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13화 (13/148)

EP.13 커플링 연공법

“■■■사령관님. 이번에 제47구역 철수가 결정되면서 470, 471, 472, 473 부대가 해체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 부대의 파일럿들을 저희 부대 쪽으로 지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요…. 여러 사람까지는 안 바랍니다. 한 명이라도 좋습니다.”

.

“…예? 자, 잠시만…. 그게 도대체 무슨?”

.

“■■■ 사령관님!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겁니까!”

“신병으로는 안됩니다! 저희 부대에는 베테랑 파일럿이 필요합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

.

.

“…죄송합니다.”

여느 때와 같은 오전.

상급 부대와 통신을 하던 리엔 프러스트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이윽고 강하게 이를 악문 그녀의 메마른 입술에서 핏물이 새어 나왔다.

2.

상급 부대와의 회의에서 제39구역, 393부대의 사령관이 하는 일은 언제나 똑같았다.

새로운 인원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

리엔은 393부대에 부임한 이후로 회의에서 이 요구를 단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었다.

아니, 리엔 뿐만이 아니다.

다른 부대의 모든 사령관들도 리엔처럼 매번 새로운 파일럿을 달라고 울부짖는다.

어느 부대를 가도 파일럿은 부족했고, 어떻게든 더 많은 보급과 지원을 받기 위해 애쓴다.

덕분에 말이 회의지 사실상 어떻게든 더 많은 걸 가져가기 위한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사령관들 중에서 리엔은 제일 어렸고, 여자였다.

심지어 ‘신 귀족’ 출신의….

“…이 양심도 없는 인간들.”

리엔은 몸을 가늘게 떨었다.

분노와 혐오가 가슴 안쪽에서 북받쳐 올랐다.

여자라고 얕보는 건 그렇다 쳐도, 대놓고 그런 저급한 말을 할 줄이야. 귀족이라는 작자들이 어찌 저럴 수 있는지 의문이다.

회의 내내 모든 사령관들이 새로운 파일럿을 보내 달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리엔은 유독 끈질긴 편이었다.

어떻게든 가능성이 있어 보이면 앞뒤 안 가리고 일단 머리부터 들이밀었다.

그럴 수밖에. 실제로 절박했으니까. 부대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부임했을 당시 393부대는 너무 너덜너덜했다.

부대가 전멸한 탓에 사령관은 사망하고, 남은 부대원은 소대 하나를 간신히 꾸릴 정도의 소수 인원뿐. 그래도 양심이 없던 건 아닌지 뒤늦게 신병을 넣어주기는 했는데….

문제는 그 신병들의 질이었다.

리엔은 사람을 등급으로 평가하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이 위치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효율적이고 피해 없는 전략을 짤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393부대에 오는 파일럿들은 모두 ‘최하급’ 등급의 아이들이었다.

기관에서 낙제생으로 평가받은 아이들….

그것이 현 393부대의 부대원들이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그런 신병들이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코노하, 로한, 아슈, 키파,에리, 미카게, 카나타, 레이나 …….”

리엔은 이제 부대에 없는 부대원들의 이름들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어느 이름도 잊을 수 없다.

아니, 잊어버려서는 안 되겠지.

지금의 부대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피와 목숨을 양분으로 삼았다.

그러니 자신은 그들을 기억해야만 했다.

“왜? 역시 이번에도 안 된데?”

책상에 엎어져 있던 리엔에게 아스나가 말을 걸어왔다. 리엔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든 채 주억거렸다.

“응…. 뭐, 그렇지.”

“그래? 아무튼, 고생했어.”

이제는 익숙해진 것일까.

예전과 달리 아스나는 혀만 작게 차고는 구석에서 다리를 꼰 채 앉아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상급 부대에서 내려온 전황 보고서였다.

“리엔.”

진지한 얼굴로 보고서를 읽던 아스나가 질 나쁜 장난이라도 본 것처럼 표정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손에 든 보고서를 팔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정말 진짜일까? 거짓말 아니야?”

“…설마 거짓말일 리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말도 안 되는 놈이 어떻게 존재해?”

“……확실히 그렇게는 한데.”

아스나가 읽고 있던 보고서에는 제47구역에서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도 어딘가 믿기 어려운 내용이 말이다.

리엔 역시 처음에는 아스나와 반응이 비슷했다.

이번에 제47구역에서 후퇴한 이유는 간단했다.

본래 전선을 축소할 계획이었던 것도 있지만, 며칠 전에 감당하기 힘든 존재가 그 구역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길이가 100미터가 넘는 초거대 버그….

보고서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아스나는 다시 보고서를 읽어보고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것처럼 종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튀겨댔다.

“아, 혹시 공 하나 잘못 적은 거 아니야?”

“아스나…. 그만해. 나도 그게 이상해서 회의 시간에 물어보니까 보고서에 적힌 게 사실이래.”

“……”

리엔의 말에 아스나는 눈을 꿈벅이며 한동안 자신의 눈구덩이를 문질렀다. 그렇게 현실을 부정하듯 한참을 그러다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와…. 리엔. 나 요즘 들어서 무교로 바꿀까 고민 중이야. 정말 신이 있으면 우리한테 이러면 안 되지. 이러다가 인류 멸망하는 거 아니야? ”

“……”

멸망이라….

농담 같지만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다. 남들보다 정보를 많이 접하는 위치였기에 더더욱.

사령관쯤 되면 보기 싫은 것도 어쩔 수 없이 보기 되길 마련이었다.

“그래, 있다고 쳐. 그러면 이 녀석은 어떻게 한대? 토벌이라도 하겠대? 그런데 47구역에서 물러나는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그리 대답한 리엔은 찌뿌둥한 몸을 풀듯 등을 쭉 피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천장을 보며 눈동자를 천천히 굴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초거대 버그…. 솔직히 말해서 현실감 없는 이야기인지라 뭔가 가슴에 와닿지는 않는다.

게다가 어차피 여기서는 먼 구역의 일이다.

그러니 그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리엔에게 중요한 것은 제 39구역의 일이었다.

3.

버그들이 발견되었을 때를 제외하면 부대원들 부대 안에서 자유롭게 지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이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자자! 좀 더 덤벼보라고! 이래가지고 버그들과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

우락부락한 체격의 챈들러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 주변으로 어린 부대원들이 목검을 쥐며 덤벼들었다. 그런데 하도 체격 차이가 큰 탓인지 동네 형이 애들과 놀아주는 모양새였다.

챈들러의 목검이 움직일 때마다 일격에 부대원들의 몸이 튕겨 나갔다. 목검이 부딪치며 딱딱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꽤나 위협적이다. 제대로 맞으면 어디 뼈가 부러질법한 위력이었다.

아무래도 애들이라고 봐주지는 않는 듯했다.

평소에는 유들유들하면서도 제법 혹독하게 가르치고 있다. 네토루는 근처 나무 그늘에 앉아 그런 챈들러의 모습을 구경하였다.

“…평소에 저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었던가.”

성기병을 움직이는 파일럿에게 저런 식의 훈련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겠지만, 큰 의미가 있다.

애초에 성기병이 다루는 무기가 냉병기였으니, 몸으로 직접 경험해보며 무기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수록 전투력은 가파르게 올라간다.

그런 점에서 챈들러의 방식이 틀린 건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완벽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저 정도면 그나마 챈들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애초에 정규 기사도 아닌 그가 제대로 된 훈련법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보통 부대에 기사 출신 남성 파일럿이 하나 정도는 있을 법하지만…. 역시 귀족들에게 미움받는 곳답게 이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파일럿들 중에서도 평민과 기사 출신 사이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몸 안에 구축한 마력 신경계는 물론이고, 무기술조차도 말이다.

솔직히 네토루의 시선으로는 버그들이 날뛰는 세상에서 계급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이 나라의 귀족들은 무서워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평민들이 귀족을 압도하는 것을.

혹시라도 귀족들이 단두대에 끌려가는 것을.

혹시라도 다시 왕국에 혁명기가 재림하는 것을.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귀족들은 버그들만큼이나 평민들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비술을 꽁꽁 숨겨두는 것이다.

우습지만 그 어느 때보다 힘이 필요한 시대였고, 그렇기에 강한 힘은 곧 압도적인 권력이 된다.

“여기는 뭐 구경할 것도 없네.”

챈들러의 훈련법을 구경하던 네토루는 질린 듯 길게 하품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곧장 챈들러와 남성 파일럿들을 뒤로하고 여성 파일럿들이 훈련 중인 곳으로 향했다.

역시 땀내 나는 남자들보다는 여자들 쪽이 낫다.

단지 몇 걸음 옮겼을 뿐인데 공기 중의 분위기와 냄새가 바뀌기 시작했다.

네토루가 도착한 그곳에는 세레스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앉아 있는 여성진들이 있었다.

여성들은 밑바닥에 요가 매트 같은 걸 깔아놓은 채 운동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현실에서 보았던 필라테스 운동법 같았다.

실제로 몸의 선이 유려하게 드러나는 레깅스 같은 걸 입고 있어서 보기도 좋았다.

─모두 저를 따라 해주세요.

세레스가 동작을 시작하자 주변을 동그랗게 둘러싼 여성 부대원들이 세레스의 동작을 따라 했다.

─양 무릎은 골반 넓이보다 조금 더 넓게 벌려주시고, 손은 어깨보다 조금 더 뻗어주세요.

“……”

─여기까지 됐다면 엉덩이를 뒤로 쭉 민다는 느낌으로 내려가고 팔꿈치를 일자로 펴주세요.

곧 10여 명이 넘는 소녀들이 흔히 현실에서 고양이 자세로 알려진 몸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여성 파일럿들의 하복부에 마력 신경계를 구축하기 위한 준비 운동의 일부분이었다.

“…역시 여기서는 세레스가 가르치는 건가.”

여자들의 엉덩이가 동시에 치켜 올려지는 모습은 제법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중 10대 꼬맹이들 사이에서도 20대의 농익은 세레스의 몸은 독보적이다.

덕분에 네토루도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었다.

부드럽게 몸을 쭈욱 펴올리는 동작 하나하나가 요염하면서도 세련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볼 때마다 탐나는 여자이기는 한데.

다른 한 편으로 현재로서는 섣불리 건들 엄두가 안 나는 여자이기도 했다.

게다가 보아하니 카렌하고도 꽤나 친해서 어중간하게 건드렸다가는, 기껏 말이 트기 시작한 카렌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가 없다.

“…음?”

그러다가 문득 네토루는 이상함을 눈치챘다.

정작 세레스 주위로 카렌이 안 보였다.

그 녀석은 어디서 따로 훈련하는 건가?

그런 생각에 주변을 둘러보던 그때였다.

“…뭘 그렇게 변태처럼 몰래 구경하고 있는 거야.”

별안간 뒤에서 카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놀랐지만 네토루는 태연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카렌의 얼굴이 보였다.

네토루는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괜히 부끄러워하거나 당황하면 모양새만 우습다.

“그냥 우연히 들렸을 뿐이야.”

“우연? 와…. 너 말이야…. 사람이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그리고 그런 네토루를 보며 여러 의미로 감탄한 카렌은 이마에 손을 짚더니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 마침 잘됐네. 나 좀 도와줘. 시간 괜찮지?”

“뭘 도와주면 되는데?”

“그야 당연히 훈련이지.”

훈련이라…. 네토루는 카렌의 차림새를 찬찬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훈련이라면 도와줘야지.

카렌 역시 다른 여성들처럼 몸의 선이 선명히 드러나는 검은 레깅스를 입고 있었는데, 콕피트에서 보았던 파일럿 슈트하고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따라와.”

그 모습을 흐뭇하게 구경하며 따라가자,

─으읏! 리, 린! 너무 강하게 잡아당기지 마!

─에이, 이 정도는 해야 운동이 되지!

─으아아! 나, 나! 이러다 정말로 죽어!

도착한 그곳에는 쌍둥이 자매가 커플 필라테스 비스무리 한 걸 하며 카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돌연 카렌이 당돌하게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며 네토루에게 물었다.

“혹시나 싶어서 묻는 건데, 너 커플링 연공법은 할 줄 알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8/13 삽화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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