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 파트너 스와핑
콕피트가 닫히는 순간 밀폐된 비좁은 공간 속에 남는 것은 오로지 커플링을 하는 남녀 파일럿 두 사람뿐이다.
조금만 손을 뻗어도 서로의 신체가 닿는 거리.
당연하지만 그러한 공간 속에서는 서로 의식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체취를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카렌의 체취는 차분한 느낌의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면, 세레스의 체취는 상대방의 긴장감을 낮추는 듯한 따스하고 부드러운 향이 났다.
신기한 일이었다.
왠지 모르지만, 이 세계의 여자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체취를 지니고 있었다.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호르몬을 본능적으로 흘리고 있다고 해야 할까?
…확실히 카렌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카렌이 아닌 다른 여성과는 오랜만이다. 네토루는 다른 남성 파일럿들과 달리 다수의 여성과 커플링 하는 걸 사양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오히려 즐기는 편이었다.
설령 그것이 음흉한 암여우 같은 여자라고 해도 말이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이것 나름대로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 여자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문제인데.
“네토루, 요즘 카렌이랑 친하게 지내더군요.”
카렌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낸 채 조종석 위에서 자세를 잡던 세레스가 말했다. 보기 좋게 적당히 살집 있는 양 허벅지가 남성을 유혹하듯 실룩였다.
이윽고 조종석에 배를 맞추며 세레스가 커넥팅을 시작하자, 그녀의 몸선을 따라 마력이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네토루는 그녀의 뒷태를 느긋하게 구경하고는 대답하였다.
“커플링 파트너니까, 당연히 친해질 수밖에 없지.”
“…. 단순히 커플링 파트너라서 말입니까?”
“그렇지. 보통은 그렇잖아?”
앞을 바라보고 있기에 세레스의 얼굴은 볼 수가 없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쩐지 언짢은 듯한 분위기였다. 마치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아. 혹시 여기사 출신이라 그런가?
세레스가 비록 기사단 출신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흔히 아는 고귀하고, 명예스러운 기사를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것은 오로지 남성의 몫이었다.
기사들에게 여성 파일럿이란 도구였다. 자신들이 전장에서 활약하고,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살아있는 도구. 마치 기사들을 위해 숙련된 듯한, 인간이라는 형태의 암말.
그렇기에 기사의 커플링 파트너로 뽑힌 여성 파일럿은 어린 시절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는다. 철저하게 남성 파일럿의 명령을 받들라고 말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세뇌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래서 여기사들의 성향은 크게 두 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교육의 결과로 남성 파일럿에게 순종적이거나, 아니면 그 반작용으로 오히려 반항적으로 바뀌거나. 물론 당연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지극히 소수였다.
그러면 세레스는 여기서 어떤 경우에 속해 있을까?
길게 고민할 것도 없다. 당연히 후자에 속해 있는 여인이었다. 부드러움 속에 가시를 품고 있는, 여자라고 해야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세레스가 393부대에 배치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결국, 기사들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암말이 될 커플링 파트너가 얼마나 뛰어난가였으니까.
그러니 뭔지 모르지만 분명 기사단 내부에서 무언가 커다란 불화가 있었을 것이다..
‘기사단에서 퇴출당할 정도면…. 도대체 뭘 했을까.’
어지간한 일로 393부대 같은 곳에 버려질 정도로 세레스의 값어치는 결코 낮지 않다.
지금의 다른 부대원들처럼 뒤늦게 기관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파일럿들 보다는, 당연히 어린 시절부터 특수한 목적을 위해 철저한 교육을 받은 여성 파일럿이 더 나을 수밖에 없다.
여기사라는 건, 일종에 태생부터가 다른 암말인 것이다.
그러니 보통의 사령관이라면 탐이 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설령 무슨 ‘이유’가 있어서 기사단에 쫓겨났다고 해도 말이다.
혹시 커플링 파트너에게 큰 상처를 입히기라도 한 걸까. 기사의 계급은 엄연히 귀족이었다.
재능만 있다면 어릴 때부터 어디선가 데리고 와서 교육 시키는 ‘여기사’와는 그 위치와 뿌리부터가 다르다. 애초에 프랑기아 왕국의 귀족들은 유독 독한 면이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기사단에서 무언가 문제를 일으켜 쫓겨날 정도면, 세레스가 네토루를 싫어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네토루에게는 커플링 파트너와 좋지 않은 소문이 많았으니까 말이다.
자세히 보면 성질은 조금 다르지만, 파트너를 난폭하게 다뤘다는 그 성향만큼은 어찌 보면 기사들의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기사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있다면 자연스레 네토루에 대해서도 좋지 않은 감정이 생길 수밖에.
이윽고 커넥팅이 끝난 세레스가 가벼운 숨소리를 흘리는 게 들렸다. 그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네토루는 조용히 물었다.
“세레스. 어째서 393부대에 온 거지? 기사단에서 퇴출될 정도면 뭔가 크게 사고를 친 모양인데.”
“……”
세레스는 조종석에서 미동도, 소리도 없이 고개만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게 기묘한 침묵 속에서 네토루를 빤히 응시하던 세레스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제가 그걸 당신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는 것 같네요.”
그것은 명확히 선을 긋는 듯한 목소리였으나, 네토루는 개의치 않고 말을 계속했다.
“혹시 커플링 파트너를 죽이기라도 했나? 그래서 귀족들에게 미음을 받아 쫓겨난 건가?”
“…이제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두고 커플링에 집중하시죠. 이쪽은 준비가 끝났으니까요.”
퉁명스럽게 고개를 획 돌리며 노골적으로 대답을 피한다.
정말 이게 정답인 것인가?
네토루는 입매를 비틀며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세레스의 양 허리에 마법진이 떠올랐고, 조종석에 대기하고 있던 조정간들이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며 마법진에 접착이 되었다.
이제 이 조종간을 쥐면 커플링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아직 커플링을 할 생각이 없다. 좀 더 뒤흔들어 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이 순간이 아니면 물어볼 수 없는 이야기들.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와 세레스의 만남은 최악이었다. 정확히는 세레스의 ‘술수’에 말려들었다고 해야겠지.
그래도 덕분에 서로 낯을 가리는 소년, 소녀마냥 생각과 내면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네토루는 이번 기회에 숨기고 있던 음습한 사실 하나를 꺼내 보도록 해보았다.
“세레스. 어째서 그때 커플링을 거부했던 거지?”
“…하아. 제가 그때 분명 확실하게 말했을 텐데요.”
마치 끈질기게 구애를 하는 남성에게 혐오를 내뱉듯, 세레스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당신 같은 사람이랑 커플링 할 생각이 없다고요.”
“부대 전력에 큰 도움이 되는 데도?”
“…그거 참 오만한 말이군요. 제가 기존에 있는 파트너를 바꿔야 할 정도로 당신에게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글쎄, 내가 딱히 허언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하는데. 적어도 그 타쿠야라는 미숙한 꼬맹이보다는 너를 잘 다룰 자신은 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커플링 파트너로서는 내가 훨씬 나은 게 사실 아닌가.”
네토루는 조소 어린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쩌걱 하고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 걸 느꼈다. 다시 고개를 돌린 세레스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
너글너글한 눈매가 서슬 퍼렇게 변해 있었고, 선명한 자색 눈동자에는 적개심이 뚜렷하게 담겨 있었다.
곧 세레스는 살갗을 여미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쿠야는 저의 소중한 커플링 파트너입니다. 그러니 말 함부로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소중한 커플링 파트너라….”
어째서일까. 왠지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소중한 파트너이길래 커플링을 거부했던 걸까. 이렇게 되면 카렌만 너무 우스운 꼴이 된다.
만약 이게 평범한 경우라면 확실히 커플링 파트너를 바꾸는 건 쉬운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다면, 굳이 못 할 것도 없다.
그래서 괜히 네토루가 393부대에 왔을 때 제일 먼저 세레스를 눈여겨본 게 아니었다.
경험도 부족하고, 마력 신경계도 미숙한,
17살 어린 소년보다는.
온갖 전장을 겪어본 네토루가 훨씬 커플링 파트너로서 적합하다.
여기사를 다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기량을 갖춘 파일럿이 필요했고, 능력 없는 파일럿이 조정간을 쥐어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세레스는 커플링을 거부했었다.
그건 어째서인가?
생각을 거듭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었기에, 네토루는 숨김없이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말 똑바로 하는 게 어때, 세레스. 타쿠야라는 꼬맹이는 소중한 파트너가 아니라 다루기 편한 ‘어린’ 파일럿이겠지.”
“…당신. 지금, 뭐라고?”
얼음같이 차갑던 얼굴에 균열이 새겨진다. 아마 이렇게 본심을 꿰뚫린 말은 들어본 적 없겠지.
온화하고, 따스한 여인이었으니까.
적어도 부대원들에게는 말이다. 그러니 그 누구도 세레스를 의심하지 못했을 것이다,
“확실히 옛날처럼 기사들에게 조정간을 쥐여줬을 때 보다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만족스러웠을 거야. 17살 꼬맹이가 뭘 해보겠어.”
조소 어린 웃음이 사라졌다. 그 순간 네토루의 목소리에서 토해지는 것은 경멸에 가까웠다.
눈앞에 있는 건 겉모습만큼이나 상냥하고 온화하기만 한 여인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겁이 많다고 할 수 있고,
어떻게 보면 음흉하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떻게 보면 비겁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너는 카렌에게 나를 떠넘긴 건가? 그 편안함을 잃기 싫어서, 다시는 기사단에 있을 때처럼 너덜너덜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카렌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말해서 네토루에게 카렌은 차선책에 불과했다.
미성숙한 파일럿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나, 그러한 즐거움도 목숨을 건 전투 앞에서는 억누를 필요가 있다.
전투에서 네토루에게 필요한 것은 성숙한 여자다. 자신의 기량을 아낌없이 받아줄 수 있는, 그런 파트너 말이다.
네토루는 세레스의 조정간을 쥐었다.
그러자 침묵하던 세레스가 몸을 움찔 떠는 게 보였다. 등줄기를 가로지르는 미세한 떨림이 무척이나 애처롭다.
“솔직히 인정하는 게 어때. 너는 이기적인 여자야. 겉으로는 애들을 챙기는 척해도 안은 추악하기 짝이 없지.”
“……”
세레스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단지, 그 순간 네토루는 엄청난 압박을 느꼈다.
조정간을 쥐면서 서로 연결된 마력 패스를 통해 엄청난 양의 마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탐욕적으로 긁어가고 있는지 무의식적으로 몸에 바싹 힘이 들어갈 정도였다.
“……과연. 이 정도니 타쿠야가 못 버티지.”
세레스의 몸은 10대 꼬맹이들 위해 조교 된 게 아니었다. 철저히 극한까지 수련한 기사들의 기준에 맞추어 개발된 몸이다.
그러니 당연히 마력을 요구하는 양이 남다를 수밖에.
기본적인 출력이 높은 만큼이나, 요구하는 마력의 양도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다. 단순히 말해서 출력이 높은 만큼, 연비가 나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린 꼬맹이들의 조그마한 마력 용량으로는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윽고 입술을 달싹이던 세레스가 나직이 말했다.
“…첫날에 당신이 저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죠. 어느 기사단 출신이냐고 말입니다.”
“그랬었지.”
“그때는 일부러 대답을 피했지만, 지금은 특별히 말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 소속이었습니다.”
이건 조금 놀라운 이야기다.
세인트 미샤르 기사단.
비록 이제는 혁명기를 거치며 왕가가 거의 껍데기만 남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프랑기아 왕가의 검이라 불리는 왕국의 최고 전력이었다.
아마 눈을 떴을 때부터 세레스의 삶은 기사단에 속박되어 있었을 것이다. 다른 기사단도 아니고, 왕가 직속이었으니.
재능이 없다면, 거리낌 없이 버려지는 곳. 그리고 여기사는 모든 순결과 의식을 왕가를 위해 바쳐야 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쯤 되면 어떻게 이런 식으로 반항적인 성격을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런데도, 당신.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경고인가, 위협인가.
세레스의 물음에 네토루는 소리 없이 웃고는 조종간을 강하게 쥐었다. 마치 해볼 수 있으면 해보라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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