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7 파트너는 누구인가
다행히 전투는 무사히 끝난 듯했다.
부대원들이 복귀하는 걸 하염없이 기다리던 카렌은 버그들의 핏물을 뒤집어쓴 성기병들이 하나둘씩 돌아오는 걸 지켜보았다.
성기병의 몸체에 상처들이 여럿 있지만 심각한 건 아니다. 아스나의 도움을 받아 여성 파일럿들이 조정 작업 좀 하면 어렵지 않게 회복할 수 있는 자잘한 상처들이었다.
그렇게 각 소대별로 돌아오고 있는 성기병들을 지켜보던 그때였다.
이윽고 2소대도 뒤를 이어 모습을 드러내자,
“……?”
그들을 살펴보던 카렌은 문득 세레스의 머리색을 닮은 성기병을 발견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세레스의 성기병은 다른 2소대원들에 비해 유독 혼자 눈에 띌 정도로 상태가 이상했다.
혼자 몇 시간 동안 격렬한 전투를 치른 기사처럼 유독 다른 성기병들보다 몸체에 자잘한 상처가 많고, 버그들의 살점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고 해야 할까.
그 예로 당장 같은 2소대원인 쿄쿄의 성기병이나 란의 성기병만 봐도, 그렇다.
세레스의 성기병과 달리 두 성기병의 몸체는 비교적 말끔했다. 이쯤 되면 같은 곳에서 싸운 게 맞는지 의문일 정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은 곧 답을 내렸다.
“…. 또 자기 멋대로 싸웠나 보네.”
이제는 네토루랑 커플링을 여러 번 해본 덕분일까. 세레스의 성기병이 왜 혼자서 저런 상태인지 대충은 상상이 된다.
아무래도 파트너가 잠시 바뀌어도 자기중심적인 조종 방식은 여전한 듯했다. 저 좋지 않은 버릇 좀 어떻게 고쳐야 하는데. 그 어떤 여자가 저리 난폭한 남자랑 커플링 하는 걸 좋아할까.
나는 이제 나름 익숙해져서 괜찮지만,
“하아. 네토루, 저 녀석…. 적당히 좀 하지.”
이마를 부여잡으며 카렌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예상이 맞다면 아마 콕피트 안의 분위기는 최악이리라. 세레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뻔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두 사람은 성질이 안 맞는다.
그나마 카렌은 인내를 가지며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말았지만, 세레스는 어떨까. 평소에 온화한 사람일수록 정작 화를 내면 제일 무서운 법이었다.
아무리 네토루가 이상한 능력으로 커플링을 성공해도, 정작 호흡이 안 맞으면 무의미하다. 게다가 평소에는 티를 안 내도 세레스는 남자를 꺼리는 성향이 있었다.
…이러면 저 두 사람의 스와핑은 꽝인가.
대충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격납고에 무사히 안착한 란의 성기병에서 콕피트가 열리며 쌍둥이 자매가 몸을 꺼내기 시작했다.
─…우와. 생각보다 빨리 복귀했네?
─린. 바로 씻을 거야?
─응. 그러려고. 언니는?
가벼운 소풍을 갔다 온 것처럼 두 사람은 여유가 넘쳤다. 그만큼 전투가 수월하게 끝났다는 거겠지.
얼굴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성기병에서 내려오던 란이 카렌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놀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카렌, 설마 여기서 계속 우리 기다리고 있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아스나 씨 좀 도와주고 있었어.”
“그래…?”
란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연 카렌의 품속에 꼬옥 안겨 왔다.
“뭐, 뭐야? 갑자기…?”
“…으으. 카렌. 미안해. 그동안 힘들었지?”
갑작스러운 란의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그 자그마한 몸집 덕분일까. 카렌이 품에 꼭 안긴 란의 머리를 저도 모르게 쓰다듬고 있을 때였다.
“……흐음.”
카렌은 란의 뒤에 있는 린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어딘가 감탄하는 듯 하면서도, 불쌍히 쳐다보는 듯한 묘한 시선이었다.
뭔가 싶어 눈을 끔벅이며 쳐다보자,
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카렌, 그동안 고생 많이 했겠네.”
“뭐가?”
“누렁이, 저 녀석 평소에도 그렇게 미친놈처럼 싸우는 거야? 너는 맨날 질질 끌려다니고?”
미친놈?
혹시 네토루가 뭔가 사고라도 친 걸까?
그 답을 알 수가 없어서 카렌의 시선이 방황할 때였다. 어느새 세레스의 성기병에서 콕피트가 열리는 걸 보았다.
카렌은 그 모습을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린과 란의 태도를 보아하니 분명 뭔가 일이 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 카렌의 걱정과 다르게.
“……?”
정작 콕피트 안에서 몸을 꺼내는 두 사람은 분위기는 의외로 평온했다. 오히려 저게 뭔가 싶을 정도로 사이좋게 투닥거리고 있었다.
─…놔줘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
─그 상태로? 그냥 나한테 기대. 괜히 아까처럼 풀썩 주저앉지 말고.
─그, 그건 실수에요! 그냥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꺄앗?
─거봐. 하체에 힘이 안 들어가네.
─아니, 갑자기 어디를 만지는 거예요!
네토루는 세레스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부상을 입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몸 상태가 안 좋은지 세레스는 네토루에게 어쩔 수 없이 기대는 모양새였다.
카렌은 그런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의외로 사이가 좋은 건가? 그런데 어째서?
2,
성기병 파일럿들이 최전선에서 싸운다면, 사령관들은 후방에서 그런 성기병 파일럿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아이기스>
전투 중에 사령관들이 파일럿들을 보조하기 위한 부대 내부의 마도 시설로,
관측을 비롯해 먼 거리에도 마법을 투사하기 위한 장거리 지원 능력 및 수집한 데이터를 가공하고, 정리하여 각 성기병들한테 데이터 링크를 해주는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아이기스를 이용한 사령관의 지원이 없다면 버그들의 위치를 확인하는 건 물론이고, 주변의 지형 구조 또한 알 수 없다.
현시대의 전투에서 아이기스를 사용하는 사령관의 강력한 맵핑 능력이 없으면, 성기병 파일럿들은 사실상 눈뜬 장님이 되는 거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기스는 부대 내에서도 핵심 시설로 뽑혔고, 평상시에는 사령관만이 들락거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음.”
어두컴컴하고 고요한 분위기. 주변에 있는 광원이라고는 허공에 떠오른 여러 개의 스크린만이 전부. 그 순간 리엔의 눈동자에 비치는 건 스크린의 내용뿐이었다.
만약 아스나가 이 모습을 봤다면 잔소리 좀 했겠지만, 리엔에게는 너무나도 편안한 환경이다.
쓸데없는 잡념을 지우고 오롯이 하나에 몰두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이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폐쇄적이기까지 한 아이기스에서 혼자 의자에 쭈그려 앉아 오늘 있었던 전투 기록을 확인하던 리엔은 미간을 좁혔다.
현재 그녀가 보고 있는 건 2소대의 실시간 전투 기록이었다.
비록 스크린에 표시되어 있는 것은 지형 위에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점들뿐이지만, 그런 점들의 움직임을 통해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확인해보는 것이다.
전투 기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세레스&네토루]
두 사람의 이름이 표시된 점이 돌연 혼자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붉은색 점으로 점철된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달린다.
미친 짓이다. 무모하다.
비록 지금 보는 것은 저장된 데이터에 불과했지만,
실시간으로 전투가 진행되고 있을 때는 순간 자신이 잘못 관측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 어떤 파일럿이 혼자 저렇게 수백 미터가 넘는 거리를 돌진할 생각을 할까.
네토루는 그렇다 쳐도, 리엔이 알고 있는 세레스는 결코 이런 식으로 싸우는 여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결과는 대단했다.
혼자 용감하게 전열을 파고들더니, 하나의 날카로운 창이 되어 버그들의 진형을 깨부수는 모습은 어딘가 비현실적이기 까지 했다.
직접 현장을 보지 못한 탓일까.
몇 번이나 기록을 되돌려보아도, 점 하나가 붉은색 점들로 점철된 곳을 혼자 종횡하는 모습을 리엔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쉽사리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렴풋이 드는 생각은 하나 있다.
‘…네토루, 그 남자의 실력이 이 정도였나?’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네토루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내심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세레스를 이렇게 다룰 수 있는 실력이라니.
어떻게 ‘기관’ 출신이 이런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걸까?
물론 기관에서 길러진 파일럿이라고 해서 기사들만큼이나 강해지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건 분명했다.
여전히 혁명기라는 악몽에 사로잡혀 있는 귀족들에게 필요한 건 전선에서 적당히 숫자를 채워줄 양산형 파일럿이지,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할 실력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자기들끼리 비술을 꼭꼭 숨겨두는 게 아닌가. 이러한 전란 속에서는 힘이 곧 권위나 다름없었다.
그런 점에서 네토루는 어딘가 비정상적이다.
“……”
다른 귀족들은 이런 네토루를 알고 있는 걸까?
안 그래도 리엔은 종종 생각하고는 했다.
세인트 미샤르 출신의 세레스를 제대로 다루어줄 수 있는 파일럿이 와주기를 말이다.
하지만 상급 사령부에서 그 정도 실력이 있는 귀한 기사를 이곳에 배치해줄 리는 만무했고, 그래서 사실상 포기하고 있던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393부대에 보내준 건가?
그러면 어째서?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만약 이걸 알고 보냈다면 상급 사령부에서 온갖 생색을 다 냈을 텐데…?
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걸로 전략적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그럼 이제 중요한 건 두 사람의 상성 문제다. 안 그래도 세레스가 남성을 꺼리는 성향이 있다는 걸 알기에 걱정이었다.
그러니 세레스의 생각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사령관이 명령하면 어쩔 수 없이 따르겠지만, 리엔은 세레스에게 직접 의견을 묻고 싶었다. 그것이 후방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사령관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배려니.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리엔은 어두컴컴했던 아이기스 안을 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이기스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사령관님.”
호출했던 세레스가 나타났다.
리엔은 의자를 돌려 세레스를 맞이했다. 그러다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서 고개를 개웃거렸다.
세레스의 발걸음이 어딘가 어색했기 때문이었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표정이 나쁘다. 누가 봐도 마력 신경계에 무리가 온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렌이 걱정스레 물었다.
“…세레스. 몸은 괜찮은가요?”
“예. 괜찮습니다. 조금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
세레스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리엔이 평소에 알고 있는 세레스의 온화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래도 옅은 그림자 한쪽으로는 괴로움이 엿 보인다. 그래서 조금 머뭇거리고 있을 때였다.
리엔을 눈여겨보던 세레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역시 스와핑에 관한 일로 부르신 거겠죠?”
“예…. 맞아요. 세레스는 네토루를 커플링 파트너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예상했던 질문이다. 하지만 세레스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으니까.
커플링이 끝났음에도 여전히 하복부가 욱신거린다. 덕분에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마력 신경계가 가냘픈 비명을 질렀다. 과연, 카렌이 왜 그렇게 오버 히트로 고생하는지 이제는 잘 알것 같다.
이러한 아픔은 오랜만이다. 한때 흔히 있었던 일이지만 지난 수년간 경험해보지 못한 덕분에 이제는 낯설면서도 두렵다. 세레스는 그때로 돌아가는 것이 싫었다.
‘역시 계속 떠넘기는 건 무리겠지.’
그러나 그 순간 세레스의 뇌리로 카렌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이기심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성실한 아이. 그리고 지금도 오버 히트로 괴로워하는….
오늘 직접 상대해보니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네토루, 그는 아직 19살 생일조차 지나지 않은 소녀에게는 생각 이상으로 위험한 커플링 파트너라는 걸.
그러니 지금이라도 되돌리는 게 낫겠지. 애초에 이게 옳다. 기사단 출신인 자신조차 이럴 지경인데, 그 아이는 그 동안 얼마나 한계까지 몸을 몰아붙이고 있을까.
단순히 두렵다고 피하기에는 잘못하다가 카렌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커플링 파트너라는 건 서로의 역량이 얼마나 잘 맞는지도 중요했으니.
기사급의 실력에는 기사가 상대해주는 게 옳다.
게다가 좋든 싫든 이미 답은 정해져 있는 상태고. 세레스는 리엔이 뭘 원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네토루가 자신을 쉽게 놓아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 조차도.
이윽고 고민을 끝낸 세레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무딜링호흡망나니, 기브릴님 후원 감사합니다!
후원 덕분에 착실하게 카렌 일러 제작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