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관측탑
1.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지금도 버그들이 오고 있을 터.
그러한 초조함 속에서 네토루는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혈액을 느꼈다. 몸 안을 이루던 것이 서서히 흘러나오는 감각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빌어먹을. 시야가 흐릿하다. 아무래도 피를 조금 많이 흘린 듯하다. 떨어질 때 돌무더기들이 뒤통수를 갈긴 것이 역시 문제였나.
그래도 이 정도면 나름 참을만하다. 지난 수년간 열심히 단련한 육신은 평범한 범인의 수준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이걸로는 죽지 않는다.
아니, 죽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되새기며 네토루는 카렌을 응시했다.
그 황량한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 녀석은 갑자기 왜 울고 있는 거야?’
카렌의 눈가는 붉게 변해 있었다.
안 그래도 흙무더기에 묻힌 탓에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이 뚜렷하게 보였다. 기껏 가슴 좀 만져졌다고 저러는 건 아닐 터. 아니면 지금 상황이 무서운가?
“카렌, 괜찮냐?”
“……”
카렌은 말이 없었다. 단지 당혹스러운 듯 입술만 곱씹으며 네토루를 응시하고 있을 뿐.
언뜻 보면 무뚝뚝해 보일 법한 눈이었지만, 그 순간 네토루는 카렌의 검은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걸 보았다.
저 표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본 듯한 눈빛,
그리고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놀라움과 어딘가 애잔한 듯한 아련함이 절묘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단연컨대 짤막하게 표현할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왜 저런 표정을 하는 건지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일단 무사하니 됐나?’
이 녀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카렌은 무사해 보인다.
게다가 무엇보다 최악의 상황도 아니었다.
─네토루 형! 카렌 누나!
─가, 갑자기 땅이 왜!? 이거, 어떻게 해!?
─시끄러워, 일단 빨리 흙이나 치워!
시끄러운 소리는 여전하구만. 하지만 지금 순간만큼은 반갑기 그지없다.
흙무더기 위쪽에서 들려오는 소대원들의 소리에 네토루는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이러나저러나 이대로 죽을 운명은 아닌듯하다.
갑자기 땅밑이 꺼질 때는 네토루도 목숨의 위험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왜 땅밑에 지하가 있는 거지?’
소대원들이 성기병으로 흙무더기를 치워내는 소리를 들으며 네토루는 지금 상황에 대해서 차분하게 생각해보았다.
갑자기 땅이 무너졌다?
그것은 즉, 땅밑에 그만큼의 빈 공간이 있었다는 소리다. 그러면 이 공간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충 생각해보면 답은 이러했다.
커다란 무언가가 땅밑에 통로를 팠다.
그러면 땅밑에 통로를 판 녀석은 무엇인가?
그 답이야 뻔한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 정체 모를 기괴한 짓을 할 존재는 버그밖에 없다.
다만 문제는 이런 유형은 처음 본다는 것이겠지.
‘위험한걸.’
네토루는 입가를 비틀었다. 언제부터 생긴 습관인지 모르겠으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정말로 위험하다고 생각될 때면 웃음이 나오고는 했다.
그러던 그때였다.
“……너.”
별안간 네토루는 볼 옆을 매만지는 온기를 느꼈다.
순간 놀라서 멈칫했지만, 카렌의 손이었다.
현재 그녀는 겁에 질린 것처럼 희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네토루의 턱선을 따라 흐르던 핏물을 천천히 닦아내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그렇지만 피가….
당황하는 카렌을 보며 네토루는 무심코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좋은 의미로 이것은 순수한 웃음이기도 했다.
나이도 어린 게 평소에는 그렇게 당돌하게 굴더니, 지금은 괜스레 제법 고등학생 소녀같은 표정을 짓는 게 그저 귀엽게 느껴졌다.
“조금 피가 흐를 뿐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정말 괜찮은 거야…? 맨날 너는 걱정 말라고 말하잖아.”
감정이 조율되지 않아 너울거리는 듯한 목소리다.
평소에 틱틱 거리던 걸 생각하면 썩 나쁘진 않은 모습이었다. 기껏 몸을 던져 구해준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하나.
사실은 순수한 의미로 지켜준 건 아니었는데.
버그들이 바로 코앞에 있는데 커플링 파트너인 카렌이 죽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동시에 비열한 사심도 몇 가지 존재했다.
한번 눈독 들인 몸이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죽게 내버려 두기에는 아깝다.
“네토루…. 고마워.”
잠시 침묵하던 카렌이 나지막이 말했다. 평소와 달리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힘없는 목소리로.
지켜보는 입장에선 썩 나쁘지 않은 태도지만, 왠지 평소의 앙칼진 느낌이 없어서 어딘가 재미가 없다.
그래서인지 조금 심술궂은 감정들이 슬금슬금 떠올랐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냐는 듯이.
“카렌. 뭐가 고마운데?”
“그, 그야….”
순간 카렌이 만들어낸 빛 덩어리가 약해진 건 착각일까. 뭘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고심하듯 입을 오물거리던 카렌이 끝내 시선을 피했다.
꼼지락꼼지락…. 행동 하나하나가 위에 있는 병아리들만큼이나 어리숙해 보인다.
하지만 네토루는 그런 카렌을 지그시 응시했다. 끝내 그 시선에 질질 끌려가듯 카렌이 솔직히 말했다.
“구해줘서 고맙다고…. 땅바닥이 무너질 때 네가 나를 감싸줬잖아. 덕분에 살았어.”
그래,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게 하나 있다.
아니, 정확히는 궁금한 거라고 해야 하나.
“카렌. 한 가지 물어봐도 되냐.”
“…뭘?”
“왜 너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반말이냐.”
“……뭐?”
“심지어 저번에 보니까 챈들러한테는 존댓말을 꼬박꼬박 잘 사용하던데. 도대체 이유가 뭐야?”
“……”
카렌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어딘가 어처구니없는 듯하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눈동자를 떼구르르 굴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잠시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그러면 이제라도 오빠라고 불러…. 줄까요?”
정말이지 너무 어색하군.
뭐, 어차피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커플링 파트너끼리는 나이 따지지 않고 말을 편하게 하는 게 암묵적인 룰이었으니까.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수평적인 관계를 위해서였다. 관계라는 것은 사소할지 몰라도 서로를 부르는 호칭에서부터 시작되길 마련이니까.
네토루는 피식 웃었다.
“아니, 됐어. 그냥 농담이었으니까. 너는 그냥 평소처럼 반말하는 게 좋겠다. 안 어울려.”
“뭐? 정말! 이런 상황에서 무슨….”
카렌의 표정이 이번에는 아연해졌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본 것처럼 혼란스럽다고 해야 하나.
그러던 중 때마침 슈트의 목덜미에 새겨진 문양이 빛나더니 사령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 사람 모두 괜찮은 겁니까!?
꼬맹이들한테 상황을 들은 걸까. 아쉽게도 아직은 무사하다고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다급한 사령관의 목소리와 달리 네토루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예.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버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다가왔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예상 접촉 시간은 1분입니다.
“…1분이라.”
도망칠 시간이 없군.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쿠우우우웅!
등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며 빛이 찾아왔다.
열기를 띤 햇볕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텁텁했던 공기가 너무나도 그리웠다.
─발견했다! 다, 다행이야! 두 사람 모두 살아 있어!
─빨리 꺼내! 일단, 여기서 도망쳐야…!
─으아악! 버그들이 오고 있어!
역시 시끄럽단 말이지. 자기들끼리 도망치지 않고 구해준 건 고맙지만, 여전히 행동들이 어리숙하기 짝이 없다. 하기야, 애들한테 뭘 바랄까.
네토루는 카렌을 덮치고 있던 몸을 서서히 일으키고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응.”
카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잡았다.
2.
단언컨대 상황은 최악이었다.
흙을 털 여유조차 없이 성기병에 올라타기 무섭게 들판 위로 밀려 들어오는 버그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숫자는 오늘 치렀던 전투를 비웃듯 배는 많았다. 이미 인근의 들판에는 녀석들이 장악한 상태였다. 사실상 포위당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
그래도 다행히 언덕 덕분에 아직 이쪽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녀석들한테 발각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진심인가 본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번 임무를 가벼운 소풍이었다는 생각을 집어치운다. 네토루는 어느새 커넥팅을 끝낸 카렌의 조정간을 쥐고는 생각했다.
그냥 이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까?
사실 네토루는 이대로 도망치면 살 수는 있다. 비록 포위되었다고 하지만, 포위망은 얕았다. 돌파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5소대가 전멸한다.
네토루는 버그들을 따돌릴 자신이 있지만, 5소대 애들한테 그런 기동력이 존재하지 않을 터.
그러면 여기서 5소대 애들을 데리고 싸운다?
그건 더욱 미친 짓이다.
아마 몇 분도 안 되어 전멸할 것이다. 정확히는 네토루와 카렌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1년 차도 안된 놈들한테 크게 기대조차 안 된다.
도망치는 것도, 싸우는 것도 할 수 없다.
정말이지…. 모두 짐 덩어리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버리고 가기에는 찝찝하다.
바로 코앞에 버그들이 다가오고 있는데 도망치지 않고 흙무더기를 파헤치던 녀석들 아닌가.
그러니 이대로 그냥 버려두고 죽게 놔두면 분명 꿈자리가 사납겠지.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할까.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조종석에 뚝뚝 소리를 새기며 붉게 흔적을 남기고 있는 가운데,
흔들림 없는 냉철한 이성 속에서.
네토루는 카렌에게 물었다.
“카렌. 성인도 안된 애들을 여기서 그냥 죽게 내버려두는 건 역시 아니겠지?”
빌어먹게도 아직 네토루는 현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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