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43화 (43/148)

EP.43 파트너는 누구인가

“뭐해. 하던 말이나 계속해.”

“자, 잠시만요…. 방금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나지 않았어요?”

“무슨 소리? 세레스. 계속 이렇게 딴 말 할 거야?”

“아, 아니…. 방금 분명….”

네토루는 아무런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행동했다.

저 소리를 인정하면, 카렌의 존재를 들킨다.

그런데 아무래도 세레스는 방금 전의 소리가 꽤나 신경 쓰이는 듯했다. 시선이 자꾸 옷장으로 향한다.

일단 세레스의 의식을 되돌릴 필요가 있다. 그걸 위해선 이대로 좀 더 자극하는 것도 또 다른 방법이겠지만, 그랬다가는 정말 선을 넘게 된다.

‘…어차피 이 이상은 무리인가.’

네토루는 젖히고 있던 세레스의 옷자락을 천천히 놓기 시작했다. 당연하지만 진심으로 세레스를 덮칠 생각은 없었다.

지금 카렌이 보고 있다.

그러니 여기서 계속 세레스를 압박하면 괜히 나중에 상황만 꼬이게 될 터.

어쨌든 카렌도 지금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대충 상황은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세레스가 방금 뭔 짓을 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그러니 변명할 건덕지는 충분하다.

그래서 네토루는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빼앗듯 쥐고 있던 녹음기를 부서뜨렸다.

─콰드득.

“…아.”

그 행동에 힐끔힐끔 옷장을 쳐다보던 세레스가 놀란 얼굴이 되어 탄성과 함께 눈을 깜박였다. 어차피 굳이 이딴 걸 쓰지 않아도 세레스를 다루는 건 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레스.”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그 순간 네토루의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서늘한 음영이 가라앉았고, 차갑게 식은 눈동자가 맹금처럼 섬뜩해졌다.

“………”

밑에 깔려있던 세레스가 두려운 듯 몸을 희미하게 떨렸다. 눈동자, 입술, 숨소리, 어느 하나 멀쩡한 게 없다. 이윽고 어느새인가 세레스의 안색마저도 창백해졌을 때였다.

네토루의 목소리에서 오싹한 냉기가 흘러나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 건데, 만약 다음에도 이런 허튼짓했다가는 가만히 안 둘 거야.

그것은 단단하게 갈아낸 얼음의 칼날과도 같은, 지금의 세레스로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울림이었다.

“대답은?”

“…알겠어요.”

몸을 떨며 시선을 피하던 세레스가 조막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네토루는 무심히 혀를 차고는 그녀를 속박하고 있던 손목을 풀어주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세레스는 한동안 그대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제일 먼저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레스가 옷을 고쳐 입는 소리만이 방안을 조용히 채우고,

무거운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침대 구석에서 세레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토루. 방금 일은 진심으로 사과할게요. 그렇지만 오해하지 마세요. 다른 건 몰라도 오늘처럼 일방적인 커플링은 하고 싶지 않다는 건 진심이에요. 저는 그렇게 싸우고 싶지 않아요.”

일방적인 커플링이라는 것은 즉, 세레스에게 그 어떤 주도권도 양보하지 않는 커플링을 말하는 거겠지.

세레스는 지금 간곡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커플링할 때 자신에게 조금만 맞춰달라고.

그렇게 주도권을 빼앗긴 게 싫은 걸까. 비록 능력을 시험할 겸 전투 중에 세레스를 험하게 다루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방법을 쓸 생각을 할 줄이야.

아니,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이 여자가 나약하고, 깨지기 쉽다는 건 첫 커플링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니.

그때 세레스의 어떤 트라우마를 자극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조종석에서 울먹이던 모습을 생각하면 결코 정신적으로 강인한 여자는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도 그러했고.

“네토루. 믿어주세요.”

연기 따위는 없는, 세레스의 솔직한 애원. 어느새인가 그녀는 정말로 꺾인 백합이 되어 있었다.

“저는 여기서 더 이상 자존심 세울 생각은 없어요. 제가 당신을 어떻게 할 능력이 없다는 건 이제 잘 알았으니까.”

그리 말하는 세레스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체념이 어려 있었다.

그런 세레스를 보니 네토루는 의문이었다.

이럴 거면 왜 스와핑을 받아들였는가.

굳이 이렇게 자존심을 굽히고 들어오지 않고, 면담 때 거부할 수도 있었을 텐데.

혹시 부대 사정 때문에 그런 걸까.

그래서 이렇게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맞바꾸고 있는 건가.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굴면서도, 나랑 계속 커플링을 하겠다는 거야?”

“네.”

세레스는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자존감 없는 모습 속에서, 그녀는 마치 이것만큼은 확실히 말하고 싶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저는 더 이상 카렌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는 싫어요. 그리고 그 아이가 예전의 저처럼 고생하는 것도…. 싫고요.”

“……”

…예전의 저처럼이라.

역시 그건 기사단 시절을 말하는 걸까.

“…솔직히 인정할게요. 콕피트 안에서 당신이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저는 이기적인 여자예요.”

세레스는 자신의 가슴 위로 손을 얹으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당신이 싫어서…. 저는 커플링 상대로는 맞지 않은 타쿠야를 계속 고집한 채, 아직 성인조차 되지 않은 아이에게 당신을 떠넘겼어요. 누가 보더라도 이건 참으로 추악한 일이죠.”

─솔직히 인정하는 게 어때. 너는 이기적인 여자야. 겉으로는 애들을 챙기는 척해도 안은 추악하기 짝이 없지.

콕피트 안에서 네토루가 비난했던 내용을, 세레스가 자조 어린 표정을 지으며 그대로 되풀이한다.

솔직히 썩 유쾌한 모습은 아니었다.

네토루가 원했던 건 부대원들이 겉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온화하고 믿음직스러운 여자였으니까.

적어도 이런 식으로 자기 멋대로 무너져 내리려는 여자가 아니다.

하지만 왜 갑자기 이렇게 무너진 건가?

단순히 항거할 수 없는 주도권 문제 때문인가?

아니면 방금 말한 카렌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 의문에 답하듯 세레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아이…. 오늘도 오버히트로 고생하고 있더군요. 그런 주제에 정작 저를 비롯해서 부대원들에게는 아픈 걸 숨기고 있고….”

세레스는 괴로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인가 눈가가 불그스름하게 변하고 있었다.

“만약 카렌이 계속 당신을 상대하게 된다면, 분명 언젠가 몸이 망가지고 말 거예요. 마력 신경계가 부서지거나, 아니면 최악의 경우 폐인이 될 수도 있겠죠.”

“세레스. 너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요. 저도 괜찮진 않겠죠. 솔직히 저도 당신을 감당할 자신은 없어요. 그렇지만….”

세레스는 시선이 또다시 바닥을 긴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도착한 곳은 카렌이 숨어 있는 옷장이었다.

분명 그곳에 시선이 닿은 것은 우연이었겠지만,

세레스는 숨어 있는 카렌을 응시하듯 나직이 말했다.

“저는 계속 무리하는 카렌을 지켜볼 수가 없네요. 여기사였던 저조차도 당신을 상대하기 버거운데,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힘겨운 일이었겠어요.”

왠지 목덜미가 뻐근해지는 기분이다.

지금 이 이야기, 카렌도 분명 듣고 있을 테니까.

“…참회하고 싶으면 카렌한테 직접 가서 말해. 괜히 나한테 이렇게 후회한다고 울지 말고.”

“…죄송해요. 눈물이 멈추지가 않아요.”

“아니…. 하아.”

엉망진창이다. 네토루는 한숨을 쉬었다.

약점 하나 잡아보겠다고 녹음기를 들고 온 여자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더 이상 화를 낼 분위기가 아니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망가질 것 같았으니까.

세레스는 이미 자신의 모든 약함을 드러낸 채 순순히 항복한 상태였다. 사실상 이쯤되면 자신의 모든 걸 굽히고 애걸하는 거나 다름없다.

네토루는 그런 세레스의 모습을 그저 지켜보았다.

‘…좋지 않은데.’

여기사로서의 뛰어난 자질은 좋지만, 네토루는 정신적으로 나약한 여자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쉽게 부러진다면 무의미하다.

카렌처럼 강인한 소녀라면 어떻게든 치료해줄 수 있지만, 세레스처럼 정신적으로 약한 것은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다.

더욱이 네토루는 세레스 같은 경우를 잘 알고 있다.

부러진 것은 어떻게 되돌릴 수가 없다.

곤란하군. 네토루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지금 이 여자에게 필요한 건 채찍이 아니다.

“세레스.”

“…네.”

이름을 부르자 느릿하게 고개를 드는 세레스의 눈동자에는 색이 없다. 그저 체념만이 남아 있을 뿐. 티끌만큼의 반항심도 없다.

차라리 이것마저도 연기였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진짜 세레스일 것이다.

393부대. 이곳에서 세레스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은 가식이고, 거짓이다. 그저 껍데기에 불과한 가짜투성이들.

지금까지 어린 소년들만 상대하며 쌓아온 자존감은 방금 일로 모두 부서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이제는 그 외의 것들도 부서지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러면 정말 망가질 테니까.

그러니 누군가가 여기서 강제로 이 흐름을 끊어줄 필요가 있다.

“오늘 이야기는 나중에 이어서 하는 게 좋겠네.”

“…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세레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토루는 그런 그녀와 거리를 좁히고는 그녀를 강제로 품에 안았다.

“……!?”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세레스가 놀란 듯 몸을 떨었다. 하지만 저항은 없다. 오히려 몸에 힘을 풀고는 받아들였다. 품 속에서 축 늘어지는 세레스의 몸이 선명히 느껴졌다.

그 상태에서 네토루는 그녀의 턱을 당기며 고개를 들게 했다.

“……아.”

그 행동의 의미를 본능적으로 눈치챘는지, 이윽고 세레스가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네토루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곧바로 마력 패스를 연결한 채, 그대로 그녀의 의식을 강제로 끊었다.

─털썩

그러자 침대 위로 세레스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사실상 기절한 거나 다름없지만…. 뭐,

이럴 때는 강제로 재우는 게 제일이었다.

이대로 푹 잔 다음에 내일 아침이 되면 어느 정도 차분함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낫겠지.

다만 문제는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카렌인데….

네토루는 등을 돌려 옷장을 바라보았다.

2.

이런 건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게 낫다.

그 정도로 세레스의 행동과 이야기는 충격이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된 걸까. 카렌은 양팔로 무릎을 껴안고서 고개를 파묻었다.

“……”

우울한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믿고 있던 사람한테서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을 때는 말이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이었다.

세레스가 탈의실에서 했던 말이 사실상 모두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저는 괜찮아요. 조종이 난폭하다고 해도 기사단에서 상대했던 파트너만큼은 아니라서요. 오히려 네토루 정도면 양호한 편이죠. 기사들은 네토루보다 더 심하거든요.

─비록 제가 그곳에서 퇴출당했다고 하지만 네토루 정도 되는 사내는 어렵지 않게 다룰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오늘 첫 커플링도 별문제 없이 끝났잖아요?

그 자신감과 이야기들은 모두 가짜였던 건가.

…정말이지. 이럴 거면 왜 스와핑을 한 거래.

심지어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모습으로 세레스가 울고 있는 모습까지 봤으니, 더욱 우울해진다.

첫 커플링만으로 저렇게 됐는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쯤 되면 세레스에게 먼저 스와핑을 제안 했던 네토루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쩌다가 정말 이렇게 된 거지.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며 그렇게 온갖 잡념들이 카렌의 머릿속을 침범할 때였다.

─끼이익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공간 속.

그러한 곳에 문이 열리며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 눈부심에 고개를 들어보니 네토루의 얼굴이 보였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침묵은 길지 않았다.

옷장 안에서 무릎을 껴안고 있는 그대로, 카렌은 네토루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너. 세레스랑 스와핑 하지마.”

갑작스러운 요구였을까.

네토루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면?”

“그냥 나랑 계속 커플링 해.”

“……”

또 다시 짤막한 침묵.

하지만 역시 이번 침묵도 길지는 않았다.

당돌한 카렌의 요구에 네토루는 평소의 그것처럼,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싫은데.”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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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프라이 졸린듯 앱없나 미르마루 천경 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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