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 죽은 이의 밤
1.
종족을 가리지 않고,
이 세상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존재했다.
악마, 신, 마왕, 마녀, 드래곤.
지금껏 수많은 존재들이 대륙을 위협했고 그에 맞서 싸운 용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구전들은 대륙 곳곳에 존재하는 수많은 왕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신화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프랑기아 왕국은 역사와 전통이 깊은 국가였다. 실제로 대륙 전역에 걸쳐 전승되고 있는 오래된 신화와 전설에도 종종 그 이름이 나오기도 하는데,
덕분에 프랑기아 백성이라면 어린 시절에 한 번쯤 들어볼 법한 이야기가 있었다.
~샤를기우스의 전설~
내용은 정의롭고 멋스러운 용사가 동료들과 함께 마왕을 무찌른다는 흔하기 흔한 동화였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강림했던 제1 마왕을 무찌르고, 대륙의 평화를 가져온 용사는 끝내 프랑기아 왕국을 건국하며 초대 국왕이 되었다.
즉, 샤를기우스의 전설은 프랑기아 왕국의 뿌리인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프랑기아 백성은 건국왕 샤를기우스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비록 이제는 2000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인지라 어느 것이 진짜이고, 허구인지 구별이 안 되지만.
“…내가 무슨 어린 애도 아니고.”
이제 와서 왜 이런 걸 읽고 있던 걸까.
혹시 이런 신화적인 영웅이 다시 나와주기를 바라는 걸까?
아니, 설령 샤를기우스가 되살아난다고 해도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해결할 수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동화 속 마왕보다는 총과 포탄을 쏘아내는 버그들이 더욱 위협적이고 두려운 존재들이었다. 마왕이라도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포탄을 쏘아낼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에휴.”
몸의 요양을 위해 침대에 누워 동화책을 읽던 카렌은 작은 한숨과 함께 책을 덮었다. 어쩌다가 발견한 탓에 시간이나 죽일 겸 펼쳐봤지만, 역시 별로 재미있지는 않다.
아침부터 격렬했던 전투를 치른 오늘 저녁에는 곧바로 죽은 부대원들의 장례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니 뭘 하든 울적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괜스레 죽은 부대원들의 얼굴이 떠올라 한숨이 나오던 그때였다.
“……읏!?”
카렌은 허리를 구부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갑자기 하복부에 위치한 마력 신경계가 비명을 지르며,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이유는 뻔했다.
오버히트로 인한 열병 증세였다.
─전투가 끝나면 곧바로 어제보다 심각한 오버히트가 찾아올 거야. 그래도 할 생각이야?
네토루, 그 녀석이 경고할 때 예상은 했지만….
“……으으.”
마력 신경계가 자궁 쪽에 위치한 탓일까. 마치 그날이라도 온 것처럼 콕콕 찌르는 아픔이 너무나도 괴롭다. 몸을 구부리며 신음을 흘리던 카렌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역시 가봐야 하나.”
등줄기가 벌써부터 식은땀으로 축축하다. 머리에 열이 오르는 탓인지 지끈거리는 두통도 동반되고 있었다.
내심 한 번으로 치료되기를 바랬건만….
역시 참지 말고 치료를 더 받아야겠지?
이쯤 되니 뭔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구렁텅이 빠진 느낌이다. 하지만 부대 상황을 생각하면 망설일 여유도 없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슴 한쪽을 기어오르는 묵직한 죄책감 때문에 왠지 더 우울해진다.
어쩌다가 이렇게 녀석을 애타게 찾는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불을 쥐며 신음을 흘리던 카렌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침대에서 나왔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치료을 위한 거니까.
어떻게든 오늘 저녁에 있는 부대원들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서라도 증세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2.
언제나 늘 그렇듯이. 리엔 프러스트의 하루는 짙은 한숨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393부대에 부임하고서 제대로 쉬어본 적이 얼마나 있을까. 적어도 마음 편하게 지낸 적은 거의 없을 터이다. 언제 올지 모를 버그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전쟁과도 같다.
그렇지만…. 오늘만큼 심란한 적은 없겠지.
부대원들이 4명이나 죽었다. 그건 분명 슬픈 일이다. 지금쯤이면 부대원들이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겠지. 장례식이 오늘 저녁이던가.
하지만 진짜 문제는 죽은 이를 위한 이별식이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버그들의 공세였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지 않으면, 더 많은 부대원들이 죽을 터.
이별식 준비는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러니 사람 좋게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고, 준비해야 했다. 그것이 사령관이다.
─올라온 보고서는 잘 읽었네. 리엔 사령관.
상급 부대 회의.
스크린 안에 각 구역을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들의 얼굴들이 빈틈없이 떠올라 있는 가운데,
리엔은 우울했던 감정을 지우고 차가운 표정을 굳혔다. 여기서는 얕보여서는 안 된다. 유능한 장교인 것처럼, 냉철한 모습을 연기할 필요가 있었다.
─엘프란디아의 방어선이 무너진 것 같다라….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확실한 이야기인 건가?
제36구역부터, 제39구역을 총괄하는 상급 사령관의 물음에 리엔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합니다. 사령관님도 제가 올린 보고서를 읽으셨으니 아시겠지만, 이런 식으로 갑자기 침공해오는 버그들의 숫자가 늘어나려면 엘프들 쪽에서 문제가 생겼다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흠…. 결국 엘프 놈들이 먼저 무너진 건가.
생각지 못한 소식을 들은 것처럼 상급 사령관이 표정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다른 사령관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땅만큼은 어떻게든 목숨 바쳐 지키던 놈들이 설마 무너질 줄이야…. 녀석들의 상황도 그렇게 안 좋은 건가?
─아무래도 엘프란디아 쪽의 협력은 기대하기 어렵겠습니다.
─그러면 이젠 우리는 누구랑 동맹을 맺어야 하는 겁니까?
─연합 왕국들이라던가….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게. 지금 바다 건너 있는 놈들이 우리를 도와줄 것 같나? 아니, 어쩌면 녀석들도 심각한 상황일지도 모르겠군.
프랑기아는 역사적으로 주변 나라와 사이가 좋았던 적이 많이 없었다. 애초에 종족을 떠나 국경을 인접한 국가끼리 사이가 좋을 리가 없다.
─…그래도 일단 엘프놈들의 상황을 직접 확인은 해봐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말인가?
─…그건.
비록 엘프들의 성향이 폐쇄적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엘프란디아는 국경을 마주하는 국가다. 그렇다 보니 국가 관계로서 대화가 아예 없던 건 아니다. 적어도 버그들이 나타나기 전까진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버그들 때문에 아예 연락이 끊겨버렸다.
마법 도구로 통신을 시도해봐도 거리가 안 된다. 예전에 국가끼리 맺은 협약으로 국가 사이에 중계기를 설치한 적이 있지만, 버그들에게 점령된 탓에 그마저도 이용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덕분에 현재에 이르서선 몇 년간 가끔씩 국경 인근의 전선에서 각 왕국의 부대끼리 접촉한 기록만이 있을 뿐.
아무튼, 엘프란디아의 상황은 그렇다 쳐도.
리엔은 이번 회의에서 반드시 얻어야 할 게 있었다.
엘프들이 무너진 건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그렇다고 제39구역까지 무너지게 놔둬서는 안 된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리엔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사령관님. 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으시다면, 부디 제 요청을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3.
엘프란디아의 국경에서 넘어온 버그들과의 전투가 끝난 지 이제 겨우 반나절이 지났을 때였다. 부대 안의 분위기는 여전히 무거운 느낌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럴 수밖에.
아무리 멍청해도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모를 수가 없다. 갑자기 침공해오는 버그들의 숫자가 확 늘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부대원들도 죽었다. 부대 안의 성기병 파일럿 숫자가 40여 명 정도밖에 안 되는 걸 생각해볼 때, 이번 전투에서 4명이 죽은 건 엄청난 피해였다. 그리고 당분간 전투에 참가할 수 없는 부상자들도 몇몇 생겨난 상태였다.
그러한 부대 상황 속에서 네토루는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장례식인가.”
도착한 그곳에는 전투에서 살아남은 부대원들이 죽은 부대원들의 물건을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있을 장례식의 준비였다. 아마 죽은 부대원의 방에 있던 걸 전부 가져온 거겠지.
성기병 파일럿은 소모율이 높았고, 대체로 장례식은 부대 안에서 자체적으로 간소하게 치르는 편이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물건도 그날 같이 함께 태워 보내는 것이 대부분의 부대 전통이었다.
네토루는 적당한 거리에서 장례식 준비를 지켜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에게 슬프거나 우울한 감정은 없다. 나름 그동안 부대원들과 친해졌다고 하지만,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사실 이번에 죽은 부대원들과 딱히 그럴듯한 친분이 있던 건 아니었다.
카렌 덕분에 말문이 트긴 했지만, 굳이 40여명 전부와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뭐라고 해야 할까….
네토루는 전장에서 죽는 이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멋 모르던 시절에 슬퍼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전부 다 태워버린 심지처럼 사람의 죽음에 무감각해진 상태였다.
단지 죽은 이의 이름만 머릿속에 새겨넣을 뿐.
여기서 사람 하나하나의 죽음에 매번 슬퍼했다가는 눈물이 메마를 날이 없을 것이다.
“어? 네토루 형 왔어요?”
조용히 장례식을 준비하는 부대원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페르아와 쿄쿄를 비롯해 5소대 애들이 품에 한가득 짐을 안고서 다가왔다.
뭔가 싶어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전사자의 물품 정리를 도와주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다들 죽은 부대원의 짐을 정리하다가 울기라도 했던 건지 소년, 소녀 가릴 것 없이 하나 같이 전부 눈가가 붉었다. 아직 부대원의 죽음이 익숙지 않은 거겠지. 뭐, 어찌 보면 당연한가.
네토루는 붉게 변해 있는 페르아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왠지 모르지만 무심코 묻고 말았다.
“페르아. 죽은 부대원들이랑 많이 친했나 보네.”
“네. 뭐….”
네토루의 물음에 페르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죽은 부대원들 중에 한 명이 저랑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옆집 형이었으니까요.”
“……”
그런가. 네토루는 뒤늦게 괜히 물었다 싶어졌다. 배려 없는 무신경한 말이었다.
입매는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눈은 당장 울것처럼 흔들리는 꼬맹이를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게다가 페르아 뒤에 있는 다른 꼬맹이들도 뭐가 문제인지 덩달아 표정이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이번에 죽은 부대원은 5소대랑 전부 친하게 지내고 있었나 보다.
덕분에 짤막한 침묵이 흐르고,
“아…. 저희는 해야 할 게 있어서, 이만 가볼 게요!”
뒤늦게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페르아가 애써 씩씩하게 말하더니 소대원들을 이끌고 멀어졌다.
네토루는 그 뒷모습들을 지그시 지켜보다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왠지 이제야 전선에 배치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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