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 파트너는 누구인가
1.
막 씻고 온 탓인지 카렌의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의식하려고 하지 않아도 방 안의 공기가 무언가 부드럽게 바뀌는 걸 체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흐음.”
재미있는 일이다. 네토루는 턱을 괸 채 자신의 침대 위에 있는 카렌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고로 잘 때만큼이나 긴장감 풀릴 때는 없다. 그래서인지 지금의 카렌은 너무나도 무방비했다.
흑단처럼 고운 머리카락이 이불보 위로 흘러내렸고,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옷차림에서는 새하얀 살결이 드문드문 엿보였다. 희미하게 물기가 남은 피부는 평소보다도 더 앳되어 보인다.
…보아하니 오버히트 때문에 온 것 같은데.
아무래도 기다리다가 지쳐 잠들었나 보다. 오버 히트가 되면 제대로 정신을 가누기 힘들게 되니까 말이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할까.”
사실 이대로 푹 재워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원래 오버 히트에서 회복하는 방법이 잠을 자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오버 히트 상태가 되면 여성 파일럿들이 괜히 해롱거리는 게 아니다.
게다가 카렌이 치료라고 믿는 그것도 사실 너무 의존해서 좋을 건 없었다. 사람의 몸이라는 게 참 간악한 존재였으니까. 편안함을 찾다 보면, 저도 모르게 중독된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어떻게 보면 그게 네토루가 진정으로 노리는 것이기도 했다.
본인이 원하든 말든, 네토루는 카렌을 커플링 파트너로서 점찍은 상태였으니까. 그러니 그녀가 의존하면 의존할수록 네토루에게 나쁠 건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깊게 잠든 탓일까.
머리카락을 쓸어 만져도 카렌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볼을 꼬집어보아도 그렇다. 덕분에 왠지 좀 더 짓궂은 장난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살아 숨 쉬는 귀여운 인형을 주운 듯한 기분이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놔두면 내일 아침까지 쭉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몸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머리카락을 쓸어만지며 카렌의 턱선을 따라 움직이던 네토루의 손가락은 곧 그녀의 어깨를 타고 쇄골까지 내려갔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손가락을 즐겁게 하고 있다. 이윽고 그러한 감촉을 즐기며 가슴에 도달할 때였다.
네토루는 내려가던 손을 멈추고서 망설임 없이 천천히 떼어냈다. 솔직히 여기서 남자로서 욕심이 나지 않으면 그건 거짓말이다. 어차피 자고 있는 사이에 만져도 모를 게 뻔한 일이고.
하지만 그래서는 재미가 없다.
네토루가 원하는 건 그런 단순한 육체적인 만족감이 아니다. 커플링이라는 건 남녀 간의 감정 교류가 중요했고, 이왕 파트너로 골랐으니 소중하게 잘 대해줄 필요가 있었다.
여성 파일럿은 연약한 존재였다.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는 유리 공예품처럼 섬세하고, 나약하다.
그러니 상냥히 대해주는 것이 좋겠지.
여기서 섣불리 행동해서 전에 있던 부대 같은 일을 답습할 수는 없다. 애초에 이제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었고. 슬슬 제대로된 파트너를 만들 필요가 있다.
그러니 기껏 고른 파트너가 전처럼 망가지면 곤란하다.
네토루는 카렌의 성격도, 몸도 상당히 마음에 든 상태였다. 게다가 나이도 어리다. 이런 아이는 무척이나 드물었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소녀였으니.
“으응….”
방금 자신이 어떤 위기에 처했는지 알기는 할까.
열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는 카렌의 입술 사이로 달콤한 숨소리가 흘러나오자, 네토루는 피식 웃었다.
적당히 눈요기도 했으니 슬슬 깨우는 게 좋겠지.
네토루는 카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일어나. 카렌.”
당연하지만 깊게 잠든 탓에 카렌의 반응은 굼떴다. 하지만 그래도 몇 번 몸을 흔들어주지 반응이 오기는 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내 방에서 자고 있을 거야.”
“……으응?”
이윽고 카렌이 눈을 떴다.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가 멍하니 네토루를 응시했다. 새초롬하면서도 어딘가 흐리멍텅한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네토루는 그녀의 입가에 칠칠치 않게 붙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을 한 가닥 떼주었다.
“……?”
그런 손길을 얌전히 받으면서도 그녀의 눈이 천천히 주위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상황을 인지했는지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기 시작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아… 아? 자, 잠시만…. 지금 이게…?”
왜 가끔 애니메이션 보면 있지 않은가.
상황을 인지하고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여주인공이 마지막엔 외마디 울상 어린 비명을 지르는… .
현재 카렌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아니, 그럴 예정이었다. 네토루는 눈치 좋게 손을 움직여 카렌의 입을 틀어막았다.
“쉿. 비명은 지르지 말고. 부대원들에게 우리 관계를 알릴 생각이야?”
“우웁!”
여기서 괜히 카렌이 비명을 질렀다가 다른 녀석들에게 이 상황을 들키면 곤란했다.
사실 이 세계에서는 남녀가 한방에 있는 건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애초에 섹스라는 행위를 장려하기도 했으니까. 건전한 관계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건전한 관계라면.
다만 아직 카렌은 생일 지나지 않은 미성년자였다. 매우 아쉽게도 말이다.
그렇기에 카렌은 아직 건전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읍…!”
“아, 그렇다고 손 깨물지 말고. 아프니까.”
네토루는 카렌의 침이 약간 묻어 나오는 걸 느끼며,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주었다.
그러자 여전히 동공이 흔들리는 검은 눈으로 째릿 노려보며 카렌이 소리쳤다.
“우, 우리 관계라니! 남이 들으면 오해할 소리 하지마!”
그게 신경 쓰였던 건가? 네토루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어디 이렇게 성실하게 치료해주는 의사가 있다고.
“아, 또! 그 뻔뻔한 얼굴!”
다만 이런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카렌은 붉어진 얼굴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나더니 구석에 있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네토루는 그런 카렌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흐트러진 이불보를 정리했다. 제법 오랫동안 누워 있던 건지 카렌의 냄새가 이불에 진하게 베어져 있었다.
남자라면 모를까 솔직히 썩 불쾌하진 않았다.
2.
대체로 성기병 파일럿들에게 배정되는 막사 안의 개인방들은 제법 깔끔하고 호화스러운 편이었다. 방의 크기도 컸고, 각각의 방마다 간단한 세면이 가능한 화장실이 있을 정도였다.
사령관이 버그를 관측할 때마다 곧바로 출격할 수 있도록 항시 대기해야 하기에 성기병 파일럿들의 스트레스는 엄청나다. 그러니 부대 안에서 편히 쉬기 위한 개인방을 대충 만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소문에 따르면 제일 근본적인 이유로 남녀 관계를 위한 사령부의 배려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성기병 파일럿 특성상 그러한 관계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하는 편이었으니.
그러니 각 방마다 개인 세면실은 필수적이었다.
“하아….”
카렌은 화장실의 거울 앞에 서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직면한 현재 상황이 너무 당혹스럽고 부끄러워서였다.
“…. 내가 미쳤지. 카렌아…. 너, 왜 오버 히트 때마다 이런 이상한 실수를 하는 거야….”
카렌은 마른세수를 하며 무방비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자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녀석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니 얼굴이 미친듯이 화끈거렸다.
당연하지만 이 녀석의 방에서 잘 생각은 없었다.
원래라면 그냥 얌전히 기다렸다가 녀석이 오면 치료받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욕탕에서 몸을 씻으면서 몸이 나른해진 것도 있고, 오버히트로 하복부부터 시작된 열이 머리까지 오르면서 점점 졸음이 쏟아졌다는 점이다. 그것은 항거할 수 없는 폭력과도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릴 정도로 의외로 네토루의 방이 깔끔했던 점도 컸다.
의외로 차분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네토루의 방은 남자 방 치고는 칙칙한 냄새도 없었고, 정리정돈도 잘 되어 있었다. 애처럼 물건이 너저분하게 돌아다니는 나츠오의 방을 생각하면 너무 비교될 정도였다.
게다가 뭔지 모를 어려운 전문 서적들이 책장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솔직히 어딘가 어른의 방을 연상케 했다.
물론…. 애초에 녀석의 나이를 생각하면 어른이 맞기는 했지만,
“…그 녀석, 나한테 이상한 짓은 안 했겠지?”
카렌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했다. 딱히 의심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녀석이 건전한 성격의 소유는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옷차림과 몸을 천천히 더듬어보자 다행스럽게도 뭔가 수상쩍은 부분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문제는.
“머리. 많이 뻗쳤네….”
머리가 다 마르기도 채 전에 씻고 나서 침대에 누운 탓일까. 머리카락 상태가 엉망이었다.
카렌은 다시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세면대 근처로 녀석이 사용하는 빗이 있었지만, 차마 녀석이 사용하던 걸 빌릴 수는 없기에 자기 손에 물을 살짝 묻혀 뻗친 머리카락을 얌전히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잠결에 흐트러진 옷맵시까지 깔끔히 정리하고서 화장실에서 나오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
그 상태로 잠시 정지한 채 카렌은 고민했다.
녀석을 보면 제일 먼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멋대로 침대 위에서 자서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냥 뻔뻔하게 치료해달라고 말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사과부터 하는 게 낫겠지. 아무리 부끄럽다고 하지만 실수한 건 이쪽이고.
끝내 그렇게 결론을 내리며 화장실에서 나오자, 긴장하던 카렌의 눈앞으로 의외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
카렌이 화장실에 오랫동안 틀어박혀 있던 탓일까.
그새 할일을 찾듯 네토루가 책상에 앉은 채 진지한 얼굴로 노트 위에 무언가 적고 있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찾아볼 수 없는 녀석의 진지한 분위기에 카렌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그렇게 네토루의 등 뒤에 선 카렌은 뭘 이리 열심히 적고 있는 건지, 고개를 살짝 내밀어 몰래 확인해보았다.
그리고는 곧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문자지?’
네토루가 노트에 적고 있는 건 카렌으로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문자였다. 종족 가리지 않고 모든 왕국이 같은 문자를 쓰는 걸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무슨 고대어라도 되는 건가?
그런데 녀석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이어지는 의문을 참지 못하고 끝내 카렌은 넌지시 물어보았다.
“네토루, 지금 뭘 그리 열심히 적는 거야?”
“글쎄. 비밀인데.”
“…뭐?”
그때 탁 하고 네토루는 작성하던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는 서랍을 열고 안에 노트를 집어넣었다. 심지어 자물쇠까지 거는 모습이 퍽 비밀스러웠다.
덕분에 카렌은 저 노트의 정체가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졌다. 정체 모를 문자도 그렇고, 뭔데 저렇게 진지했던 걸까.
하지만 정말로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난 네토루가 말했다.
“시작한다?”
“……응.”
네토루가 허락을 구하듯 지그시 쳐다보자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카렌은 저도 모르게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허리 뒤로 올라오는 네토루의 손을 의식했다.
더 이상 낯설다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네토루의 손길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능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리 뒤로 올라온 손의 위치가 뭔가 상냥했다. 어딘가 낯간지러우면서도, 불쾌하지 않은 그런 곳.
조금만 손이 더 내려갔다면 당장 쳐냈겠지만…. 심리적으로 안심하고 마는 절묘한 위치였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이건 여자를 많이 접해본…….
그 순간이었다.
─쪽
무슨 생각을 그리 하냐는 듯이 카렌은 자신의 입술이 포개지는 걸 느꼈다.
허리가 당겨지며, 입술이 열린다. 카렌은 네토루의 혀를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이제는 이러한 행위가 익숙해진 것인지 자연스럽게 서로의 혀가 얽혔다.
그렇게 남녀의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만들어진 끈적끈적한 침줄기가 길게 늘어지며,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 위로 맞닿는다.
어느새인가 허리 뒤로 올라온 네토루의 손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도 없이 카렌은 녀석과 연결된 마력 패스에 의식을 집중했다.
이윽고 카렌은 몸 안에서 올라오던 몸 안의 열기가 점점 가라앉는 걸 느꼈다. 몸이 상쾌해진다. 열이 차오르며 괴롭던 하복부가 편안해졌다.
그래서일까.
카렌은 아까부터 가만히 있던 자신의 손을 움직여 네토루의 목을 끌어안고는 더욱 치료를 갈구했다. 그것은 몸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그래, 이건 치료니까….
오로지 뇌리에 그러한 생각을 때려박던 그때였다.
─네토루. 안에 있어요?
“……!?”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카렌은 그 목소리의 주인에 깜짝 놀라 얼어붙고 말았다.
뭐야, 갑자기 왜 세레스가?
그 답을 요구하듯 양 손으로 네토루의 가슴팍을 천천히 밀어내며, 그 상태로 눈만 떼굴떼굴 굴린 채 네토루를 올려다보자.
시선이 마주친 네토루가 어색하게 웃고는 말했다.
“이런. 세레스가 온다는 걸 깜박했네.”
이게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평소의 그것처럼 뻔뻔한 어투였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얄밉다고 생각했겠지만,
카렌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이건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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