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 파트너 스와핑
혁명기.
그 어느 때보다 전란이 심한 시기였다.
왕국 내부에서 귀족들과 평민들이 서로의 목을 내걸며 싸운 탓에 무수한 피를 흘렸고, 그러한 틈새 속에서 버그들이 난데없이 침공 해왔다.
갈등이 절정에 이른 시대.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된 이계의 괴물들과의 전쟁.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흐름 속에서는 사연 없는 사람 찾는 게 더 힘들다.
그러니 이 여자도 뭔가 사연이 있겠지
네토루는 세레스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현실에서라면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자색 머리카락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허리까지 닿은 옅은 보라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나는 몸의 라인 또한 아름답다.
어린 부대원들에게는 찾아 볼 수 없는 백인 특유의 육감적인 몸매와 흰 살결은 성적으로 음란하기보다는 왠지 모르게 우아한 느낌을 자아냈다.
남자가 좋아할 만한 요소는 다 모여 있다.
전형적인 착하고, 몸매 좋은 연상의 여인이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여기가 조금만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남자에게 꽤나 이쁨받으며 생활하고 있었겠지.
아니, 이 세상의 장르가 조금만 달랐어도 아마 어디 착하기 착한 누나 역할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 그녀가 있는 세상의 세계관이 이러한데.
이런 곳에서 한 사람 하나하나의 사연을 일일이 알기에는 삶이 너무 너저분해진다. 그렇기에 네토루는 세레스가 뭔 일을 겪었는지 크게 관심은 없다.
다만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많이 아쉽다. 세레스처럼 어린 시절부터 교육 받은 여자의 몸은 무척이나 귀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여자란, 좋은 성기병이었다.
그러니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세레스는 전투 성능이 뛰어난 기체였다.
그렇기에 네토루는 지금부터 커플링을 통해 이 성능 좋은 기체를 철저하게 ‘연구’해볼 생각이었다.
세레스가 몸 안에 어떤 마력 신경계를 담고 있고, 그 구조가 어떠하며, 장점과 단점을 분류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까지 네토루가 온갖 악소문을 껴안고 파트너를 자주 교체했던 건 이러한 연구를 위해서였다.
여성 파일럿의 마력 신경계에 간섭할 수 있는 능력만이 가능한,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네토루가 도달한 능력의 극한점.
남성 파일럿이 강해지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그걸 위해 여성 파일럿이 강해질 필요가 있다.
그래서 네토루는 여성 파일럿의 마력 신경계에 대해서 오래동안 연구했다.
마력 신경계에 인위적으로 간섭이 가능하다는 건 마력 신경계의 구조도 인위적으로 비틀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더욱이 세레스처럼 기사단에서 어릴 때부터 특별하게 훈련받은 게 아니라면,
대부분의 여성 파일럿들이 구축한 마력 신경계의 구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기관에서 ‘생산’된 양산형의 한계인 것이다.
이러한 태생적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마력 신경계의 구조를 뿌리부터 다시 바꿔줄 줄 수밖에 없다.
…다만 문제는 이걸 누구한테 먼저 시도해보는 게 좋을지였는데.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건 역시 한사람 뿐이었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네토루는 다시 세레스의 뒷모습을 응시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쥐고 있는 조정간을 통해 형성된 마력 패스에서 계속 마력이 뽑혀나가고 있었다.
꽤나 탐욕적이다.
거기서 네토루는 성기병의 출력을 확인해보았다.
500…. 1000… 1500…. 2000….
당연하지만 세레스가 마력을 가져가는 만큼이나 성기병의 한계 출력 역시 빠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이상한 게 있다. 누가 봐도 한계 출력은 일정 패턴을 그리며 단계적으로 상승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어디까지 따라올 수 있냐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역시 이 여자는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건가?
‘…이런 건 오랜만인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왠지 우습다. 네토루는 입매를 비틀며 조용히 웃었다. 최근 들어서는 능력을 시험해보기만 했지, 반대로 능력을 시험당한 적은 드물었으니까.
초창기에는 종종 당하던 장난이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알고 있을까. 이쪽이 일부러 순순히 그녀의 계획에 따라주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네토루는 지금 세레스에게 마력 패스의 주도권을 의도적으로 넘겨준 상태였다. 그녀가 스스로 출력을 얼마나 높일 수 있을지 궁금했으니까. 이것 또한 연구를 위한 관찰의 일종이었다.
여성 파일럿의 능력을 제일 간단하게 평가해볼 수 있는 영역이 바로 성기병의 출력이었다.
긴박한 전투 속에서 성기병은 기동이 자유로워야 한다.
언제든지 몸을 멈출 수 있어야 하고, 언제든지 몸이 전력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했다. 마치 실제 전투를 치르는 인간의 육신처럼.
그런 점에서 현재 네토루가 세레스에게서 확인하려 건 두 가지 요소였다.
일순간 딜레이 없이 낼 수 있는 성기병의 최대 출력 ─ 한계 출력.
성기병의 출력을 높이기 위한 ─연비.
이 중에서 연비에 대한 부분은 대략적으로 확인이 끝났다.
확실히 육중한 형태를 지닌 것만큼이나 세레스의 성기병은 연비가 나쁘다. 역시 생긴 대로 중갑옷을 껴입은 기사가 된 듯한 기분이다. 강력하지만, 오래 뛰어다닐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힘.
굳이 비교해보자면 카렌의 성기병은 같은 양의 마력으로 1시간을 싸울 수 있겠지만, 세레스의 성기병은 그 절반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이쯤되니 황당하기까지 하다. 도대체 타쿠야, 그 꼬맹이는 그동안 뭘로 싸우고 있던 건가.
아마 세레스는 타쿠야를 위해 자신이 보유한 한계 출력을 극한까지 낮춰놨을 것이다. 한계 출력을 낮추면 그만큼 연비가 좋아지니까 말이다.
대신 둔하게 생긴 몸인 겉 모습만큼이나, 전투에서도 둔하게 움직였겠지만….
그러면 그동안 어린애가 튼튼하지만 무거운 갑옷을 껴입은 채 싸우고 있던 꼴 아닌가.
그 우스운 꼴을 생각하며 웃고 있자니, 감이 좋은 건지 세레스가 때마침 뒤를 돌아보는 게 보였다.
“……”
“……”
그 순간 옅은 자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네토루는 미소를 숨기지 않고 그녀를 노려본 채 말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연비가 별로이기는 한데, 이 정도면 나름 합격인가.”
네토루는 이 이상 시간 끄는 것에 가치를 느낄 수가 없었다. 세레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네토루는 그녀의 몸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게 많았다.
“세레스. 언제까지 그렇게 애들 장난처럼 출력을 높일 거지? 일부러 마력 패스를 넘겨줬는데, 그러니까 너무 답답하잖아.”
“그게, 무슨…. 꺄앗!?”
남녀 간의 지루한 기 싸움은 이제 끝이다. 마력 패스의 주도권을 빼앗기자 세레스가 귀여운 비명을 흘렸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무려 왕가의 검이라 불리는 곳에서 훈련받은 몸이다.
몸 안에 구축된 마력 신경계의 성능도 무척이나 뛰어나고, 희귀한 종류의 것이겠지.
온갖 꼴깝을 떨며 그 자만심 넘치는 왕족과 귀족들이 꽁꽁 싸매고 있는 비술이 이 여자의 몸 안에 담겨 있었다.
그러면 세레스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출력을 높일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영역’ 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양산형들은 도달할 수 없는, 그 영역에 말이다.
왕가의 기사단에서 길러진 몸이니, 오히려 도달할 수 없으면 이상할 터.
그걸 시험하듯 주도권을 되찾은 네토루는 세레스와 연결된 마력 패스를 계속해서 확장한 채 끊임없이 마력을 밀어 넣었다.
“다, 당신…. 갑자기 이게 무슨…!”
그러자 탁류처럼 밀려들어 오는 거친 마력에 깜짝 놀란 세레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차마 마력 패스를 끊진 못했다. 그랬다가는 어떻게 될지 그녀도 잘 알고 있는 거겠지.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일단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녀의 마력 신경계가 네토루의 마력을 소화하는 속도보다도, 밀어 넣는 속도가 더 빨랐다.
“으으읏! 그, 그만! 꺄아악!”
참다 못해 끝내 괴로운 듯한 비명소리가 세레스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어여쁜 분홍빛 입술에 침 줄기가 흐르며, 등줄기에 흐르던 예쁜 머리카락이 난잡하게 흐트러졌다. 새하얀 얼굴은 점점 붉어지며, 고통을 인내하는 듯한 여성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본래 성기병의 출력을 높이는 것은 여자와 남녀 간의 호흡이 중요했다. 하지만 현재 두 사람 간의 관계에선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네토루는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쥔 채 출력을 높였다.
그나마 천천히 단계적으로 출력을 높이던 세레스와 다르게 네토루는 그러한 작은 배려조차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시험하던 세레스의 건방짐이 괘씸하던 것도 있지만, 내심 네토루 본인도 충동을 억누르지 못할 정도로 세레스의 몸의 굉장했다.
“으으읏! 윽! 흐읏!”
신음을 흘리면서도 세레스의 하복부 측의 자궁구 위에 구축된 마력 신경계는 네토루가 주는 그대로 흘림 없이 마력을 잡아먹고 있었다.
…역시 좋은 몸이다.
네토루가 예상했던 것 그 이상이다.
보통의 경우 여성 파일럿들은 이렇게 무작정 마력을 퍼 준다고 전부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마력을 소화하는 능력도 문제지만, 각 여성 파일럿들마다 마력 패스에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마력을 쑤셔 넣어도,
그것이 들어가는 통로가 비좁으면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세레스의 마력 패스는 확실하게 꾸역꾸역 네토루의 마력을 받아들이며 몸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만! 흐윽!”
다만 재미있는 것은 이것마저도 완전히 마력 패스의 통로가 풀린 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탓인지 수축되어 있다고 해야 할까.
이것은 일종의 증거였다. 393부대에 있으면서 그 어떤 남성 파일럿도 그녀의 마력 신경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확실한 증거. 그러니 마력 패스도 이렇게 비좁아지지.
그래도 상관없다. 비좁아졌다면 다시 넓혀주면 그만이니. 게다가 새로 확장하는 게 아니라, 옛길을 가다듬어줄 뿐이다.
하지만 너무 난폭하게 다루면 망가지고 만다. 적응할 시간을 줘야 한다. 그래서 잠시 세레스에게 여유를 줄 겸 네토루는 끊임없이 높이던 성기병의 출력을 멈춘 채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세레스.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에 있던 원래 네 파트너는 어떤 녀석이었지?”
“하아…. 하아….”
대답은 없다. 단지 숨만 허덕일 뿐.
어느새 세레스는 아예 조종석 위에 털썩 쓰러져 있었다. 허덕임 탓인지 콕피트의 내부 온도가 올라간 기분이었다. 새하얀 피부가 보기 좋을 정도로 불그스레 변해 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꽤나 파트너에게 예쁨 받았나 봐? 마력 패스가 이렇게 확장되어 있는 걸 보면.”
“…개소리 마요. 당신이 뭘 안다고.”
이번에는 대답을 하는 건가.
세레스는 조종석 위에서 숨을 몰아쉬며 주먹을 꽈득 쥐었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세운 검날처럼 예리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 자식은….”
“그 자식은?”
흥미롭군. 과연 어떤 녀석이었지.
그걸 묻기 위해 지그시 시선을 마주 보자,
돌연 날카롭던 눈매가 흐트러지며, 세레스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기껏 가다듬던 호흡도 다시 거칠어진다.
곧 그녀가 시선을 먼저 피하고는 울먹이며 말했다.
“…여기서 그만 해요. 제가 잘못했으니까요.”
“……”
뭐지 이건.
갑자기 사람이 확 바뀌자, 네토루는 당혹스러웠다.
여기서 갑자기 항복 선언이라고? 그리 말한 세레스는 어느새 기세 풀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심지어 눈가에는 눈물마저 흘렀다.
빛이 꺼진 듯한, 죽은 자색 눈동자도 그렇고,
앙다물고 있지만 희미하게 떨리고 입술도 그렇고,
무언가 좋지 않은 트라우마를 건드린 듯 세레스는 처연한 자태로 몸을 가늘게 떨고 있다.
그것은 흡사 두려움에 떨고 있는 화단 위의 방울꽃을 보는 듯했다.
덕분에 돌연 콕피트 안으로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고, 네토루는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
이런. 너무 건드렸나?
안 그래도 비좁은 부대, 여기서 세레스가 울먹이며 콕피트를 나가면 큰 문제가 된다.
그러면 이걸 어쩌란 말인가.
달래기라도 해야 하나?
순간 그런 고민이 들던 찰나였다.
─…두 사람 괜찮습니까?
리엔 사령관이 타이밍 나쁘게 말을 걸어왔다.
뭔가 싶어서 보니 어느새인가 데이터 링크로 정보가 전해지더니, 지도 위에 익숙한 붉은점들이 떠올라 있다.
…아무래도 버그들이 관측되었나 보다.
그때 고민하듯이 잠시 말이 없던 리엔이 말했다.
─…커플링 결과는 어떻습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우현민님 후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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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 모르겠지만 꽤나 파트너에게 예쁨 받았나 봐? 마력 패스가 이렇게 확장되어 있는 걸 보면.” -> 대사 수정했습니다.
반쯤 빈정거리는 느낌으로 쓴 대사인데, 지금 보니 의미가 잘 전달 되지않는 대사였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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