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70화 〉 170화 (169/173)

〈 170화 〉 1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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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이라는 말에 엘란코의 멤버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자 맡은 범위에서 사람들을 포섭했고 며칠 후에는 중국으로 이동할 거라는 얘기가 있었다.

나는 다급해졌고 가능하면 소민이와 접촉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아직 기억이 전부 돌아온게 아니었기에 소민이와 나 사이의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는게 문제였다. 대충 아이들의 미래를 통해 소민이를 우리편으로 끌어들여야만 한다는 것 정도밖에는 모르는 거다. 그랬기에 난이도는 최상. 혹여나 그녀의 미래를 들여다볼 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내 추종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다. 다른 엘란코들의 보는 눈이 있었기 때문에 딱 정해진대로만 행동했다.

그러다 어느날 루델이 내 감시를 맡았고 내가 담당했던 사람의 치료를 끝내자 그녀가 넌지시 내게 호기심을 표현했다. 루델은 의자에 거꾸로 앉아 있었는데 사타구니를 가리고 다리를 벌린 자세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궁금한데.”

“..?”

루델은 곧잘 한국말로 내게 말을 걸어온적이 있었다. 심지어 나 때문에 한국말을 공부할 정도로 나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신입이 들어올때마다 그 사람의 모국어를 공부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언어능력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는 루델이었다.

루델은 언어능력이 뛰어난만큼 지적인 비주얼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진짜 의사로 생각될 정도로 인텔리하면서도 샤프하고 도도한 스타일. 항상 긴머리를 꽁지로 묶었고 대충 묶은 탓에 삐죽삐죽 삐져나온 머리카락들이 묘하게 터프하게 느껴졌다. 옆에서 보면 오똑한 코와 딱 떨어지는 턱선 때문에 좀처럼 다가가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지만 상대방의 언어를 공부할 정도로 배려가 있고 따뜻한 여자였다.

“어떤 방법으로 사람들을 치료하는지. 몇 번을 봐도 참 신기해서. 진처럼 혈을 짚는건가.”

“... 비슷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그러니까 더 궁금하거든. 가끔 보면 진이 치료할 수 없는 부분들도 치료를 한단 말이지. 이를테면 정신적인 부분. 그건 대체 어떻게 해결하는건데? 뇌에도 혈이 있나? 근데 머리는 한 번도 만지지 않는단 말이지.”

당황스러워졌다.

사실 이 능력을 깨우친건 얼마 되지 않았다. 기억을 되짚었다기보다는 몸이 기억하고 있는 수준에서 떠올린 노하우들이었고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없는 이론들이 전류를 타고 발현된다는 느낌이었다.

내가 대답이 없자 루델은 내 팔을 만졌다.

“정신치료는 원래 내 계통이어서 잘 알고 있거든 설마 그 혀로 정신을 치료하는건 아닐테고. 분명 뭔가 있는데.”

나는 계속되는 질문에 어쩔 수 없이 반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신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응?”

“정신을 치료한다고 생각하면 어렵지만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공감을 통해 해결할 수 있죠. 사실 ‘은사’는 그렇게 중요한 기술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각자만의 힘이 있는데 그걸 사용하지 않을 뿐이죠.”

“... 뭔 소리람...”

“정신을 치료하는 루델 씨도 병을 앓고 있잖아요?”

“내, 내가?”

“예. 루델 씨가 힘들어하고 있으니 루델 씨도 병을 앓고 있는 거죠. 어때요, 루델 씨도 저한테 한번 치료 받아보시겠어요?”

“크큭... 유체이탈 시켜서 다시는 그 영혼이 몸에 들어오지 않게 하기 전에 도 넘는 짓은 하지마.”

“도 넘는 짓이 아닙니다. 항상 보면서 느껴요. 다른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고 다시 집어넣는 식의 치료를 한다는건 얼마나 스트레스 받는 일일까 하고요.”

“...”

루델은 내 말을 듣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땅을 쳐다보다가 잠시 나를 쳐다보기도 하고 다시 땅을 쳐다봤다가 하늘을 올려다보기도 했다. 중간중간에 한숨을 쉬기도 했다.

“아, 열받아.”

이건 불어로 얘기했지만, 나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화가 났을까? 그렇지는 않아보인다. 오히려 내 쪽을 향해 미소를 띄기도 하면서 친근하게 대응했다.

“이상한 말을 하네.”

“사람을 관찰하는게 제 취미라서요. 그리고 누군가를 돕는 것. 아무래도 제 능력은 그쪽에 특화된게 아닐까 싶어요.”

“날 돕고 싶은 거야? 왜지?”

“함께 지낸 시간도 이쯤되면 오래되기도 했고 뭣보다 절 구해주셨잖아요?”

“그치... 잘못하면 그 잘난 이마에 구멍이 날 뻔했지.”

“그리고 가끔씩 절 보시잖아요?”

“누, 누가? 내가? 나는 그냥 호기심이 생길 뿐이야. 모든 신입생들한테 다 그렇지.”

“하하. 그래요. 근데 왜 그렇게 질색을 하고 그래요?”

“아. 아니야. 너가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아무튼. 봐드려요, 말아요?”

루델은 잠깐 내 발끝부터 머리까지를 훑었다. 그리곤 입술을 쭉 내밀고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해보던지 말던지.”

아까 내 팔뚝을 서스럼없이 만졌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내가 손가락을 허공으로 향한 채 휘휘 젓자 그녀는 거꾸로 앉아있던 자세를 풀고 의자에 정자세로 앉았다. 나는 그녀의 앞으로 가서 섰다. 요망한 루델은 가슴이 푹 파인 옷을 입고 있었다. 신체 스펙이 뛰어나다보니 가느다란 허리 위에 어울리지 않는 풍만한 젖가슴이 드러났다. 요망하다. 요망해. 어쩐지 오늘따라 더 요망해 보였다. 작정을 하고 내게 접근한게 아닐까 싶었다.

“혹여나 허튼 짓하면 바로 영혼을 빼버린다.”

농담으로 내뱉기는 너무도 위험하고 무서운 소리였다. 나는 가볍게 무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몸을 스캔하면서 보라색점을 찾았다.

사실 정신적인 치료에는 보라색점만한 게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미뤄봤을 때, 보라색점은 사람의 약점을 뜻하니까. 그러니까 보라색점을 추적해보면 그 사람의 무의식에 잠재된 스트레스를 찾아낼 수 있는 거다. 물론 이것도 내 잠재된 기억속에서 꺼내 온 노하우였다. 젠장, 누군가 내 보라색점을 찾아서 없애줬으면 좋겠다.

루델의 보라색점은 이미 어딨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찾는건 다른 점이었다. 훨씬 커다랗고 딱딱하게 굳은 반점이 있지 않을까했던 거다. 그런데 찾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숨어있는 그녀의 보라색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밑가슴 아래쪽으로 깊숙이 박혀있는 반점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심장쪽인 듯하다.

‘심장이면... 위험한거 아니야..?’

“어, 어딜 그렇게 빤히 보는 거야?”

내가 젖가슴 밑을 뚫어져라 보고있자 루델이 얼굴을 붉게 물들면서 몸을 뒤로 빼내는 시늉을 했다. 물론 의자 등받이 때문에 몸은 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추리를 하기 시작했다. 심장 기능에 이상이 있다면 푸른색 반점이 맺혔을 것이다. 혹은 흉부에 압박이 심하거나 혈압이 높다면 붉은색 반점이 있을 터. 이 정도는 기억을 되살리지 않더라도 유추를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그런데 루델의 몸에 순식간에 분홍색 반점들이 꽃 피우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설마...

내 정보에 따르면 루델은 지금... 달아오르고 있는 거다. 섹스를 위한 몸부림. 나에 대한 육체적 관계의 갈망. 참... 이상한 여자였다. 나도 엘란코에 들어온 순간부터 성욕을 풀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루델은 참 매력적인 여자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내 몸도 똑같은 반응을 일으켰다. 이전까지는 보이지 않았고 찾아볼 생각도 안 했던 내 몸의 반점들이 보이기 시작한건 그때부터였다. 너무도 확실하게 내가 발기됐다는걸 인지한 순간 몸에 분홍색 반점이 생겨버리니까 나밖에 보이지 않는 반점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졌다.

‘아니. 일단 치료부터 해야지. 루델을 위해 치료해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으니까.’

엘란코에서 그나마 정이 생기는 사람은 당연히 루델밖에 없었다. 나머지 남자 멤버들은 죄다 사이코들이었다. 진은 무술을 기반으로 치료를 하는 녀석이라서 싸움을 잘했고 그 사실을 이용해서 무력으로 권력을 잡으려는 본능이 있었고 케이머는 애초에 날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남자였다. 나머지 멤버와는 교류조차 없었고 나한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건 루델 뿐이었다.

‘보라색반점이 심장에 있다. 이게 말하는 바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내가 생각하는 도달점이 거짓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다른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내가 생각하고 싶은대로 생각한게 아닐까 했던 거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 하나로밖에 귀결되지 않았다.

‘루델은 정말 정신적으로 앓고 있는 거야... 심장이 없는 양철로봇처럼 감정이라는 단어를 잃어가고 있는 거다...’

“루델 씨.”

“네?”

“당신은 몇 살 때부터 이 일을 시작했어요?”

내가 불어로 얘기를 하자 루델은 놀라서 흠칫했고 그 모습이 얼마나 컸던지 눈에 띌 정도였다.

“불어를 할줄 아는 거야?”

지금까지 몇 차례 내가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불어를 썼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에 루델은 깜짝 놀라서 허둥댔다.

그녀가 한국말을 공부하고 있는걸 알게 된 이상, 나도 불어를 공부했다. 그 몇 개월의 기간 동안 나 역시 넋놓고 있었던건 아니었으니까.

“나...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케이머와 함께 누군가에게서 길러졌다고 들었어. 엘란코라는 남자... 그 남자가 이 조직을 만들었어. 나에게 강령술을 알려준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이지.”

‘그렇다면 확실해졌다. 자기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만난게 아니라 줄곧 엘란코라는 조직에 몸을 담아왔던 거야.’

“엘란코... 당신의 아버지는 지금 어디 있어요?”

“죽었어.”

“... 미안합니다.”

“아니, 미안할거 없어. 그닥 좋아하지는 않았으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건 다 그 사람 때문이기도 하지. 내가 선택한 결과물은 아니라고.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렇다고 우리 조직의 목표를 와해할 생각은 없어.”

“그럼 조직의 목표는 엘란코라는 사람이 지금의 엘란코가 갖고있는 목표를 설정한 겁니까?”

“... 그건 아니야. 근데 이게 내 치료랑 무슨 상관이지? 지금 나한테 허튼 수를 쓰고 있는 거...”

“아닙니다. 치료를 하고 있는 거예요. 나는 당신의 정신병과 이 조직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 엘란코의 상관관계를 알아야겠습니다.”

“... 나... 많이 아픈거야?”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반점의 위치가 심장이나 뇌에 위치했던 사람 중에서 심각하지 않았던 사람이 없었다. 루델의 상태는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상태가 아닐까 싶었다. 사람으로 재차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얘기였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당신의 상태를 알고 있어요. 그렇죠?”

루델은 내가 무슨 말을 하냐고 묻기라도 하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그녀가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대답해줬다.

“조금씩 감정이 침체된다고. 조금씩 사람이 아니게 되는 것 같다고 말이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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