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29화 (29/148)

EP.29 파트너 스와핑

산 사람은 계속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죽은 부대원을 위한 이별식 다음 날에도 393부대는 변함없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빌어먹을. 확인해보니까 네토루의 말이 맞았어.”

그러하여 점심 무렵. 부대에 복귀한 정비반장 아스나가 심각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왔다.

관측탑을 수리할 겸, 아스나는 이른 아침부터 부대원들과 함께 네토루가 보고서에 올렸던 ‘땅굴’을 확인하러 갔다 오는 길이었다.

부대 안에서 성기병 정비를 담당하는 아스나지만, 그녀 역시 엄연히 마법사다. 그러니 그녀의 보고는 신뢰해도 좋았다.

“관측탑 밑에 있는 지하는 아무리 봐도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야. 커다란 무언가가 인위적으로 만든 땅굴이지.”

“…그러면.”

서서히 얼굴이 굳은 리엔이 미간을 좁혔다. 아스나는 그런 리엔의 시선을 피하며 혀를 찼다.

“뭔 소리긴. 지금 정체 모를 커다란 버그가 네 관측을 피해 땅밑에 숨어 있다는 소리지, 뭐.”

“……”

아스나의 확신 어린 대답에 리엔은 눈을 질끈 감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아니기를 바랬는데 현실은 이렇게 지독하다.

부대에 복귀한 네토루가 보고서를 올렸을 때 설마 싶었는데…. 역시 그의 말이 옳았던 건가.

지금 제39구역 안에는 ‘정체불명’의 버그가 있다. 그것도 저번 전투를 지하에서 그저 관망하기만, 커다란 괴물이.

한동안 입술을 곱씹으며 상념에 잠겨 있던 아스나가 말했다.

“리엔. 역시 그 녀석이겠지?”

“…아마 그렇겠지.”

“하…. 씨발. 47구역에 있었던 녀석이랑 똑같은 놈인지, 아니면 다른 개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린 좆됐네.”

아스나의 입 밖으로 특유의 험악한 어투가 숨김없이 흘러나왔다. 요즘 들어서는 좀 얌전해지나 싶었지만,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겠지.

그래도 이정도면 나름 나아진 편이다. 아스나가 393부대에 처음 왔을 때는 맨날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

뭔 이런 똥통 같은 곳이 있냐면서….

‘…설마 그 괴물이 우리 구역에도 있을 줄이야.’

그나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지하에 있는 버그가 무엇인지 아예 짐작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저번에 꺼림칙한 전황 보고서 하나가 날아오지 않았는가.

제47구역에서 관측됐던 초거대 버그.

통칭 「데스 웜」

전황 보고서에 따르면 마침 땅밑을 돌아다닌다고 하던가. 그러니 아스나가 커다란 지하 통로를 보고서, 그 괴물을 떠올리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 존재를 알고 있어도 정작 땅 위가 아니라면 관측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땅밑을 돌아다니는 걸 색적하는 건 불가능했다.

관측을 할 수 없기에 그야말로 치명적인 존재다. 언제 기습을 해도 대응을 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상대하던 버그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속성의 괴물이었다.

‘이래서 전술 마법탄을 아껴두라고 했던 건가….’

그날, 미끼를 자처했던 네토루는 전술 마법탄을 아껴두라고 했다. 아마 지금 같은 사태를 예상하고 있던 거겠지. 현명한 선택이었다.

“…리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아스나가 낮게 깔린 목소리를 내며 리엔의 책상을 두들겼다. 리엔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귀족 놈들이 제47구역에서 철수한 이유가 전부 이 녀석 때문이잖아. ”

“그렇지….”

“막말로 녀석이 부대를 공격하면 우리가 어떻게 막아? 안 그래도 이번 전투 때문에 부대 전력에 커다란 공백이 생겼잖아. 당장 오늘 병원에 수송되는 애들만 해도 6명이야.”

“……”

전력 공백…. 관측할 수 없는 미지의 괴물.

설령 부대가 온전하다고 해도 아스나의 말대로 데스 웜이 어느 날 갑자기 기지를 습격하면 막을 수가 없다.

아마 별 저항도 못하고 무력하게 당하겠지. 제47구역에서 성기병 부대들이 철수한 건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관측할 수 없는 버그의 기습은 그 어떤 공격보다도 치명적이다. 인간은 성기병을 타지 못하면 무력하다. 그러니 성기병을 타기 전에 공격하면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아.’

리엔은 이마를 부여잡았다. 아버지가 이런 심정이었을까. 마치 세상이 자신을 버린 것처럼 모든 것이 최악이다. 그 누구도 손길을 내밀어주지 않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갇힌 느낌.

초거대 버그…. 보름 전쯤이었던가.

전황 보고서로 알게 되었을 때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인지라 크게 가슴에 와닿지는 않았다. 게다가 구역도 멀었고.

그런데 그걸 현실로 직면하게 되니.

리엔은 그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좌절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전력 공백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부상자도 문제지만, 역시 제일 큰 문제는 파트너의 부상으로 커플링이 깨진 파일럿들이 다수 생겨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번에 병원으로 수송되는 6명만 해도 제각각 다른 커플링을 하고 있던 파일럿들이었다.

덕분에 총 여섯 쌍의 팀이 각자 커플링 파트너를 잃어버린 상태였기에, 사실상 성기병 6기가 전투 불능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이걸 먼저 해결해야 한다. 애써 표정을 추스르던 리엔은 마음을 바로 잡으며 부대원 소집을 준비했다. 데스 웜이든 뭐든, 일단 냉정하게 부대를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2.

이른 아침부터 출격했던 부대원들이 복귀하는 걸 보았다. 아마 보고서에 올렸던 관측탑 아래의 지하 공간을 확인하러 갔다 온 거겠지.

혹시 무언가 알아낸 게 있는 걸까.

꽤나 신경쓰이는 지하 공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가서 조사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지만,

오버히트도 그렇고, 강제로 활성화된 마력 신경계의 후유증으로 카렌은 당분간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아무리 네토루가 회복을 돕는다고 해도, 며칠 간은 푹 쉬어주어야 한다. 오히려 겨우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나름 위기 상황인가.’

부대 상황을 생각하니 왠지 웃음만 나온다.

현재 부대 안에 대기 중인 건 카렌과 네토루 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전투로 크고작은 부상을 입은 파일럿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즉, 부대 안에는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도 부상으로 인한 전투 손실이 만연한 상태라는 것이다.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싸움이다. 총탄까지는 괜찮을지 모르겠으나, 혹시라도 포탄이 성기병의 몸체 일부에 꽂히는 순간 그 안에 있는 파일럿에게도 큰 충격이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시간에 걸친 격렬한 전투도 심각한 문제였다. 대충 계산해봐도 이번 전투에서 393부대원들은 버그들과 사실상 하루종일 계속 싸운 거나 다름없었다.

관측탑의 상태를 확인하러 갔을 때 몰려온 버그들과 한번,

야간에 몰려온 버그들과 한 번,

그리고 아침이 되었을 때 카렌과 네토루가 참여했던 전투에서 한 번.

안 그래도 최근 들어 매일 같이 전투가 있었다. 그러한 장기간에 걸친 피로 누적 속에서 이번 전투는 부대원들에게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사실 현재 카렌이 겪고 있는 오버 히트처럼 단시간의 과도한 출력으로 인한 반작용보다는, 계속된 성기병 기동으로 인한 마력 신경계의 손상이 제일 무서운 부상이었다.

실제로 이번 전투에서 남녀 따질 것 없이 마력 신경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파일럿들이 있는 탓일까. 점심 무렵쯤 되자 부대 안으로 부상자를 수송하기 위한 탑승 차량이 왔다.

마력 신경계 손상은 쉽게 회복되지 않으니, 차라리 도시 안에 있는 병원에서 요양시키는 것이 낫다…. 라는 게 리엔의 판단인 거겠지.

만약 네토루가 없었다면 카렌 역시 저들 사이에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부대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수송되는 이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이걸로 또 6명이 빠지는 건가.”

네토루의 옆에 있던 카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카렌은 문득 무언가 깨달은 듯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며 네토루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얽혀 있는 감정들은 솔직했다. 그 덕분에 네토루는 카렌이 뭘 말하려고 하는 건지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네토루,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카렌, 그게 될 것 같아?”

“으응? 나, 아직 말하지도 않았는데?

“네가 할 말이야 뻔하지. 지금 너한테 하고 있는 ‘치료’를 다른 부대원들에게도 할 수 없냐고 물어보려던 거 아니었어?”

날카롭게 생각을 꿰뚫어 본 네토루의 말에 카렌은 움찔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윽…. 맞아…. 혹시 안 되는 거야?”

눈치를 살피는 카렌의 행동거지에 네토루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정말 ‘치료’라고 생각하기로 했나 보다. 그렇지 않으면 태평하게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군.

“카렌. 일단 불가능하다고 말해둘게.”

“…정말 안 되는 거야? 그냥, 서로 입만 맞추는 거잖아. 그게 어려워?”

비꼬는 말투는 아니다. 순수하게 의문 어린 카렌의 물음에 네토루는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 아가씨는 ‘치료’를 상당히 단순히 보고 있는 듯했다.

“정말 단순하게 입만 맞추는 거라고 생각해?”

“자, 잠시만…!?”

네토루는 카렌을 허리를 끌어당겼다. 저항은 없다. 어느새인가 지금 같은 행동에 익숙해진 것처럼 자연스레 안겨 왔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부대원이 신경 쓰이는 건지 카렌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 몸을 밀쳐냈다.

“야, 미, 미쳤어? 여기서 뭘 하려고!”

“걱정 마. 아무도 못 봤으니까.”

“또 그렇게 뻔뻔한 소리를…!”

아무래도 다른 부대원 앞에서 치료를 하는 건 아직 부담스러운 듯하다. 얼굴을 붉히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는 카렌을 보며 네토루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너는 잘 모르겠지만 사람의 마력 신경계에 간섭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야. 꽤나 피곤한 일이지.”

“…그러니까 너도 한계가 있다는 소리야?”

“그런 거지.”

“……”

카렌은 네토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뭔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진실을 말하는 건지 판별하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끝내 성과가 없던 건지 카렌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부상 입은 파일럿들이 수송되면서 부대 내부가 더욱 썰렁해지는 느낌이 들던 그때.

리엔은 부대원들을 소집했다.

이번 전투로 잠시 동안 파트너를 잃은 남녀 파일럿들의 짝을 맞추기 위해,

파트너 스와핑을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이쪽 세계의 스와핑은 '건전' 합니다.

아, 그리고 조금 늦었는데.

기브릴님, 잠자는곰군님, 파페포포님, 안별님, 커피@@님, darkep 님! 후원 감사합니다.

일러 제작을 위한 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어서 좋군요.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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