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8화 (18/148)

EP.18 관측탑

1.

이제는 어느새 흐릿해진 기억들이다.

정확히는 잊으려고 애썼던 기억이라고 해야겠지.

어린 시절,

기관에서의 생활은 괴롭고 힘들었다.

그럴 수밖에. 교관들은 다급했다.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더 빨리 파일럿으로 만들어 전장으로 내보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폭언과 폭력이 매일 같이 이어졌다.

나름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던 카렌에게 기관에서의 삶은 버티기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다.

입소한 이후부터는 죽은 부모님의 사진을 항상 손에 쥐며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올 때마다 차라리 이럴 거면 그날 버그들에게 부모님과 같이 죽는 게 낫지 않았나 싶었다.

그렇지만 사람은 익숙해지길 마련이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나츠오를 비롯해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겼고,

처음에는 교관들에게 울고, 빌며, 두려워했지만 점점 그러한 일도 사라졌다.

어느새인가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지고만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애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교관들 역시 사실 우리처럼 두려워하고 있는 어른에 불과하다는 걸.

세상 무서울 게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들은 누가보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기관 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말이다.

그래서 그걸 깨달았을 때, 눈치 빠른 애들 사이에서는 온갖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왕국이 버그들에게 멸망할 것이다,

기관에서 나가면 며칠도 못 버티고 죽을 것이다,

이 싸움에 승산은 없다…….

그러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은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기관에서 퇴소를 앞둔 선배들도 공포에 떨었다. 우수한 성적을 자랑하던 아이 역시 그러했다.

그렇게 점차 시간이 지나며 기관에서 퇴소를 앞두게 되었을 때. 카렌과 나츠오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그날 밤은 잠을 자지 못했다.

두 사람은 밤새 서로의 손을 잡고 속삭였다.

먼저 퇴소했던 다른 아이들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까, 살았을까. 과연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과연 우리가 갈 부대는 어떤 곳일까.

사령관은 어떤 사람일까. 선임들은 어떤 사람일까.

분명 좋은 사람들일 거야. 괜찮을 거야.

이윽고 두려운 밤이 끝나고,

두 사람은 제39구역의 393부대에 배치되었다.

당연하지만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떻게든 선임들 앞에서 흠 잡히지 않도록 나츠오와 함께 다짐했다.

처음에 부대원들에게 잘못 찍히면 부대 생활이 힘들 거라는 교관의 진심 어린 조언 때문이었다.

비록 악마 같은 사람들이었지만, 퇴소 날에는 미안하다면서 떠나보내던 이들이었다.

솔직히 우스운 일이었다.

마지막에 사과 한 번 하는 걸로 자기들의 죄책감을 덜어내려던 게 뻔히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냥 받아들였다. 이제 중요한 건 교관들이 어떠했다는 과거보단 눈앞의 현실이었으니.

그리고 내심 알고 있다. 자신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미워할 성격이 되지 못한다는 걸. 어쩌면 쓸데없이 사람 좋던 나츠오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도착한 393부대의 첫인상은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마치 급하게 급조한 것처럼 부대 시설은 엉성했고, 낡았으니까. 차라리 기관의 훈련 시설이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부대의 겉모습과 달리 393부대의 사람들은 썩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393부대에 배치되었던 첫날.

“좋아, 좋아! 모두 얼굴 활짝 피라고! 오랜만에 귀여운 신입들이 들어왔잖아!”

찰칵─!

나츠오와 함께 오늘 처음 만난 동기들과 엉성하게 서 있자니, 부대 내의 최고령이자, 최고참이었던 사내는 신병들이 오자마자 곧바로 단체 사진부터 찍었다.

서로 이름도 알기도 채 전에 갑자기 웬 사진인가 싶었는데, 오래된 부대 전통이라던가.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일이었지만, 카메라를 들었던 사내의 이름은 카미죠.

393부대의 에이스 파일럿이었다.

아니, 사실은 딱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이 이 부대의 중심이라는 걸.

어쨌든 카렌에게는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교관들과 달리 느슨한 웃음과 편안한 분위기는 기관에서 꿈꾸던 이상적인 어른에 가까웠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딘가 믿음이 간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 그는 인기가 좋았다. 모든 부대원이 그를 좋아했다. 다들 한 번쯤은 이곳에서 그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다들 귀찮다고 투덜거리면서도 그가 말하는 일은 잘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첫날에 찍은 부대원의 단체 사진은 부대 안의 식당에 장식되었다.

식당 벽면을 따라 길게 이어진 수많은 사진들.

그걸 구경하며 걷고 있자니 모르는 얼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카렌은 온화한 분위기를 띤 사진 속 부대원들을 보며 무심코 긴장을 풀고 웃고 말았다.

그래, 이런 부대면 나쁘지 않다. 괜찮을 거다.

생각지 못한 행운을 만난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카렌이 나츠오와 함께 부대 생활에 차츰 익숙해졌을 때였다.

2.

그날도 분명 평소와 같이 소대원들과 임무를 수행 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콰아아앙─!

폭음과 총탄 소리가 비명 치듯 들려온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포격에 주변의 흙바닥이 분수처럼 치솟았다.

─후퇴! 후퇴해! 전부 거기서 빨리 나오라고! 에잇, 무능한 놈들 같으니! 카미죠, 뭐 하는 거냐! 너라도 빨리 나와라! 설마 거기서 죽을 생각이냐!?

사방에서 들려오는 굉음 속에서 정신을 차리니, 사령관이 다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카렌은 여전히 흐릿한 의식 속에서 생각했다.

왜 내가 이렇게 기절해 있던 거지?

피를 흘린 탓인지 머리 회전이 안 되고 있다.

게다가 온몸이 욱신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아팠다.

하지만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렸다.

…아. 맞아. 방금 스파이더의 포탄을 맞았지.

그 사실을 깨달은 카렌은 다급하게 눈을 뜨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투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정작 카렌의 성기병은 전투 불능의 상태였다. 몸체의 옆구리가 반쯤 날아간 것이다.

덕분에 성기병의 팔 한쪽이 붉은 핏물과 함께 바닥에 너부러져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팔 한쪽 찢긴 걸로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만약 조금만 더 오른쪽으로 맞았다면 콕피트 째로 폭사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마지막에 나츠오가 어떻게든 몸을 비트는 데 성공한 듯하다.

거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나츠오?”

순간 화들짝 놀란 카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 안심하였다. 그녀의 커플링 파트너인 나츠오는 무사했다. 다만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뿐.

“나츠오…. 빨리 일어나. ”

카렌은 아픔을 곱씹듯 입술을 깨물며 나츠오의 몸을 흔들었다. 커플링 파트너가 이래서야 성기병을 움직일 수가 없다.

비록 팔 한쪽이 없다고 해도 아직 다리가 남아 있으니 나츠오만 정신 차리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쿵쾅쿵쾅 .

버그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온갖 무기로 무장한 거대 생명체답게 그 발소리는 무거웠다. 카렌은 고장이 난 인형처럼 굳은 몸짓으로 소리의 주인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소리의 주인은 낫처럼 휘어져 있는 양팔에 섬뜩한 고주파 블레이드를 무장하고 있는 <맨티스>였다.

카렌은 등줄기로 차가운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맨티스의 블레이드가 서서히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저게 내려 떨어지는 순간 죽는다.

그걸 직감한 카렌의 입술 밖으로 비명 대신 허탈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나, 여기서 죽는 건가.”

사실 애써 무시하고 있었지만,

주변에는 죽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부대원들의 성기병이 들판 위로 처참하게 부서진 채 쓰러져 있었다. 그중에는 카렌의 동기였던 아이들도 있었다.

총탄과 포탄을 맞고서 부서진 성기병의 몸에서 붉은 핏물이 흘렀다. 아마 저 안에는 파일럿들의 살점과 핏물도 뒤섞여 있겠지. 끔찍했다.

교관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전쟁터라는 게 이런 것이었을까. 신기하게도 이제는 얼굴도 기억 안 나는 그들을 머릿속으로 되새기며, 이제 곧 찾아올 죽음을 수긍하듯 눈을 감아버렸을 때였다.

─카렌, 괜찮냐.

카렌을 찾아온 것은 맨티스의 차가운 칼날이 아닌,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찬 따스한 목소리였다.

뒤늦게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떠보자 맨티스의 블레이드를 막아서는 성기병이 하나 보였다.

“…카미죠 오빠.”

─나츠오는 어때? 그 녀석은 무사하지?

덤벼드는 맨티스를 상대하면서도 그는 제일 먼저 나츠오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카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머리를 조금 부딪친 것 같지만 괜찮아요….”

─다행이네. 그러면 빨리 깨워서 도망쳐. 그동안 버그들의 시선은 우리가 끌고 있을 테니까.

“네? 그러면 카미죠 오빠는….”

─카렌. 지금 햇병아리 주제에 누굴 걱정하는 거야. 우리가 누군지 잊었어?

“……”

마지막 대답은 카미죠의 커플링 파트너인 사나에 씨의 목소리였다. 흔히 자기들을 393부대의 에이스 커플이라고 자랑하던….

활기찬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카렌은 안다.

저게 전부 허언으로 가득 찬 연기라는 걸.

그럴 수밖에.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카미죠가 타고 있는 사나에의 성기병은 누가 봐도 엉망진창이었다. 전신이 상처투성이다. 성기병의 전신에서 핏물이 흘렀다. 어느 한 곳도 멀쩡하지가 않다.

그런데 저런 상태로 싸우겠다고? 오히려 자기들도 도망쳐야 할 상황에?

카렌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분명 뭐라고 말해야 하는데, 말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햇병아리인 카렌과 나츠오보다는 저 두 사람이 도망쳐 살아남는 게 부대에 이득이 된다.

하지만 카렌은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죽는 게 무서워서 두 사람의 배려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카렌의 생각을 꿰뚫듯.

─카렌. 여기는 어른한테 맡겨라. 성인도 안된 놈들한테 이런 곳에서 죽으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까.

카미죠는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그날 카렌과 나츠오는 살아남았다.

393부대에 배치된 지 반년쯤 지나고,

불행하게도 카렌의 생일이 되던 날이었다.

3.

슬픈 꿈을 꾸었다.

한없이 무력한 자신에게 실망하면서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던 이기적인 기억.

그래서일까. 무의식 속에서도 카렌은 가슴 안쪽에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카렌은 눈물보다도 뜨거운 무언가가 볼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 뜨거움에 놀라 급히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여기는 어디지?

처음에는 여전히 꿈이라도 꾸고 있나 싶었지만, 등 뒤의 축축한 감촉이 그걸 아니라는 걸 알려주었다.

어쨌든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척이고 있자니,

“……잠시만, 움직이지 말아봐.”

어딘가 지친듯한 네토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바로 코앞에서 났다.

아까부터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고 있다고 느꼈는데, 그게 네토루의 몸이었나보다.

뭔지 모르지만, 녀석의 말대로 움직임을 멈추자,

“…읏?”

카렌은 자신의 가슴을 매만지고 지나간 손길에 깜짝 놀라 소리를 내고 말았다. 물컹물컹…. 의도적으로 쥐었다 피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어이 없어서 눈매를 좁히고 있자니,

몇 초 뒤 네토루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방금 건 실수.”

“…지금 장난칠 때야?”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여기 너무 좁은 걸.”

“자, 잠시만…. 앗… 마, 만지지 마!”

“미안하지만 참아봐. 자세 좀 바꾸게.”

뭔지 모르지만 어딘가에 갇힌 것 같다.

카렌은 가슴을 강하게 짓누르며 스치고 지나가는 네토루의 신체를 느끼면서 마력을 끌어올렸다.

일단 여기가 어딘지 알아야겠다.

그때 그런 카렌을 보며 네토루가 놀란 듯 말했다.

“…뭐야, 너. 마법도 할 줄 알았냐?”

“대단한 건 아니고, 기초적인 거야.”

한때 부유했던 부모님 덕분에 배웠던 지식이다.

리엔 사령관처럼 대단한 마법사는 아니지만, 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건 착실하게 익힌 상태였다.

───빛이여.

카렌은 가볍게 주문을 외우며 마력을 일으켰다. 곧 그녀의 손에 새하얀 광구가 생겨났다.

어둠이 물러나고 주위의 풍경이 드러났다.

그제야 답답함이 한결 사라지는 걸 느끼며 카렌은 고개를 들었다. 네토루 이 녀석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였다.

“………”

그리고 다음 순간 카렌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네토루는 피투성이였다.

“……너.”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걸, 카렌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빛이 환하게 피어오른 비좁은 공간 속.

무너진 흙더미들을 등으로 막아선 채, 눈이 마주친 그가 조용히 물었다.

“카렌. 괜찮냐?”

지금 누가 물어볼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카렌은 변함없는 그 뻔뻔함에 말문이 막혀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래도 자신을 깨웠던 그 뜨거움은,

네토루의 핏물이었나보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끼요요욧 연참이요욧

8/15 삽화 추가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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