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5화 (5/148)

EP.5 제 39 구역

생각지 못한 만남이다.

설마 여기서 이 녀석을 만나게 될 줄이야.

‘…이 녀석이 왜 이곳에?’

혹시 이 녀석도 몸 상태가 안 좋은 걸까?

그래서 의무실에?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 녀석만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무리한 커플링은 파일럿의 몸에 큰 부담을 준다.

기지에 복귀하자마자 의무실을 찾을 정도로 카렌의 몸 상태가 나빠진 것은 그래서였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였던 네토루 역시 멀쩡할 수는 없는 일이다.

‘역시 혼자 멀쩡했던 건 아니었나 보네.’

미지근한 침묵이 주변을 맴도는 가운데. 둘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로를 관찰하듯 응시했다.

이윽고 그렇게 이어지던 기묘한 침묵 속에서.

“흠.”

먼저 움직인 것은 네토루였다.

그는 마주친 카렌을 보면서도 별 감흥이 없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옆을 지나쳤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차가운 태도였다.

카렌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그시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결심한 듯 말을 걸었다.

“…잠시만, 너한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말을 걸자 잠시 걸음을 멈춘 네토루는 고개만 살짝 틀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탁한 느낌의 금발 아래.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황량한 색의 눈동자가 카렌을 응시했다.

한 번 박힌 나쁜 인상 탓인지 카렌에게는 그런 행동거지조차도 어딘가 삐딱하게 느껴졌다.

“너에 대한 소문은 도대체 어디까지 진짜야?”

네토루는 질 나쁜 소문이 많은 사내였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몸 상태가 나빠진 카렌을 보며 세레스가 걱정했던 건 이래서였다.

안 그래도 ‘첫 커플링’ 만으로도 카렌의 몸에 부담이 되었는데, 상대에게 좋지 않은 소문까지 있다.

옆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커플링을 말리고 싶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 어떤 걸 말하는 거지?”

“…전에 있던 부대에서 커플링 파트너를 망가뜨렸다는 이야기 말이야.”

“아, 그거 말인가?”

카렌의 말에 네토루는 마치 우스운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리고는 돌연 한 걸음 다가오면서 말했다.

“어떻게 생각해. 그 소문이 진짜일까, 가짜일까?”

“…그건.”

“오늘 나랑 커플링 해봤으니 대충 알 거 아니야. 그 소문이 왜 나왔는지.”

커다란 신장 탓일까.

카렌을 내려다보는 네토루의 눈은 어딘가 상대방을 깔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카렌은 그 시선에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눈동자에 힘을 담아 말했다.

“적어도…. 헛소문은 아닌 것 같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오늘 있었던 커플링은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었다.

카렌은 지금껏 그런 난폭한 커플링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더욱 끔찍한 것은 네토루의 의지에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전투의 모든 것을 네토루 혼자 해결하지 않았는가.

본래 성기병을 움직이는 건 남성의 역할이 맞지만,

그렇다고 여성 파일럿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결국, 근원적으로 따지면 성기병이라는 건 여성 파일럿의 육신을 베이스로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눈앞에 있는 녀석과 커플링 했을 때 카렌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순간인가 성기병에 대한 통제권을 완벽히 빼앗긴 상태였다.

도대체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카렌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 따위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한쪽이 일방적으로 성기병을 통제한다는 건 카렌의 상식에서 어긋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걸 따지면 한둘이 아니다.

애초에 네토루와 첫 시도 만에 커플링을 성공했던 것부터가 어딘가 이상하다.

사실 카렌에게도 훈련 기관에서 다른 남자 파일럿들과 커플링을 시도했던 경험은 여럿 존재했다.

다만 나츠오를 제외하고는 전부 실패했을 뿐.

수십 명의 파일럿들 중 지금까지 카렌과 커플링 파장이 일치했던 건 유일하게 나츠오 뿐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첫 시도 만에 커플링이 성공할 정도로 파장이 일치한다?

그럴 수 있는 확률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정작 커플링을 해보니 ‘파장’이 일치 하는 느낌 또한 아니었다. 오히려 최악이면 모를까.

서로 커플링 파장이 맞았다면, 오늘처럼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질 리가……

“왜? 오늘 나랑 커플링 한 게 후회라도 돼?”

“……!”

돌연 들려오는 네토루의 목소리.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인가 녀석이 바로 코앞에 있다. 덕분에 깜짝 놀란 카렌은 급히 뒷걸음쳤다.

“…으읏!”

하지만 너무 허둥지둥대던 탓일까. 카렌은 몸이 부자연스럽게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자기 발에 본인이 걸려 넘어진 것이다.

“멍청하기는.”

하지만 뒤통수가 바닥에 닿는 일은 없었다. 카렌은 곧 찾아올 충격에 대비하듯 무심코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떠보았다.

“뭐 하는 거냐, 너.”

넘어지려는 카렌의 허리를 붙잡은 네토루가 싸늘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차디찬 시선에 카렌은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붉어진다.

자신도 창피했다. 왜 하필 이 녀석한테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을까. 죽고 싶어졌다.

그런 카렌의 생각을 알련지 네토루가 말했다.

“이름이 세레스라고 하던가? 그 녀석이 말하는 걸 들어보니 너, 나랑 커플링 거부할 거라면서.”

그새 세레스가 네토루한테 말한 걸까. 카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설마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너랑 계속 커플링 했다가는 내 몸이 멀쩡하지 않을걸?”

"그래, 몸이 걱정인가?"

카렌의 대답에 네토루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어떻게 하려고? 설마 다음 전투 때는 그냥 부대 안에서 대기만 하려고?”

“…그건.”

그건 카렌도 제일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렌도 세레스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설이지 않았는가.

남들은 전부 싸우고 있는데,

혼자 뒤에서 지켜보는 게…. 마음 편할 리가 없다.

아무리 부대원들이 동의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내면을 읽어내듯 카렌의 얼굴을 퉁명스레 쳐다보던 네토루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러다가, 누군가가 죽고 나서 뒤늦게 후회하지는 마라.”

“……”

그 어떤 욕보다도 가슴 깊숙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그의 한 마디에 카렌은 입술을 떨었다.

하지만… 끝내 뭐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 * *

바람이 강하게 분다.

의무실에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어두컴컴하게 변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확인한 농구장에는 어느새 쌍둥이 자매 역시 모습을 감춘 뒤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에 있겠지.

군의관에게 받은 약을 주머니에 넣으며 네토루는 식당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가 도착한 부대 식당의 외견은 솔직히 말해서 그다지 좋게 평가할 구석이 없었다. 부대 전체가 그러하듯 식당 역시 낡아 빠진 건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식당 구석구석에 부대원들이 설치한 걸로 생각되는 여러 장식물들이 휑한 식당 풍경에 밝은 색감을 더하고 있어 썩 볼만은 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제일 눈에 띄는 건,

[반드시 살아남자!]

벽 한쪽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글자와 함께.

부대원들끼리 단체 사진이라도 찍은 건지 벽에 덕지덕지 붙여져 있는 수많은 사진이었다.

네토루는 벽에 붙어 있는 사진들을 구경하며 걸음을 느리게 바꾸었다. 흥미로운 사진들이었다.

지난 1주일간 모든 부대원의 얼굴을 보았지만,

정작 사진 안에는 그가 모르는 얼굴들이 여럿 있었다.

그건 어째서일까.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뻔한 이야기다.

모두 죽은 거겠지.

버그들과 전쟁이 시작된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제39구역에는 수많은 파일럿들이 배치되었을 것이고,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 부대의 초창기 멤버는 이젠 아예 없을 수도 있겠지.

낡아 터진 모습만큼이나, 이곳에는 수많은 죽음이 쌓여 있었다.

실제로 그걸 증명하듯.

식당 안쪽으로 갈수록 때가 타며 언제 찍은지 모를 낡은 사진들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그때마다 네토루가 모르는 얼굴들 역시 점점 늘어났다.

이제는 이 세상에 없을 사람들.

과연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서 싸웠을까.

단순히 애국심일까,

아니면 군인으로서의 숭고한 책임감 때문에?

뭐가 되었든,

네토루는 이 나라의 끝이 어떨지 알기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그 누구도 보답받을 수 없는 무의미한 죽음일테니까.

그런 그들의 얼굴을 한차례 훑어보던 네토루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마침 떠들썩한 소리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하하! 카렌, 칸자키 이 자식이 그때 얼마나 울고불고 난리였는지 알아? 아주 그냥……

─자, 잠시만! 챈들러 형! 그 이야기는 하지 말라니까!

─아무튼, 나츠오도 무사히 회복하고 있다니까 다행이네. 카렌.

─제가 말했죠? 나츠오 형이라면 분명 괜찮을 거라고! 그 인간이 얼마나 튼튼한 사람인데요!

네토루가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부대원들끼리 모여 떠들썩하게 떠들며 식사 중이었다.

네토루는 그 풍경을 물끄러미 구경하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 중심 속에서 같이 웃고 있는 카렌을 바라보았다.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어딘가 어색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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