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제 39 구역
여자의 마음은 갈대 같다고 하던가.
과연 이 말을 지금 같은 상황에 사용해도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종잡을 수 없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부대 식당으로 가는 길.
네토루는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의 앞에서 걷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경쾌한 발걸음 속에서, 어깨 윗부분까지 내려온 단발이 잔물결을 이루며 부드럽게 흔들린다. 소녀는 아까부터 재잘재잘 혼자서 떠들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네토루는 그런 카렌이 재미있었다.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이 소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커플링하기 싫다며 튕겨대던 녀석이 이제 와서 갑자기 친한 척이라니. 설마 함정인가? 처음에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런 의심마저 들었다.
‘생각보다 결단이 빠른데.’
사실 이런 카렌의 변화는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다만 생각했던 시기보다 태세 전환이 빨라서 당혹스러울 뿐.
아무래도 카렌은 혼자 부대에 남아 대기하는 게 썩 편하지가 않은 듯했다. 게다가 최근 들어 부대원들의 출격이 찾은 편이었으니 더욱 불편하게 느껴졌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빨리 생각을 바로잡을 줄이야.
그날 의무실을 찾았던 카렌이 네토루라는 청년과 커플링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리 없다.
1주일에 전에 있었던 전투는 분명 그녀의 몸에 무리가 되었을 텐데.
‘그런 리스크를 껴안고도 출격하겠다는 건가.’
자기 몸 아끼지 않는 그녀의 지극한 동료애를 칭찬이라도 해줘야 할까. 네토루는 눈앞에 있는 소녀에 대한 정보를 수정하기로 했다.
‘생각 이상으로 착해빠진 녀석이군.’
어차피 마침 네토루도 따분한 찰나였다.
지금처럼 부대 안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녹슬어가고 싶지는 않다.
쓰이지 않는 칼날은 언젠가 무디게 변하고 만다.
예리한 칼을 갈기 위해서는 그만큼이나 자기 스스로를 단련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네토루도 카렌의 도움이 필요했다.
현재로서는 이 부대 안에서 카렌이 제일 네토루의 커플링 파트너로 적합한 존재였다.
부대 식당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였다.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아까부터 계속 혼자만 떠들고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걸까. 앞서 걷고 있던 카렌이 당돌하게 빙글 몸을 돌리고는 네토루를 쳐다보았다.
“아, 듣고 있어.”
“…그거, 정말이지?”
“결국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카렌, 네가 나를 위해서 부대원들하고 화해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해주겠다는 거 아닌가?”
“음…. 어쨌든 핵심은 맞아.”
고개를 끄덕이던 카렌은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땅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솔직히 너도 계속 부대원들 사이에서 겉돌기만 하면 불편할 거 아니야? 네가 이곳에 하루 이틀 있을 것도 아니고.”
“……”
그때 뺨을 때렸던 녀석이 맞는 건가? 예상치 못한 카렌의 말에 네토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실 지금 같은 생활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지금은 카렌의 생각에 어울려주기로 했기에 네토루는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건 그렇지.”
“…좋아. 그러면 앞으로 우리 부대원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걸로 합의한 거다?”
“그래, 최대한 노력해볼게.”
네토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카렌을 안심시켰다. 다행히 그게 효과는 있었는지 카렌은 걱정의 눈초리를 거두고는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부대원들이 모여 식사 중이었다.
“뭐야 카렌. 왜 이렇게 늦게…. 어라?”
“엉? 뭐야, 카렌이 저 녀석이랑 왜?”
“…누렁이네?”
그들은 뒤늦게 온 카렌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맞이하다가 곧 표정이 굳었다. 하나같이 전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였다.
카렌이 네토루의 뺨을 때렸던 게 1주일 전이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사이 좋게 식당에 모습을 드러낸다?
아마 네토루였어도 이해할 수 없었겠지.
“하하…. 그게.”
당장 설명을 요구하는 부대원의 시선에 카렌은 역시 쉽지 않겠는걸, 중얼거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름 얼굴에 철판을 깔아보려고 노력한 한 듯 하지만, 역시 쉬운 일은 아닌 모양이다.
* * *
국토 전역에서 버그들과 싸우는 성기병 파일럿의 소모율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부대 하나가 통째로 전멸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버그는 강력했고, 여전히 미지의 존재였다.
싸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적이었기에 성기병 파일럿들에게 죽음이라는 건 친숙한 존재였다.
이러한 환경 탓일까.
사령관의 재량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는 있지만 성기병 부대의 분위기는 어느 구역을 가도 상당히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 예로 제39구역에 배치된 제393부대의 경우 음주나, 제시간에 잠을 자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행동을 허용해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제393 부대의 파일럿들은 여느 때처럼 부대 식당에서의 식사를 끝나고 자유시간을 즐겼다.
군이라는 특성상 즐길 거리는 지극히 한정적이었지만, 부대 인근의 버려진 도시에서 몇 가지 공수해온 것들이 있기에 썩 나쁘진 않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며칠 전에 구해온 당구대가 현재 부대원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었다.
“오오오! 진짜 보여주려고?”
“자, 잠시만! 여기는 맛세 금지야!”
“걱정 마. 나는 문제 없으니까.”
“야! 이 미친놈아! 그러다가 정말 천이 찢어지면 어떻게 고칠 방법도 없다고!”
부대원 중에서도 커다란 체격을 지닌 챈들러가 네토루에게 버럭 화를 질렀다. 하지만 네토루는 무덤덤하게 경고를 무시하고는 화려한 기술을 보여주며 압도적인 점수 차로 승리.
부대원들은 그것에 열광하며 떠들썩하게 놀고 있었다. 새로운 고수의 등장이라나 뭐라나.
“…뭐야, 저거.”
카렌은 근처에서 그런 남자들의 모습을 구경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갈 경우 곧바로 끼어들기 위해 근처에서 준비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나 보다.
당구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부대원들의 격렬한 반응을 보니 네토루가 제법 상당한 실력자인 듯했다.
“미친…. 저렇게 잘 지낼 수 있으면서 왜?”
만약 녀석이 분위기에 잘 녹아들지 못할까 봐 온갖 방법들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카렌이 생각보다 네토루는 친화력이 좋은 청년이었다.
오히려 이쯤 되면 뭔가 무섭기까지 하다.
저럴 수 있으면서 그동안 왜 그렇게 부대원들하고 벽을 쌓고 지냈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내심 불안한 심정을 숨기지 못한 채 계속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던 그때였다. 근처에서 같이 남자들을 구경하고 있던 세레스가 다가왔다.
“카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아. 세레스.”
카렌은 볼을 긁적였다. 안 그래도 슬슬 세레스가 물어볼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걸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그걸 고민하며 어색하게 웃고 있는 카렌을 게슴츠레 응시하던 세레스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녀의 깨끗한 자색 눈동자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깃들었다.
“설마 저 사람하고 커플링할 생각인가요?”
“아마…. 그렇게 되겠지?”
“…그럼 오늘 일도 커플링 파장의 수치를 높이기 위한 일종의 계획이었겠네요.”
“응. 맞아.”
카렌은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커플링 파장의 수치를 높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핵심은 친밀감 또는 감정의 교류다.
다르게 말하면 서로를 이해하는 것.
그래서 카렌은 네토루가 부대원들하고 친해질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래야 카렌도 그와 친해질 수 있을 테니까. 일단 친구가 되는 게 중요했다.
“카렌. 정말 괜찮겠어요? 첫 커플링만으로도 그렇게 몸에 무리가 갔는데….”
“음…. 글쎄…. 솔직히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이러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뒤에서 구경만 하는 건 좀 그래.”
“……”
카렌을 빤히 쳐다보던 세레스는 잠시 눈을 감고는 한숨을 쉬었다. 카렌의 얼굴에서 확고한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카렌이 이런 결단을 내린 이유는 뻔하다. 아마 지난 며칠간 계속된 잦은 출격 때문이겠지.
정말이지…. 나츠오도 그렇고, 그 파트너인 카렌 역시 사람이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확실히 당신 성격에 부대에서 혼자 가만히 있는 건 무리겠죠.”
“하핫…. 뭐, 그런 것 같네?”
“칭찬 아니니까, 웃지 마세요. 저는 화났으니까.”
“으으…. 미안.”
샐쭉이 노려보는 세레스의 눈빛에 카렌은 시선을 피하며 애꿎은 땅바닥만 두들겼다.
그런데 사실 카렌이 미안할 것도 없는 일이다.
결국 이건 그녀가 위험을 껴안고 싸우겠다는 거니까. 평범한 사람이라면 쉽게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1주일 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커플링을 하겠다니. 역시,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다.
덕분에 저도 모르게 힘이 풀린 세레스는 그녀의 등줄기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카렌. 이거 하나만 알아두세요. 이곳에서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에 몸 편히 살아나가는 것도 중요해요.”
버그들과의 싸움이 언제 끝날진 알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결국 마지막이 오는 법이다.
성기병 파일럿들은 버그들과 싸우다가 죽기 위한 존재들이 아니다. 비록 재능이 있다는 이유로 이렇게 성기병 파일럿으로 선출되었지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러니까 너무 자기 몸을 혹사시키지 마세요. 저는 카렌이 죽는 것도, 폐인이 되는 것도 싫으니까.”
“…응. 알겠어.”
세레스는 챈들러와 함께 부대원 중에서 제일 연장자인 동시에 제393부대에서 제일 오랫동안 살아남은 파일럿이었다.
덕분에 세레스는 ‘폐인’이 된 파일럿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한계 이상으로 몸을 다루다가 끝내 몸과 영혼까지 바스러지고만 안타까운 존재들.
살아있지만, 더 이상 살아있는 게 아니게 된 가련한 동료들의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칼을 여미는 것처럼 뇌리 깊숙한 곳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세레스는 네토루가 싫었다.
커플링이라는 건 남녀의 정신과 영혼을 연결하는 계약이다. 그렇기에 ‘보통’의 경우 혼자 멀쩡하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 * *
떠들썩한 시간이 끝났다.
부대 분위기는 자유롭지만 취침 시간만큼은 엄격했다.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전투력 손실이 일어난다는 흔하기 흔한 사정 때문이었다.
네토루는 부대원들이 전부 숙소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홀로 밖을 나와 산보를 즐기기로 했다.
딱히 뚜렷한 목적이 있는 산책은 아니었다.
단지 오늘 먹은 저녁이 전부 소화되지 않은 탓인지 속이 더부룩해서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비록 그 여자애의 생각에 어울려주기로 했지만, 하루아침만에 태도를 바꾸는 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적당히 주변을 돌아다니던 그때였다.
목적 없던 네토루의 걸음이 돌연 멈추었다.
─으응…. 그, 그만….
“……?”
근처에서 여성의 신음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네토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악…. 하으읏……
누군지 모르지만 대담하게 야외에서 섹스라니.
아니, 이건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보통 부대원이 여기까지 오는 경우가 없을 테니까. 그러니 대담하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히 숨기려고 여기까지 와서 즐기고 있는 거겠지.
그걸 생각하자니 네토루는 무심코 헛웃음을 흘렸다. 괜히 미안해졌다고 해야 할까.
“……음.”
만약 현실이었다면 부대 안에서 남녀가 성행위를 한다는 것이 미친 짓이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권장하기도 했다.
커플링 파장의 일치율을 올리는 제일 쉽고 확실한 수단이 바로 섹스였으니까.
─아… 아아앙…. 으윽….
소음이 사라진 밤중이라 그럴까. 들뜬 여성의 목소리는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하지만 굳이 확인해보지는 않기로 했다.
직접하는 거면 모를까, 괜히 다른 사람의 섹스를 구경하는 취미는 없다. 그래서 네토루가 흥미를 끊고 발걸음을 돌리려고 하던 그때였다.
─으읏! 그, 그만 가자…. 이제 취침 시간이야!
─에이…. 언니, 괜찮아. 아직 시간 남아있으니까.
그런데 차마 걸음을 돌리기에는 들려온 내용이 꽤나 흥미로웠다.
그리고 왠지 목소리가 귀에 익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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