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파트너는 누구인가
1.
“싫은데.”
또다.
이번에도 변함없는 저 뻔뻔한 얼굴.
평소라면 저 뻔뻔한 얼굴을 그냥 능글맞다고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네토루가 세레스랑 커플링하는 걸 막고 싶었으니까.
방금 그 모습을 보고도 세레스가 네토루랑 커플링 하는 걸 용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어찌 되었든 세레스는 부대 안에서 카렌이 그 누구보다 의지할 수 있는 언니였고,
멋모르던 시절부터 줄곧 돌봐주던 선배였다.
그렇기에 아무리 그런 뒷사정이 있다고 해도 카렌은 여전히 세레스가 좋았다.
오히려 이제는 불쌍하게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렌은 네토루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째서? 왜 싫은 건데?”
목소리가 흔들린다. 짧은 시간, 너무 많은 것을 겪은 탓일까. 이상할 정도로 감정 조절이 안 된다.
어쩌면 오버 히트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레스 때문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멈추었으니.
“카렌.”
그때 내려다보던 네토루가 이름을 부르며 카렌과 시선의 높이를 맞추듯 몸을 낮추었다.
그것은 어딘가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확고히 전달하려는 확고함이기도 했다.
네토루는 차분한 얼굴로 카렌의 눈을 응시하고는 말했다.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아?”
“……”
…너도 알고 있다.
그 말의 의미를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네토루가 왜 스와핑을 하려는지 하루종일 계속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실제로 두 사람의 첫 커플링을 내심 인정하기도 했으니.
본인이 보기에도, 네토루의 역량을 받아내기에 카렌이라는 여성 파일럿은 부족한 것이 많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그냥 참으려고 했다.
두 사람의 커플링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판단하려고 했다.
적어도 세레스의 약함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무리다.
카렌은 입술을 달싹이며, 오늘 하루 동안 저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응어리진 감정을 토해냈다.
“…너는 지금 내가 커플링 파트너로서 부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 물음에 네토루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그렇다고 고민하는 기색도, 망설이는 기색도 없다.
그저 지그시 쳐다보더니 그가 손을 뻗기 시작했다.
“카렌. 일단 여기서 그만하자. 내일 다시 이야기해. 지금 넌 제대로 된 상태가 아니야.”
어느새인가 네토루의 손은 카렌의 허리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배꼽 아래를 지나, 하복부로 향했다.
그렇게 그의 손이 멈춘 곳은 카렌의 마력 신경계가 있는 위치였다.
세레스가 갑자기 찾아온 탓에 치료가 멈춘 상태.
네토루는 카렌의 하복부에 차오르는 열기를 느낀 듯 미간을 좁혔다.
“점점 오버 히트가 심해지고 있어.”
“…싫어. 여기서 그만하기는 뭘 그만해. 나는 아직 할 말이 많아.”
카렌은 허락도 없이 몸에 손을 댄 네토루의 손을 쳐냈다. 그의 말대로 확실히 오버 히트가 심해지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세레스가 괴로워하는 거 보기 싫어.”
“하지만 스와핑은 세레스가 받아들인 일이야.”
“그래서 정말 나 대신에 세레스랑 커플링 하겠다는 거야…? 애초에 원래 네 커플링 파트너는 나잖아. 게다가 왜 나랑 상의도 없이 스와핑 하는 건데?”
“…….”
여전히 네토루의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다. 그 모습을 보던 카렌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만약 네가 정말 세레스랑 계속 커플링 하겠다면,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가만히 안 있겠다고?”
“응.”
카렌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네토루의 눈빛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건 마치 어린 애의 투정을 받아주는 듯한, 어른의 눈이었다.
“그래서 가만히 안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사령관님한테 가서…….”
“설마 사령관님한테 말하겠다고?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지금 부대 사정을 알고도?”
“……”
카렌은 입을 꾹 다물자 네토루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세레스랑 내가 커플링하면 부대원들의 부담이 많이 줄어들 거야. 세레스가 어떻든 큰 전력이 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니까.”
네토루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했다. 그 태도에 결연했던 카렌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새겨졌다.
그제야 카렌도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얼마나 어린애 같은 투정을 했는지. 오버히트 때문에 제대로 된 사고가 안 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세레스가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도, 이대로 계속 참으라는 건가?
그 사실에 카렌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네토루를 쳐다볼 때였다.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네가 세레스를 대신하는 건 불가능해.”
그것은 지금껏 카렌이 경험해본 적 없는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항상 뻔뻔하고 능글맞으면서도 그 안에 작은 상냥함이 있었는데….
싸늘하게 식은 녀석의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판다.
그렇지만 카렌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건 단순히 그의 말이 옳다는 것도 있지만, 뭐라고 반박을 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흡은 괴롭고, 머리는 너무나도 아프다.
──그리고 어느새 시야가 흐릿했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감정을 토해내서 그럴까. 아니면 계속 오버 히트를 참고 있어서 그런 걸까.
“으읏….”
피가 끓듯 깊은 현기증이 머리를 짓누른다. 카렌은 뜨거운 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숨이 가파르게 변하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다.
거기서 네토루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카렌. 이런 몸으로 뭘 하겠다는 거야.”
그리고 그것이 카렌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2.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자정이 되었다.
옷장 안에서 버티는 카렌을 꺼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오버 히트로 상태가 안 좋던 녀석이다. 문을 열었을 때부터 이미 반쯤 실신 상태였다.
논리 따위 없는 어린애 같은 카렌의 투정은 그 때문이겠지. 오버 히트가 되면 제대로 된 사고 유지가 안 되니까. 어찌 보면 술에 취한 사람이 더 이성적일지도 모른다.
아쉽게도 카렌의 치료는 불가능했다. 오버 히트로 뜨겁게 작열하고 있는 마력 신경계를 진정시키려면, 카렌의 의식이 깨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네토루의 일거리도 두 배가 되었다.
기절한 세레스는 물론이고 카렌을 방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으니까. 당연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피해야하는 비밀스러운 작업이었다.
아무리 네토루라도 부대원들의 시선을 피해 두 명의 여자를 등에 업고 몰래 움직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덕분에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렇게 무사히 일을 끝낸 네토루는 방에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부터 씻고는 책상에 앉았다.
아직 하지 못한 마지막 일과가 남은 상태다.
전투가 있는 날은 결코 빼먹지 않던 작업. 네토루는 서랍을 잠그고 있던 자물쇠를 풀고서, 그 안에 있던 노트 2개를 꺼내 책상 위로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두 노트의 표지에는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카렌> <세레스>
“……”
네토루는 노트에 적힌 두 이름을 조용히 노려보았다. 오늘 일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조금 고민해봐야 했으니까.
정신적으로 나약한 세레스….
그리고 그런 나약함을 알게 된 카렌.
앞으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본래 생각하던 계획에서 너무 꼬여버렸다. 생각 이상으로 나약한 세레스도 문제고, 그걸 알게 된 카렌도 문제다.
“…쉽지 않은데.”
꼬인 인간관계만큼 해결하기 어려운 건 없다.
카렌의 성격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분명 무언가 행동하겠지. 그러면 그건 긍정적인 부분일까?
당연하지만 네토루는 이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다.
이제 와서 계획을 바꾸는 건 불가능. 애초에 이 부대에서는 카렌과 세레스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다.
“……”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 상황에 순응할 수밖에.
네토루는 스스로를 그렇게 납득 시킨 채 먼저 <세레스>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는 연필을 쥐고서 부지런히 내용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네토루가 적는 것은 오늘 전투로 알게 된 세레스에 대한 정보였다.
그녀의 성향, 특성, 마력 신경계의 구조…….
성기병의 출력을 비롯해 세레스만의 장단점.
느끼고 깨달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적는다.
비록 세레스에게는 정신적 나약함이 단점으로 있지만, 그래도 그녀가 지닌 잠재력을 포기하는 건 아쉽다.
세레스의 성기병은 확실히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세레스의 출력과 마력 방출은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대단한 레벨이었으니.
과연…. 역시 기사단 출신답다고 해야 하나.
그러니 네토루는 이걸 어떻게든 잘 가다듬고 싶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인가.”
잠시 고민하던 네토루는 세레스를 ‘조교’ 했을 때 어떤 걸 중점으로 해야 할지,
노트에 상세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모든 내용은 한글로 기입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노트를 보더라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렇게 세레스에 대해 모두 정리하고서, 네토루는 마지막으로 <카렌>의 노트를 펼쳤다.
이 안에 무슨 내용을 적을까, 생각에 잠기던 네토루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그냥 나랑 계속 커플링 해
카렌의 열 띤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다.
솔직히 썩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비록 세레스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런 요구를 들어본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으니.
다만 카렌이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게 있다.
네토루는 카렌과 계속 커플링 할 생각이었다. 다만 세레스하고의 커플링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서,
그녀에게 싫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굳이 커플링을 한 사람하고만 고집할 이유는 없다.
세레스와 카렌은 각자 너무나도 서로 다른 색을 지닌 여성인 동시에, 장단점이 뚜렷한 파트너들이었다.
그러니 네토루는 두 사람이 지닌 고유의 색을 더욱 진하게 하는 동시에, 능력과 개성을 개화시킬 생각이었다. 각 여성의 능력이 필요한 상황에 따라 맞춰서 싸울 수 있도록 말이다.
그런 점에서 카렌에게 필요한 것은….
고민하던 네토루는 느긋하게 <카렌>의 노트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번 파트 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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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조스님, 연초님 후원 감사합니다.
세레스 일러 후원자 명단
(에어프라이 졸린듯 앱없나 미르마루 천경 광휘 테조스 연초)
아마 25일쯤? 새로운 표지가 나올듯합니다.
선작 5000 기념으로 노벨피아 쪽에서 표지 제작을 ㅎㅎ.
그때는 아마 성기병의 형태랑 여성 파일럿의 모습이 같이 나올겁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