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화 속 금태양이 되었다-4화 (4/148)

EP.4 제 39 구역

햇볕에 오랫동안 태워진 구릿빛 피부.

그리고 염색이 반쯤 풀린 듯한 탁한 색상의 금발과 동네 양아치 같은 사나운 인상.

네토루는 이런 자신의 생김새에 대해 딱히 깊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런 외견이 때로는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음흉한 누렁이라.

이 괴이한 명칭은 설마 피부색 때문에 그런 건가. 지금껏 여러 욕을 들어봤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다.

아니, 이걸 차마 욕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흠.”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네토루는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럴 수밖에.

제 딴에는 나름 위협한답시고 팔짱을 끼며 눈에 힘을 주고 있지만…

그 행동의 주인이 이제 겨우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조그마한 꼬맹이라면, 그저 우습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린? 란? 누구지.’

눈앞에 있는 소녀는 과연 누구일까.

아쉽게도 네토루는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 부대 안에서 쌍둥이 자매와 한 번도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조용히 소녀를 관찰해보았다.

‘…정말 몸집이 작군.’

우연히 부대 안에서 발견할 때마다 작다고 매번 속으로 생각하고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어딘가 현실감 없게 느껴진다.

부대 안에 이런 어린애가 있어도 되는 걸까.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드는 외견이었다.

어디 눈싸움이라도 하자는 건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던 소녀에게 네토루는 넌지시 물었다.

“너. 몇 살이냐?”

“…뭐?”

생각지 못한 질문 탓일까. 팔짱을 끼며 애써 분위기 잡고 있던 소녀의 분위기 흐트러졌다.

네토루는 자신의 가슴팍보다 낮은 소녀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잠시 몸을 낮추었다. 그건 누가 봐도 어린 꼬마를 대하는 듯한 어른의 여유였다.

“얼핏보면 15살 정도는 되어 보이는데….”

“……아?”

농담보다는 진심이 담긴 목소리.

그래서일까. 이제는 아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처음에는 이게 뭔 소리인가 싶다가, 곧 소녀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자, 잠시만…. 15살? 지금 날 놀리는 거야!? 그렇게 어릴 리가 없잖아!”

“그러면 몇 살인데?”

“19살!”

“……?”

네토루는 믿기 어려운 말을 들은 것처럼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건 아무리 봐도 19살이 아니었으니까. 성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조그마한 몸이었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거짓말 같지는 않다.

‘…이게 19살이라고?’

부대 안에는 17살 정도 되는 고등학생 나이대의 파일럿이 여럿 존재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조차도 눈앞에 있는 소녀랑 비교하면….

“……음.”

네토루는 다시 한번 소녀의 몸을 천천히 살펴보고는 탄식을 흘렸다. 몇몇 녀석들에게는 이런 소녀의 모습이 그야말로 취향일 수 있겠지만,

정말이지…. 안타까울 정도로 부조리한 현실이군.

게다가 카렌과 동갑이라고 하니 더더욱….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연민이 담긴 노골적인 네토루의 시선에 소녀가 주먹을 꽈득 쥐며 고갤 쳐들었다. 새하얗던 얼굴이 처연할 정도로 붉다.

“지, 지금…! 너! 설마, 내가 작다고 불쌍하게 여기는 거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거늘 다행히 눈치는 제법 있는 듯했다. 네토루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이를 콱 강하게 물었다.

이윽고 스프링처럼 당장이라도 튀어 오를 듯한 분위기에, 네토루가 본능적으로 뒤로 한걸음 물러서던 그때였다.

“자, 잠시만! 리, 린! 싸우면 안 돼!”

다급한 목소리를 내지르며 방금까지 농구 코트에서 공을 굴리고 있던 소녀가 후다닥 달려왔다.

방금 린…. 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소녀가 란인듯했다

“하지만 언니! 방금 이 녀석이 날 깔봤다고!”

란에게 양 팔을 붙잡힌 린이 아등바등 팔과 다리를 휘저었다. 그러한 행동거지만 보면 누가 봐도 영락없는 꼬맹이였다. 도저히 19살 같지가 않다고 해야 할까.

“으읏! 그래도 싸우면 안 돼!”

그래도 언니 쪽은 제법 의젓한 성격인 듯하다.

…라고 네토루가 생각하던 그때였다.

“세레스 언니가 말했잖아! 저 양아치놈하고는 최대한 말도 하지 말고, 접촉도 하지 말라고!”

돌연 란이 대놓고 삿대질 하며 소리쳤다. 그 손가락 끝에 서 있던 네토루는 표정을 찡그렸다.

지금 이거 일부러 엿 먹인 건가?

하지만 그건 아닌 듯.

“…앗! 그, 그게…! 그러니까… 이건…”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란이 새하얗게 지린 얼굴로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자, 네토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꼬맹이들이 성기병을 타고 싸운다니.

여러 의미로 정신 사나운 꼬맹이들이다. 이대로 계속 이 꼬맹이들을 상대하다가는 괜히 이쪽만 귀찮아지겠지.

대충 두 자매를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에 의의를 둔 네토루는 조용히 등을 돌렸다. 아마 다음에는 린과 란을 구별할 수 있으리라.

* * *

성기병을 타는 파일럿에게 부상은 흔한 일이었다.

비록 전투 중에 깎여 나가는 것은 성기병의 몸체가 대부분이지만, 그렇다고 마력 신경계와 성기병을 연결하는 파일럿에게 아무런 무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는 몸 안에 구축한 마력 신경계가 망가진다고 하는 게 옳겠지. 기계를 함부로 다루면 내부 부품이 망가지듯 인간 또한 그러했다.

성기병을 타는 파일럿이라는 것은 결국,

성기병을 움직이기 위한 ‘부품’에 불과했으니.

그중에서도 여성파일럿은 성기병의 심장과도 같았다.

“……”

흐릿한 의식이 서서히 수면 위로 부상한다. 역시 퇴원하자마자 성기병을 탔던 건 무리였던 걸까.

아니면 그 남자가 문제였던 걸까.

의무실에 누워있던 카렌은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카렌. 일어났어요?”

그러자 제일 먼저 세레스의 얼굴이 보였다.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그녀의 자색 머리카락을 보며 카렌은 힘없는 미소를 짓고는 물었다.

“…세레스. 내가 얼마나 잔 거야?”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유난히 힘이 없다.

그걸 눈치챈 세레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음에 답했다.

“음…. 아직 저녁 먹기 전이니까, 대충 2시간 정도 잔 것 같네요?”

“2시간? 내가 그렇게 오래 잤다고?”

벌써 2시간이나 지난 건가. 잠시 눈만 붙인다는 게 생각보다 깊게 잠든 듯하다. 이래서는 오늘 밤에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역시 무리했던 걸까. 의무실 침대에 누워있던 카렌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찌뿌둥한 몸을 틀며 가볍게 스트레칭하던 그때였다.

“…음?”

카렌은 문득 생각난 사실에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보니 눈을 뜨자마자 세레스가 왜 옆에 있는 거지?

분명 의무실까지 같이 왔던 기억은 있는데….

“…세레스. 설마 내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지?”

부대에 복귀한 후 카렌은 의무실을 찾았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군의관한테 파일럿용 영양제를 하나 받고서 잠을 잔 것이 현 상황이었다.

세레스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후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라고 미련하게 카렌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니니까요. 저는 그냥 저녁 시간이 되었는데도 카렌이 계속 안 보여서 한 번 확인하러 온 거예요.”

“아…. 그래?”

“어쨌든, 그것보다 카렌. 몸 상태는 어떤가요?”

“음….”

카렌은 가볍게 팔을 움직여보며 손아귀에 힘을 줘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숨 자고 나니까 좀 나아진 듯한 기분이다.

“한숨 푹 자고 나니까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아.”

“그러면 다행이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세레스의 표정은 여전히 어딘가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곧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카렌. 앞으로 어떻게 할 건가요.”

“뭘?”

“커플링이요. 설마 카렌은 그 남자랑 계속 커플링 할 건가요?”

“……”

"…솔직히 오늘 카렌은 많이 괴로워 보였어요. 나츠오랑 커플링할 때는 한 번도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는데 말이죠."

나츠오…. 그는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이자 오랜 소꿉친구였다. 그리고 아직 병원에 입원해 있는 소년.

부대원들 중에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상냥하고, 정의로우니까.

“저는 굳이 카렌이 무리하게 그 사내랑 커플링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오늘 일도 그렇고, 괜히 무리했다가는 몸에 부담만 될 거예요.”

"...그건."

세레스의 말에 카렌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쳤으나, 그녀는 곧 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 혼자 계속 부대에서 대기할 수는 없잖아. 전력 하나가 비는 게 얼마나 큰 손실인지, 세레스 너도 알 텐데?”

“확실히 그건 그렇죠.”

카렌의 말은 옳다. 세레스는 카렌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손실만 있고, 제때 인원이 충족되지 않는 제39구역의 특성상 한 사람 한 사람이 전부 소중했다.

그런 점에서 카렌이 전투에 빠지는 건….

분명 다른 부대원들에게 큰 무리가 되겠지.

그렇지만.

그렇다고 카렌에게 그 남자하고 무리한 커플링을 요구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아마 다른 부대원들도 더 이상 카렌을 무리시키고 싶지 않겠지.

애초에 카렌의 커플링 파트너였던 나츠오가 현재 자리를 비우고 입원해있는 건, 부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저번 전투에서 무리를 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분명 많은 부대원들이 죽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악의 경우 정말로 전멸했을지도 모른다.

세레스는 두 손으로 카렌의 손을 상냥하게 쓸어만지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카렌. 그건 너무 신경 쓰지 마요.”

“하, 하지만….”

“그리고 제가 말하는 게 늦었지만, 사실 지금 이야기는 이미 다른 아이들하고 전부 합의된 상태에요. 그러니까 그 정도는 응석 부려도 괜찮아요.”

“세레스….”

부대원 중에서도 연장자에 속해 있는 탓일까.

어른스러운 세레스의 온화한 목소리는 사람을 안정시키는 묘한 힘이 있다.

카렌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솔직히 말해서 카렌도 그 남자하고는 커플링하고 싶지 않았다.

‘……난폭해.’

그 금발 사내의 커플링은 어딘가 숨이 막혔다.

이쯤되면 도대체 어떻게 커플링이 성립될 수 있는지 지금도 의아할 정도다.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봐도 서로의 커플링 파장이 맞는 감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성공했고,

자신의 몸을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어딘가 상식이 어긋난 듯한 현상이다.

게다가 자기 몸이 자기께 아닌 듯한, 그 괴리감은 지금껏 카렌이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막말로 그 남자의 손길에 온몸이 더럽혀지는 듯한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기관에서부터 언제나 나츠오와 함께 했던 카렌에게 다른 사람하고의 커플링은 너무나도 낯선 일이었다.

특히 전투 중에 무의식적으로 그와 몸이 맞닿을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애초에 지금까지 몸을 맞닿는 걸 허락한 건 나츠오가 유일했으니….

그래도 그나마 카렌이 한 가지 인정하는 게 있다.

‘그래도 실력은 대단했지.’

네토루, 그 사내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

어긋난 커플링 때문일까.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뒤늦게 정신을 차릴 때마다 주변에는 버그들의 시체만이 가득했다.

게다가 성기병의 몸체에도 상처 하나 없었다는 것 또한 카렌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단순히 실력만을 논할 때 그 남자는 나츠오보다 대단했다.

“어쨌든 카렌의 상태도 확인했으니, 저는 먼저 일어나볼게요. 카렌도 방으로 돌아가서 준비가 끝나면 바로 식당으로 오세요. 알겠죠?”

“응. 알았어.”

카렌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자 세레스는 그 모습이 귀여운 듯 생긋 웃어주고는 의무실에서 나갔다.

그 후 카렌도 의무실에서 나갈 준비를 했다.

벗어놨던 겉옷을 챙겨입으며, 흐트러져 있던 침대를 정리한다.

그냥 나가도 군의관이 알아서 정리하겠지만,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인 카렌에게 흐트러진 침대 이불을 무시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흐트러진 옷맵시를 정리하며 의무실에서 나가려던 찰나였다.

문고리를 잡던 그때.

드르륵…. 누군가 먼저 문을 열었다.

“……아.”

얼굴을 확인한 카렌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리며 움찔했다.

바로 코앞에서 상대와 시선이 마주친다

운이 나쁘게도…. 그 사내였다.

“음?”

색이 바랜듯한 금발 사내 역시 조금은 놀란 듯 바로 앞에 있는 카렌을 보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카렌은 그런 사내의 표정이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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