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1화 〉 171화 (170/173)

〈 171화 〉 17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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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감정이 침체된다고. 조금씩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 같다고 말이죠.”

맞는 말이었다. 굳이 준현이 말해주지 않아도 루델은 얼핏 자신의 인간성이 사라져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수준으로 현격히 떨어져 나가는 인간의 존엄성. 때로는 도덕이라는 개념이 무뎌지는 순간까지 있었다. 이념의 세뇌는 그만큼 무서운 일이었다.

엘란코에 루델이 처음 들어왔을 때는 적어도 이런 조직이 아니었다. 세상을 향해 음해를 꾸민다거나 돈을 밝히는 집단이 아니었단 얘기다. 조금 특별하면서, 때로는 괴물이라고 불릴 수 있는 불쌍한 고아들을 모아놨다.

루델과 진은 같은 나이에, 같은 날짜에 엘란코에 들어왔다. 아주 어렸던 두 사람은 국적이 다르고 말도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의지했다. 소꿉친구라는 단어로는 표현이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는 가까웠다. 다른 남자 멤버들이 루델의 미모 때문에 몇 번이고 루델을 넘보다가도 포기한 이유는 진의 존재 때문이었다.

우선 진은 싸움을 무척이나 잘했다. 조직에 위협이 생기면 언제나 진이 혈혈단신으로 나서서 지켜냈다. 진의 무공은 단순히 무예의 수준이 아니라 예술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일대 다수에 특화된 그의 기술 덕택에 엘란코는 어떠한 무력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는 조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문제였다.

사람에게는 욕심이라는게 있고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그 끝이 없다.

진이라는 살인병기가 있고 권력이 생기자 엘란코의 수장이 된 케이머는 세상을 집어 삼킬 욕심을 세웠다. 다른 멤버들 몰래 과학자들을 만났고 능력자들과의 인맥을 넓혀나가면서 시장을 구축했다. 예전에는 봉사의 목적으로 치료를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자선사업을 하지 않았다.

케이머는 언제나 조직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멤버들을 세뇌시켰다. 아닌걸 알면서도 케이머의 말이 일리가 있었기에 진과 루델은 점차 뇌이징이 되어갔다.

진은 루델을 사랑했다. 루델도 진을 사랑했다. 그런데 정작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적이 없었다. 진은 연애쪽 방면으로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었고 루델은 진의 현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진을 보채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 건물에 살았다. 그래서 밤만 되면 창문을 열고 서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만큼 두 사람은 친했고 가까웠고 여전히 서로 의지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하나가 마음을 고백하면 서로 빠져들게 되는건 한 순간이었을 터, 서로에게 존속되고 서로를 위해 살게되는건 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루델의 몸이 점차 성숙해짐에 따라 조금씩 참기 어려운 경지까지 오르고 있었다는 거다. 루델의 몸은 남자를 갈구하고 있었다.

사실 케이머가 지금부터 엘란코의 작전이 개시된다고 알렸을 때, 진은 고백을 마음 먹었다.

그래서 바로 어제. 오늘 준현과 루델이 얘기를 나누기 불과 12시간 전에 진은 고백을 하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어김없이 반대쪽에서는 루델이 창문을 열었고 베시시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진!”

“루델.”

“오늘 하루도 잘 보냈어?”

그들에게는 이런 시시한 인사말조차도 반갑고 새로웠다. 서로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설레 죽겠는데 고백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쿵쾅되고 미쳐버리겠는 거다.

진은 싸움을 잘했지만, 마음만큼은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여태 일반인의 삶을 살아본적이 없었기에 그의 소년같은 반응은 참 단조로웠다.

“아, 응.”

“키킥. 나는 얼추 짐을 다 싸고 있어. 한달 있으면 중국으로 간다잖아. 어때, 진? 설레지 않아? 중국이라니.”

“음... 설렌다? 잘 모르겠네.”

사실 진의 마음은 복잡했다. 그리고 그건 결과를 알고 있는 루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을 멸망 직전까지 가져갈 계획이다. 감히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면서 베시시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성에 문제가 있어 보일 수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것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많은 이들이 죽을 것이며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가던 삶과 일거수일투족이 바뀌게 된다.

그래서 진은 무서웠다. 하지만 그 무서움을 루델과 함께라면 이겨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참... 진은 자기 마음에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알면서 놀리려는 소리였다. 아니, 루델도 사실 진이 오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거다. 준비하라는 일말의 말조차 없었기에 이런 분위기가 낯설었다. 그래서 자기도 하고싶은 말 뱉으면서 얼버무렸던 거다. 모르는 척. 이 분위기를 전혀 납득할 수 없는 것처럼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이 루델의 몸은 이미 달아오를 데로 달아오른 상태였다. 심지어 루델은 새로 들어온 신입인 준현에게 극적으로 관심이 생기면서 새로운 가능성도 염려해둔 상태였다. 어쩌면 신입이 현재 루델의 정신적 부재를 치료해줄 수 있지 않을까. 육체의 나지막한 몸부림을 잠재워줄 수 있지나 않을까. 치료. 결국 루델이 원하는건 치료였다. 남성의 묵직하면서도 뜨거운 손길이 그리울 나이가 찼던 것이다.

‘만약 진이 고백을 하면... 내일이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만큼 미친 듯이 섹스를 하고 싶어.’

루델은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다. 진이 고백을 하는 어느 시점에서든 그토록 갈망했던 섹스를 정말이지 마음놓고 맘껏 하겠다고 말이다.

이왕이면 진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제일 의지하는 사람이 다름아닌 진이었으니까. 때로는 냉혈한처럼 보이지만, 루델에게만큼은 항상 따뜻했다. 루델은 진의 그런 점도 높게 봤다. 너무 좋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알고보면 루델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게 아닌가 하면서 스스로를 단정 짓기도 했다.

“루델.”

“응?”

“저... 그... 있잖아.”

진은 떼 묻지 않은 고백을 시도했다. 루델도 이때부터는 왼쪽 가슴이 너무 심하게 쿵쾅거리는 탓에 골이 울리는 느낌을 받았다.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기 일보직전이랄까. 설렘 가득한 심정으로 진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게 있잖아... 우리...”

“우리..?”

눈매가 이미 달달하게 피어오른 루델은 진의 말을 메아리처럼 따라 불렀다.

그런데 막상 진에게서 나온 소리는 엉뚱한 소리였다.

“도망갈까?”

“뭐?”

“도망... 이 조직을 벗어날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조직을 떠나게 되면 우리도 바이러스의 노예가 되는 거야. 잊었어?”

백신제조를 케이머만 알고 있는 이상 이 조직을 떠나려면 이 조직을 고발하고 나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목에 칼을 겨누는 것과 같았다.

특히 케이머의 성격이었으면 이 진과 루델 두 사람을 끝장내고도 남았을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케이머는 진이 보는 앞에서 몇 번이고 루델을 강간했을 거다. 케이머는 지금까지 루델에게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본적이 없었다. 그녀를 여자로 생각해본적도 없을 정도로 케이머는 미친 새끼였다. 하기사 케이머가 마음만 먹으면 유럽에 있는 내로라하는 미녀들을 죄다 따먹을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도 케이머는 병실에 찾아온 여자 중에 역대급으로 예쁜 여자를 따먹는 중이었다. 치료를 목적으로 엉덩이를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면서 마음껏 따먹는게 케이머의 유일한 낙이었다.

아무튼 이 조직에게서 도망가는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래서 루델은 더 실망스러운 얼굴로 진을 바라봤다. 설마 저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인거냐면서 말이다.

“아... 사실 그게 아니고...”

“그래. 얘기해봐, 진. 나는 다 들어줄 수 있어. 여길 도망가겠다는 얘기만 아니면 된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도망간다는 건 말도 안 되지. 하하...”

‘그러니까 얼른 네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라니까!’

루델은 이제 슬슬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진이 아무리 좋지만 이런 모습은 감점요소였다.

그리고 사실 진은 이런 생각이었다. 고백이 주저되는 이유는 당연히 이 조직생활 때문이었다. 만약 고백을 했다가 잘못되면 다시는 루델을 볼 자신이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혹여나 루델이 다른 남자와 만나는걸 본다면? 여자라곤 루델만 바라봤던 순애보의 진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오히려 더욱 빨리 고백을 해야했다. 그런데 진은 결국 망설이다가 포기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순간의 자신이 너무나 역겨웠고 참기 힘들었다.

“널 좋... 아, 아니다...”

“뭐..?”

실망감에 빠져든 루델은 결국 눈을 내리 깔았다. 아닌건가. 역시 진의 마음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았던걸까. 실망감이 확 밀려들어오면서 슬픔이 커졌다. 그런데 슬픔이 커지는만큼 몸이 더욱 달아오르는건 호르몬 작용 탓이었다. 당연한 인간 신체의 알고리즘 하나에도 루델은 화가 치솟았다.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건가. 왜 이 상황에서도 자신은 남성성을 그토록 찾아 헤매는가.

루델의 나이는 이제 26살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섹스나 자위행위도 해본적이 없는 그녀였다. 그 동안 유체이탈을 시켜줬던 많은 여성들을 치료해주면서 섹스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정말 소문만 무성한 섹스라는 단어는 어찌보면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전설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루델과 거리가 멀었다. 그도 그럴것이 이런 조직생활을 하는데다가 주변에 진이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작 자기가 쉽사리 다리를 벌릴 수 있는 진은 저렇게 뻘짓을 하고 있다는게 문제였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루델은 준현의 정신적 치료를 받으면서 마음의 다리를 조금씩 벌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만약 어제 진이 고백을 했다면 준현과의 이런 상황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터.

루델은 준현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대신 말했다.

“우리 집으로 갈까?”

“예?”

준현은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퇴근시간이 지났고 집에 가는게 전혀 이상하진 않았으나 이 자리에서 일이 벌어졌으면 벌어졌지 루델의 집까지 갈 생각은 없었던 거다.

“술이나 한잔 할까 하는데. 왜, 싫어?”

하지만 모든 자리의 만병통치약 수준의 해결책은 역시 술이었다. 술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자 준현도 편안한 마음으로 제안을 수락할 수 있었다.

‘진... 나 이 남자랑 섹스를 하게 될 거야. 첫경험이지. 내 첫경험은 너에게 주고 싶었어. 그리고 영원히 네 여자로 살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너무 늦었어. 나도 이제 슬슬 지쳐. 그래서 난 오늘 이 남자를 선택하기로 결정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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