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 168화
* * *
확실한 건 지금 다니엘과 그레이스가 실종된 상태라는 거다. 그리고 이 상태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두 사람 다 죽게 될 운명이다.
그랬기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서 곧바로 매장으로 출근했다.
첫 번째로 만난 여자는 진아영이라는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그녀는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반겼다.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듯했다.
“보고드릴게 있습니다.”
“네, 말씀해주세요.”
“지난번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사장님을 찾았거든요.”
“어떤 사람들..?”
“꽤 많았어요. 대여섯명이 몰려와서 사장님 찾는다고 하니까 너무 무섭잖아요. 그래서 일단 안 계신다고만 했어요. 근데도 빨리 사장 불러오라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통에 밖에 있던 한서연 씨도 들어와서 사장님 안 계시니까 자기한테 얘기하라고 하면서 어떻게든 달랬죠. 안에서 손님들 다 놀랬어요.”
“큰일이었겠네.”
“네, 진짜요! 저도 진짜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어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사장님한테 연락해야 하나. 근데 다행히 그냥 물러가더라고요.”
“그래요... 뭐 건네주고 간 것도 없습니까?”
“아! 있어요. 여기 명함이예요.”
진아영은 검은 옷을 입은 사내의 명함을 내게 내밀었다. 명함에는 진이라는 한문이 적혀 있었는데 전화번호는 딱히 없었다. 그래서 명함을 뒤집어봤더니 주소가 적혀 있었다.
“번호가 없더라고요. 주소만 달랑 하나 적혀 있고. 근데 또 웃기는게 분명 그 사람들 외국인이었는데 주소는 또 우리나라 말로 적혀 있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지금 당장 갈 준비를 해야겠어요.”
“가, 가다뇨? 뭘 어쩌시려고? 설마 그 사람들 만나러 가게요? 아시는 분들이예요?”
“아는 사람들... 아닙니다. 전혀 몰라요.”
“그럼 뭘 어떻게...”
나는 밤을 새면서 생각했다. 내가 봤던 미래들을 종합했을 때 내가 해야할 건 무엇인지. 나는 우선 두 사람의 죽음을 막아야 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를 가족처럼 맞아줬던 두 사람의 죽음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냥 넘어가는건 도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목숨과 맞바꾸려는건 절대 아니었다.
나는 빠르게 집에 돌아갔고, 그 동안 여러 가지 경우의 수와 내 능력을 생각하면서 해결책 몇 가지를 세워놨다.
‘결코 쉽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진아영의 걱정을 대변해주듯 하늘에서는 비가 내렸다. 나는 그 비를 뚫고 명함에 적혀있는 주소가 있는 곳으로 운전해 갔다. 일행은 없었다. 혼자 오라는 소리는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싶지 않았다.
치요를 일본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서아와 유영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연두에게 어려운 부탁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레이스나 다니엘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다니엘의 말에 따르면 미래는 바뀌었다. 그렇다면 내 힘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얘기도 될 거다. 구소민이라는 여자의 존재. 그리고 검은옷의 남자가 서아에게 했던 말들...
‘내 계획이 통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나.’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하며 해당 주소지에 도착했다.
시골의 어느 한적한 공간. 비포장도로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타이어는 모래와 돌을 밟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다 어느 집 앞에서 멈춰 섰다. 아니, 집이라기엔 너무 허름했고 오히려 컨테이너에 가까운 비주얼의 건물이었다. 건물의 옆에는 자판기 따위가 있었고 예전에는 물이 나왔을만한 수도꼭지가 있었다.
‘체육관인가..?’
그럼 주변에 학교가 있다는 얘기도 됐다. 하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는 학교인 듯.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차창 너머를 넌지시 봤다. 아무리 관찰을 해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 시간에는 검은옷을 입은 사람들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우산을 폈고 그나마 불을 밝혀주는 가로등은 목이 비틀어지고 깨져 있었기에 휴대폰 손전등을 비춰야만 했다.
으슥하기도 하고 주변에 소음이 없어서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서 건물 안을 들여다봤다. 혹시라도 여기에 다니엘과 그레이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서.
건물 안은 오랫동안 쌓인 먼지와 거미줄과 곰팡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나는 각도를 조절해가며 건물 안을 천천히 살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지금까지 봤던 광경들을 어색하게 만드는 무언가를 발견한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아나는게 느껴졌다. 누가 봐도 사람의 다리처럼 느껴지는 형체가 검은 그림자 사이에 드러났던 거다.
문제는 갑자기 손전등이 꺼져버렸다는 것. 어제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휴대폰을 충전하지도 않고 잠이 들었나보다.
그래도 다행히 보조 배터리를 가져왔으니 배터리 잭만 끼우면 된다. 나는 주머니에서 보조 배터리를 꺼냈다. 그리고 잭을 찾아서 꽂으려고 라이터를 켜는 순간.
“강준현 씨?”
“헉!”
검은옷을 입은 남자가 내 쪽으로 얼굴을 불쑥 집어넣었다.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기 때문에 뒷걸음질을 세 차례치면서 뒤로 자빠져버렸다.
“얼빠진 얼굴을 보니까 기억이 다 돌아오지는 않은 모양이군요. 이런걸 보면 그 여자의 능력이 참 출중하단 말이야.”
나는 창백해진 얼굴을 맨손으로 씻어내리면서 남자를 재차 관찰했다.
그는 커다란 키에 노란 장발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그림자 속에서 전혀 알아볼 수 없을만큼 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그에 반해 얼굴과 머리카락색은 너무도 환해서 공중에 밝은 색이 떠 있다고 느껴졌다. 흡사 몸이 없이 얼굴만 떠 있는 악마의 형상.
나는 겁을 삼키고 끝끝내 상대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누구야?”
“나요? 아니면 우리요?”
검은옷을 입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뒤쪽에서 몇 개의 인기척이 더 느껴졌다. 고장났다고 생각한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면서 그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옷 색깔과 똑같은 검은머리도 있었고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똑같이 노란머리를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여자도 섞여 있었는데 두 여자 중에 하나는 구소민일 거라는게 내 생각이었다.
“...”
내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검은옷을 입은 남자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렇게 혼자서 찾아올줄은 몰랐는데... 무슨 생각으로 찾아왔는지는 알겠네요. 두 사람을 구하기 위해 온 거라면 잘 찾아왔습니다. 애초에 우리의 목적은 그들이 아니라 ‘당신’ 이었으니까. 하긴... 찾아오지 않아도 변하는건 없었으려나. 언젠가 우리는 만날 운명이었을 테니.”
나는 내가 해야할 말을 다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내용 안에 내 목적이 들어 있었다. 나는 노란머리의 남자가 더 이상 너스레를 떨지 않게 하기 위해 말했다.
“빨리 이제 두 사람을 놓아주세요.”
“그래요. 그러겠습니다.”
나는 오히려 너무 빠르게 승낙을 받아내어 놀라고 말았다.
“인질의 역할은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됩니다. 그러니 여기서 시간을 질질 끌어봐야 소용이 없는 거죠. 진! 두 사람을 보내주세요.”
“두 사람은 살아있겠죠?”
“물론입니다. 우리가 무슨 살인자나 조직 폭력배, 깡패 정도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내가 그들이 했던걸 봤는데 저런 말은 정말이지 능글맞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레이스의 하얗다 못해 창백해진 얼굴을 봤다. 하지만 여기서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내가 본 미래의 환상을 이 사람들한테 까발릴 이유는 없었던 거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덜컥거리며 자물쇠를 열고 건물 안에서 두 사람을 끌고 온 진이라는 남자를 천천히 곁눈질로 뜯어보면서 두 사람이 차에 올라타는 것 까지 다 보고나서야 남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안전하다는걸 어떻게 확인할 수 있죠?”
“안전하다... 안전하다는 말의 정의는 무엇인가요? 이제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심지어 미국으로 망명을 해도 목숨이 위태로운 실정이예요.”
“말장난 하지말고.”
“푸핫!”
나름대로 대담하게 대꾸한건데 바로 비웃음을 듣고 말았다.
“이봐요, 강준현 씨...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 게임은 우리가 이겼습니다. 당신이 이곳에 온 순간... 이 게임은 그쪽이 이길 가능성을 완전히 빼앗긴 거예요. 악수 중에서도 최악!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당신을 데려오는 것만으로도 다른 모든걸 내줘도 될 정도였어요! 심지어 당신은 당신의 위성처럼 당신을 지켜주는 사람 하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죠. 그냥 걸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예요. 자, 그럼 이제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대체. 왜. 이곳에 온 겁니까? 미쳤습니까?”
나는 숨을 몰아쉬고 말했다.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서.”
“응?”
“나는 알게 모르게 다니엘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없는 미래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을 살릴 길을 생각해서 결국 여기까지 홀로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생각을 완전히 바꿨어요.”
“무슨 생각을 하기로 하셨습니까? 어떤 미친 생각이 강준현 씨를 이곳으로 이끌었나요?”
노란머리의 남자는 정말 궁금해서 미치겠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 표정이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싫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내가 살아남아야만 했다.
“당신들의 편에 서겠습니다. 까짓거 해봅시다.”
“푸하하하! 뭘 해본다고?”
“일확천금을.”
그러자 노란머리의 남자가 씩하고 웃었다.
“그것 참 듣기 좋은 말이구나. 일확천금. 세상의 모든 돈을 모으자... 아주 달콤한 말이야.”
심장이 뛰었다. 누구나 이 달콤한 말에 현혹된다. 몇 억이 아니다. 몇 억으로 끝날 일이었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는 조 단위 이상의 돈을 모을 것이다. 나라 하나를 살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해질 것이고 모든 국가는 우리에게 머리를 조아릴 것이다.
“근데 그럴 순 없지.”
“..?”
“강준현 씨. 죽으세요.”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