌이 퇴원한지 벌써 한 달.
나츠오는 회복이 굼뜬 자신의 마력 신경계를 생각하며 강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복귀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설령 악마의 유혹이라고 해도 말이다.
2.
카렌의 도움 덕분에 393부대에 녹아들기 시작하면서 네토루는 자연스럽게 부대원들과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평소 부대원들의 식사는 시끌벅적한 편이었다.
이 고립된 공간 속에서 무슨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항상 새로운 이야기가 흘러넘치고는 했다.
그렇지만.
평소라면 적당한 주제로 이야기 소리가 가득했을, 그런 부대 식당 안은 현재 어색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카렌과 세레스 때문이었다.
눈치가 없으면 모를 수가 없는 미묘한 기류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러 다니고 있었다. 부대원들이 아무런 말 없이 식사에 집중하고 있는 건 그래서였다.
네토루조차도 섣불리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부대원들은 카렌과 세레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침부터 저 두사람 왜저래?
─챈들러 형. 형이 가서 좀 물어봐요….
─큼큼…. 이미 물어봤어. 그런데 나한테도 안 알려주는데 어떻게 하냐.
─이 정도로 세레스 언니랑 카렌 언니가 어색하게 있는 건 처음보는데….
이런 이야기가 아까부터 부대원들 사이에서 비밀스럽게 오가는 가운데,
네토루는 두 사람의 상태를 관찰해보았다.
다행히 세레스는 나름대로 괜찮아 보였다. 부대원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건지 가끔씩 평소의 그것처럼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기도 했다. 적어도 어제처럼 나약해진 모습은 아니다.
다만 문제는 카렌이다.
하룻밤 푹 자고 나니 어느 정도 괜찮아진 듯하지만, 여전히 오버히트 진행 중인지 안색이 안 좋다. 게다가 입맛도 없는 건지 깨작깨작 식판이 비워지는 속도가 무척 느리다.
딱 봐도 상태가 안 좋은 그 모습에 세레스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카렌. 몸 상태가 나빠보이는데…. 역시 저랑 같이 의무실에 가보는 게…?”
“…괜찮아. 내가 알아서 갈 테니까.”
그렇게 말한 카렌이 젓가락을 내려두고는 슬며시 식판을 들고 일어섰다. 그러자 부대원들의 시선이 한 곳에 모였다. 얼핏봐도 세레스가 불편해서 자리를 피하는 모양새였으니.
“미안. 나 먼저 가볼게. 오늘은 밥맛이 없네.”
그런 시선을 의식한 걸까.
부대원들에게 사과하며 카렌이 옆을 스칠 때였다.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준비 되면 치료하러 와.”
네토루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속삭임.
카렌은 그리 중얼거리고는 유유히 식당에서 혼자 사라졌다.
아무래도 어제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카렌은 치료를 계속 받을 생각인 듯했다.
보통이라면 며칠은 피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인데.
“…대단한걸.”
덕분에 네토루는 무심코 감탄하고 말았다.
저건 기가 세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합리적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쉽게 부러질 아이가 아니라는 건 분명했다.
정말이지, 싫어할 수가 없는 아이다.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웃고 있는데, 문득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리자 세레스가 은연히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혹시 카렌의 중얼거림을 방금 들은 걸까. 무언가 묻고 싶은 표정으로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팬텀_743 후원 감사합니다.
세레스 일러 후원자 명단
(에어프라이 졸린듯 앱없나 미르마루 천경 광휘 테조스 연초 팬텀_743)
카렌 일러 수정 좀 했습니다.
아래 러프는 세레스입니다. (자세만 잡은 상태라 언제든지 수정될 수 있습니다) -> 리메이크 사정으로 지웠습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