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 제 39 구역
역시 조금은 뒤로 피할 걸 그랬나.
네토루는 뺨에 남아 있는 욱신거림을 느끼며 오늘 자신과 커플링을 했었던 여성 파일럿을 떠올려보았다.
‘…이름이 카렌이라고 했던가.’
비록 제39구역에 배치된 지 벌써 1주일이 지났지만 네토루는 카렌이라는 소녀를 오늘 처음 만났다. 듣자 하니 그동안 입원해 있다가 오늘 복귀했다고 하던가.
아무튼,
비록 마지막은 좋지 않게 끝났지만, 전체적인 인상은 나쁘지 않은 소녀였다. 단아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 그리고 찰랑거리는 검은 단발 머리카락….
대부분이 미남 미녀로 그려지는 애니메이션 세계답게 훌륭한 외모를 지녔던 소녀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그녀의 몸 안에 구축된 마력 신경계였다. 어지간한 귀족 여자들보다도 깔끔하고 정밀하게 구축된 마력 신경계는 네토루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카렌이라는 소녀를 비롯해 제39구역의 부대원 대부분이 평민이다. 그렇기에 고등급 레벨의 마력 신경계를 구축하는 건 요원한 일.
그런데도 그 정도 수준의 마력 신경계를 구축할 수 있던 건 분명 엄청난 노력과 출중한 재능 덕분이겠지.
이런 걸 생각해볼 때 네토루가 카렌이라는 소녀에게 뺨을 맞았음에도 궁합이 잘 맞았다며 괜히 입맛을 다신 게 아니다.
평민 중에서 그 정도 수준의 마력 신경계를 구축한 사람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여성 파일럿의 능력치가 곧 성기병의 기동능력이라는 걸 생각하면 카렌, 그 소녀는 쉽게 놔주기 아쉬운 인재였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오늘 복귀하자마자 카렌에게 뺨을 맞았다는 게 진짜인가요?”
그새 어디선가 이야기를 들은 건가.
“예. 맞습니다.”
네토루의 대답에 리엔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록 임시였다고 하지만 첫날부터 커플링 파트너에게 뺨을 맞다니…. 그것도 나름 재주라고 해야겠네요. 카렌이 그렇게 무작정 폭력을 휘두를만한 아이가 아닌데….”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는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당신이 전투 도중에 도대체 뭔 짓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 부대 안에서 당신하고 커플링이 가능한 건 카렌뿐이에요.”
“다른 대기 인원은 없는 겁니까?”
“네. 없어요.”
그런가, 네토루는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애써 급하게 구하러 다닌다고 여성 파일럿이 갑자기 어디에선가 뚝 떨어지지는 않으니까.
물론 카렌 말고도 부대 안에는 다른 여성 파일럿이 여럿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미 커플링 파트너가 존재하는 상태였다.
커플링이라는 건 단순히 같은 성기병을 탄다고 성립되는 행위가 아니었고,
한 번 커플링을 했었던 파일럿들은 아무리 연습이라고 해도 섣불리 커플링 파트너를 바꾸지 않는다.
커플링 파장이 맞는 파트너를 찾는 게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 기껏 일치시킨 서로의 커플링 파장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네토루 개인을 위해서 기존에 유지하던 커플링을 깨고, 다른 여성 파일럿을 데리고 오는 건 불가능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덕분에 리엔의 한숨이 짙어지고 있는 가운데, 네토루는 자기와 관계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태평했다.
그럴 수밖에. 사실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보면 네토루에게 크게 나쁜 일이 아니었다.
커플링 파트너가 없다는 건, 곧 출격을 할 수 없다는 소리였고, 그러면 동시에 굳이 위험하게 버그들과 싸울 필요도 없으니.
그런 점에서 여기서 제일 곤란한 건 부대의 사령관인 리엔 프러스트였다.
사령관인 그녀 입장에선, 커플링 파트너가 없다는 이유로 귀중한 전력을 그냥 방치하게 되는 상황이니까.
* * *
결국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고 리엔은 네토루를 돌려보냈다. 그리고는 혼자 고민에 잠겼다.
네토루의 커플링을 비롯해 카렌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오늘 네토루와 커플링을 했던 카렌에게는 엄연히 커플링 파트너가 버젓이 존재하는 상태였다.
다만 그녀의 파트너는 지금 지난 전투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반년에 걸친 장기간 치료가 필요하다는 게 문제라는 것인데….
한두 달도 아니고 반년이다. 그 시간 동안 카렌을 부대 안에 계속 대기만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리엔은 오늘 카렌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네토루와 한번 커플링을 해보라고.
‘…역시 한 번 더 해보라는 건 무리겠지.’
커플링이라는 건 아무리 사령관이라고 해도 선뜻 명령할만한 일이 아니다. 커플링이 파일럿에게 얼마나 많은 무리를 주는지 알고 있으니까.
리엔 프러스트가 알고 있는 커플링이란,
성기병을 움직이기 위한 남녀 간의 계약이다.
서로 파장이 맞지 않는 커플링 파트너는 있으나 마나다. 보통의 경우 성기병을 움직이지도 못하며,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제대로 된 힘을 낼 수가 없다.
최악의 경우 서로에게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커플링 파트너를 고르는 건 신중해야 했다. 파장이 맞지 않는 파트너와 커플링을 한다는 건 버그들과의 전투에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으니.
정상적인 파일럿이라면 호흡이 맞지 않는 파트너와 짝을 맺어 싸우고 싶어 하지는 않을 터.
그런 점에서 네토루, 그 사내는 여러 의미로 이상한 존재였다.
─커플링 파트너는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전입 왔던 첫날에 그는 분명 그렇게 말했고,
실제로 그는 오늘 처음 만난 카렌과 커플링을 성공했다.
“설마 그 소문이 진짜일 줄이야….”
처음에는 네토루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문은 진짜였다. 당장 오늘 있었던 전투에서 그의 능력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처음 만난 사람끼리 단번에 커플링을 한 것도 놀라운데, 그 정도까지 카렌의 힘을 끌어낼 수 있다니.
물론 간혹 있기는 하다.
이상할 정도로 서로의 커플링 파장이 잘 맞아서 첫날부터 커플링이 잘 되는 남녀가.
하지만 그건 정말로 희귀한 케이스였고,
누가 봐도 네토루와 카렌에게 해당되는 경우가 아니었다.
그 증거로 카렌이 기지에 복귀하자마자 네토루의 뺨을 때렸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커플링 파장이 잘 맞는 사람끼리 그런 분열이 있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면 역시 소문대로 정말 네토루, 그 사내에게는 특수한 능력이 있는 걸까. 그 어떤 여성 파일럿하고도 커플링 할 수 있는 힘이….
“…리엔. 뭔 생각을 그렇게 해?”
바로 앞에서 들려오는 친숙한 목소리에 생각에 잠겨 있던 리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웬 새하얀 가운을 입고 있는 갈색 머리카락 여인이 보였다. 부대 내에서 성기병의 정비를 담당하는 정비 마법사 아스나였다.
“혹시, 방금 방에서 나간 네토루 때문이야?”
“…글쎄.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흐음….”
아무래도 아스나는 오는 길에 네토루와 마주친 듯하다. 눈썹을 살짝 들썩이며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엔. 꼭 저 녀석을 우리 부대에 데리고 왔어야 했어?”
정비반을 총괄하는 아스나는 네토루라는 이름의 사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소문도 소문이고, 특유의 건방진 태도 때문이었다.
당장 사령관인 리엔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렇다. 그 어떤 군인이 사령관 앞에서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가. 그야말로 양아치 같은 녀석이었다.
아스나의 뚜렷한 불쾌감에 리엔은 표정을 흐렸다.
“아스나. 너도 알잖아. 제39구역의 상황이 얼마나 안 좋은지. 우리에게는 여유가 없어.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이라면 최대한 끌어 써야 하는 상황이지.”
“…그건 아는데. 하필 저런 양아치 놈을 불러와야 할 정도야? 저 녀석은 귀족 놈들도 학을 떼고 내친 놈이잖아.”
네토루가 뛰어난 실력과 특수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다른 부대들에게 내쳐진 건 전부가 이유가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실력은 확실하니까.”
“……”
리엔의 대답에 아스나는 입을 오물거렸다. 하지만 끝내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할 말은 많지만 리엔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부대에 실력 좋은 파일럿이 있으면 분명 다른 부대원의 생존율이 눈에 띄게 올라갈 것이다. 제39구역의 상황을 생각하면 피해는 최소화해야 했다.
비록 그것이 양아치 같은 남자의 손을 빌려야 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하아. 그래, 어쨌든 이건 네 판단이니까.”
아스나는 낮은 한숨을 쉬며 손에 쥐고 있던 걸 리엔에게 내밀었다. 오늘 있었던 전투에서 네토루와 카렌의 커플링 정보가 담긴 서류였다.
“네가 부탁한 대로 커플링 파장의 기록이 담긴 보고서야.”
“그래, 고마워.”
리엔은 그 자리에서 바로 아스나의 보고서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
예상 이상으로 두 사람의 커플링 파장이 전혀 일치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즉, 두 사람의 커플링은 최악이라는 소리였다.
* * *
언제부터였을까. 뭣도 모르던 녀석이 자연스럽게 성기병을 타고 버그들과 싸우게 된 것은.
솔직히 말해서 성기병을 타고 버그들과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자그마한 실수가 곧 죽음과 직결된다. 그렇기에 그는 초기에 많은 고민을 했다.
과연 이대로 계속 성기병 파일럿으로 살아가는 게 옳은가.
모니터 너머로 보던 애니메이션이 현실이 된 전장은 지옥과도 같았다. 피와 살육이 넘쳐흐르는 전쟁터에서는 매일 같이 죽음이 넘쳐 흘렀다.
그런 곳에서 살다 보면 계속 고민하게 된다.
차라리 부대 뒤편에 있는 도시 안에서 평범한 시민들 처럼 보호받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확실히 누가 보더라도 괴물들과 싸우는 것보다는 뒤편에서 보호받는 게 편한 일이다. 그냥 모든 걸 떠넘기면 되니.
하지만 어느 순간 네토루는 깨달았다.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히려 싸워야 한다고.
그는 프랑기아의 군대의 무능으로 버그들에게 학살당하는 무고한 시민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았다. 괴물들에게 저항할 힘도 없이 죽어 나가는 그들을 보면 한 가지 확신에 이르게 된다.
결국,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걸.
믿어야 할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다.
어쭙잖게 다른 이들에게 보호받다가 어느 날 갑자기 버그들에게 학살당하는 것보다는,
전선 위에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삶을 결정하는 게 낫다.
“…몇 번을 봐도 낡아빠진 부대군.”
어느새인가 석양이 지며 불그스름한 빛깔이 부대 내부를 색칠하고 있었다. 네토루는 부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현재 그가 있는 부대는 폐허가 된 도시 안쪽에 모양새만 갖춘 곳이었다. 제대로 된 방어 시설 하나 없는, 어설픔이 눈에 거슬릴 정도였다.
제39구역에 존재하는 다른 부대도 설마 이런 꼴인 걸까? 다른 전선에 있던 네토루가 보기에 이곳은 마치 패잔병들의 모임 같았다.
지난 1주일간 지겹게 보았던 부대 풍경을 구경하며 그렇게 방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문득 네토루의 시선을 끄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저 녀석은.”
다 녹슬어가는 농구대를 가져와 공터 안에 마련한 조잡한 농구장. 그곳에서 지금 누군가가 농구공을 튕기며 놀고 있었다.
잘 보니 갈색 머리카락을 트윈테일로 묶고 있는 조그마한 소녀였다. 다리에 힘을 주며 소녀가 공을 들고 뛸 때마다 잘 묶인 머리카락이 흔들거렸다.
네토루는 잠시 걸음을 멈추어 그 소녀를 지켜보았다. 안 그래도 마침 흥미가 가는 존재였으니까.
여러 전장을 거쳐왔지만, 실제로 보는 건 그도 처음이었다.
보통 커플링은 서로 성별이 다른 남녀가 하길 마련이다.
하지만 간혹 예외가 몇 가지 존재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였다.
‘다른 녀석은 어디에 간 거지?’
소문을 듣자하니 항상 붙어다닐 정도로 사이가 좋다고 들었는데, 왜 혼자서 공을 튀기고 있는 걸까.
그러한 의문이 들던 찰나였다.
“음흉한 누렁이. 지금 변태처럼 몰래 뭘 그렇게 훔쳐보고 있는 거야?”
그때였다.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낭랑하면서도 건방진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났다.
난생 처음 듣는 괴이한 명칭에 네토루는 미간을 찌푸리고는 등을 돌렸다.
'...이 녀석은?'
그러자 방금까지 농구장에 있었던 소녀가 바로 뒤에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농구장에 있는 소녀와 닮은 무언가라고 해야 하나.
똑같은 외모, 똑같은 체격, 똑같은 머리스타일.
누가 언니고, 동생인지 모르겠지만....
쌍둥이 자매 - 란과 린.
둘 중 하나가 현재 팔짱끼며 째릿 노려보고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6/12 사령관 캐릭터, 말투, 성격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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