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 155화
* * *
카피바라는 정말 거대한 쥐새끼였다.
실제로도 설치류에 속하는 동물이어서 쥐새끼‘같이’ 생긴게 아니라 정말 쥐새끼에 속했다.
‘귀여워. 귀엽긴한데... 근데 내가 이거랑 닮았다고..?’
온순하게 생겨서는 사람의 말을 참 잘 따르는 모양이다. 치요가 손을 뻗자 녀석도 수컷인지 품안으로 쏙 들어와서 뭉클거리며 젖가슴을 두드린다. 요망한 녀석. 하지만 녀석의 마음이 이해되기도 했다. 원래 동물이나 아기들이 더 순수한 마음으로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카피바라를 꼭 안고서 내쪽을 바라보는 치요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너무 귀엽잖아. 순간 카피바라의 귀여움을 치요가 전부 흡수한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자, 사진 찍어요.”
나는 아까 있었던 일은 접어두고 치요와 카피바라의 사진을 찍어줬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 사이, 주변에 있던 카피바라 무리들이 전부 치요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좀 무서워질 정도로 몰려들었는데도 치요는 너무도 행복한지 깔깔거리며 웃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안심했다. 열심히 찍사가 되어줘야지.
치요와 연애를 하면 정말 이런 기분일거 같다. 나는 예쁜 치요를 계속 관찰하고 사진 찍어서 내 폰에 저장해둘 거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만족스러울것만 같다.
그런데 내가 사진을 찍으면서 폰에 치요를 담아두고 있는 동안, 이전에 찍었던 사진을 확인하려고 사진첩에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라서 휴대폰을 놓칠 뻔했다.
내 얼굴이 굳어버렸다는걸 알았는지 치요가 걱정스레 다가와 물었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무것도...”
“내가 너무 못생겨서 깜짝 놀랐나?”
“에이, 그럴 리가. 치요 씨만큼 예쁜 사람이 어딨다고.”
“헤, 기분좋아. 근데 무슨 일일까? 혹시 기억이 되살아난거 아니에요?”
나는 손사래를 쳤고 치요는 다시 카피바라와 놀기 위해 저만치 멀어졌다. 우글우글대는 카피바라들이 다시 돌아온 치요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자기 얼굴을 만져달라고 재촉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나는 치요가 멀어진걸 확인하고 다시 사진첩에 들어갔다.
‘대체 이게 다... 뭐지...’
사진첩에는 내 기억에 존재하지 않은 여자들의 사진이 있었다. 심지어는 야한 사진도 있었고 섹스하는 장면을 촬영한 동영상까지 존재했다. 휴대폰을 들고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봐도 나다. 사진에 등장하는 인물은 나였다. 동영상 촬영도 옆에서 찍은게 있고 위에서 삽입부분을 찍은것도 있는데 성기의 크기나 모양새들을 살펴본 결과, 나라는게 확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충격적인건.
“김서아..?”
나도 모르게 서아의 이름을 입밖으로 말해버리고 말았다.
사진첩에는 서아가 나와 섹스를 하는 모습이 찍혀있었다. 후배위였는데 서아는 얼굴을 내쪽으로 돌렸고 잔뜩 흥분한 얼굴로 얼른 넣어달라고 재촉하듯 엉덩이를 손가락 두 개로 벌리고 있었다.
입안에 침이 고여서 얼른 삼켰다.
나랑 서아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니... 얼마나 꿈같은 일인가. 젠장. 이걸 빨리 알았다면... 알았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젠장. 문제는 서아보다도 더 예쁘고 몸매 좋은 여자들이 사진첩에 널렸다는 거다.
‘가만 있어봐. 그럼 설마..?’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부를 살폈다.
그곳에는 내가 태어나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여자들의 이름이 대거 등록되어 있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쭉 내려가는 목록에는 여자들의 이름이 향연처럼 이어졌고 총합 236명이나 되는 이름들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지금 내 머릿속에 기억나는 이름이 ‘절대복종 김서아’말고는 없었다. 그나저나 서아가 절대복종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학창시절에 자기 말만 할줄 아는 양아치같은 아이였던 서아. 나한테는 자기 어깨 안마를 시켜놓고 사귀는건 다른 남자랑 만났을 거다. 학창시절 때부터 엄청 예뻤다.
그 밖에도 ‘야들야들 연두부’ 라던지 ‘댕댕이 박유영’이라던지 ‘욕 박기 좋은 김유진’이라던지 ‘구세주 진아영’ 등등. 내 아랫도리를 자극하는 네이밍들이 속속들이 발견됐다.
그리고 부재중 전화가 69건에 확인하지 않은 문자가 999+. 확인해보니 다 그 여자들에게서 연락이 온 것들이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그 여자들을 다 씹은 건가. 그리고 내가 씹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나에게 계속 연락을 원하고 있다는 얘긴가.
어쩐지.
여자친구가 없을 수가 없지!
돈도 있겠다. 차도 있고 나름 성공한 스펙을 갖은 것 같은데 여자친구가 없으면 그게 말이 안된다.
나는 치요를 보면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내게 여자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 치요는 내 여자친구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 저장된 목록 중에 분명 내 여자친구가 있을 것이다.
나는 내 여자친구를 찾아야만 했다.
‘서아일까? 아니면 내 구세주라고 저장된 진아영이라는 사람일까? 보통 내 인생을 바꾼 사람과 사귀고서 그 여자를 구세주라고 저장하니까. 여자친구가 구세주인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 아니면 댕댕이 박유영이라던가. 내가 엄청 귀여워했던거 같은데. 설마 욕 박기 좋다는 김유진은 아니겠지...’
여자이름 외에도 여러 명의 남자들 이름도 있었는데 가볍게 무시해줬다.
어떤 남자가 지금도 나에게 문자를 계속 보내고 있지만, 읽어버리면 괜히 귀찮은 일이 생길거 같아서 확인하지 않은채 휴대폰을 치웠다.
그러면 지금 문제가 두 가지가 있다. 기억에서 잃어버린 내 여자친구를 빠르게 찾아야만 한다. 두 번째는 아까 봤던 환상이다. 치요가 등장했고 치요는 야한 동영상을 촬영하기 위해 수 많은 남자들에게 겁탈 당했다. 치요는 분명 그 일이 하기 싫었을게 분명하지만, 바깥을 확인했을 때는 분명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밖에서 죽어나가고 있었고 방독면을 쓰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수준이니 세상은 무법천지였다.
치요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내게 솔직하게 말 해줬다면 그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방독면을 쓴 사람들을 보아하니...
‘미래.’
아무리 생각해도 미래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그녀의 미래를 본 걸까. 그래서 내가 본 순간부터 치요의 이마에서 그 오색찬란했던 반점이 사라지고 없어진 걸까.
꺄르르
아무것도 모르는 치요는 카피바라들과 바닥에서 뒹굴면서 놀고 있었다. 그녀에게 닥칠 불우한 미래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물론 그걸 알고있는 건 나뿐이니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실을 치요에게 말해줘야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빠르게 나왔다.
‘아니지. 절대 말해선 안 된다. 일단 이게 사실인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괜히 말했다가 분위기만 안 좋아져. 근데 내가 미래를 볼 수 있다? 이것도 웃기잖아! 누가 내 말을 믿기나 하겠냐고! 나만 미친놈 되는 거다. 그래... 못본 걸로 하자. 못본 걸로...’
그게 최선이었다.
치요는 카피바라들과 실컷 놀았는지 종종 걸음으로 내게 달려와서 점프해서 매달렸다. 나는 엉겁결에 그녀를 안았고 예쁜 얼굴 앞에서 마음의 빙산이 아이스크림 녹듯 사르르 녹아내리는게 느껴졌다. 그래, 고민 따위는 하지 말자. 현재 이 상황을 즐기자!
“사장님.”
치요는 내게 매달린 채로 말했다.
“우리 이제 쉬러 가요.”
그녀의 뺨에 홍조가 올라왔다. 아무래도 노느라고 많이 지친 모양이다.
“그래요. 운전은 내가 할게.”
“으응... 원래는 치요가 다 하려고 했는데. 나 너무 힘들어서...”
뭐지? 치요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입김에서 열기가 느껴졌고 눈이 흐리멍텅했다.
“치요 씨. 혹시 아픈건 아니죠?”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갑자기 너무 신이 났던게 문제지... 으음... 사장님... 아까 이마에 뽀뽀해줬던 이후부터인가. 갑자기 가슴이 너무 두근거리고 설레... 그래서 그런가봐. 사진 많이 찍었어요?”
“네. 그건 걱정하지 마요.”
“후후... 좋아요. 아, 어지러워...”
“얼른 차로 돌아가죠.”
나는 치요를 안은채로 차까지 이동했다. 동물원이 꽤 넓어서 오래 이동해야했는데 내 체력이 그걸 다 버텨내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차에 돌아간 나는 조수석에 그녀를 앉히고 안전벨트까지 메 줘야 했다. 그녀는 스스로 몸을 움직이기도 벅차 보였다.
“병원으로 가야하는거 아니에요?”
나는 내 안전벨트를 메면서 말했고 치요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니! 절대요... 절대... 내 소중한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 빨리 가요...”
“어디로 갈까요?”
“몰라요... 쉴 수 있는 곳으로... 아무도 없이 우리만 서로를 느낄 수 있는 곳.”
나는 그 말에 심장에서 왈칵 혈액이 쏟아지는게 느껴졌다. 몸은 붉게 달아올랐고 순간적으로 발기가 되면서 내 성기가 완성체가 되어버렸다. 나는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몸을 살짝 틀어야만 했다.
하... 그런데 치요에게 내 운전실력을 보여줘야 했다. 분명 미숙한 운전실력 때문에 나에 대해 실망할게 뻔했다.
그런데 내가 기어변속기에 손을 대는 순간, 나는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는 사람처럼 서서히 몸동작이 익숙해지는게 느껴졌다.
덜컥
‘어?’
나는 재빨리 이어지는 동작을 취했고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면서 악셀을 밟았다.
옆에 앉은 치요도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나 원래 운전 잘했나보다!’
내 몸이 기억하는 데로 움직이니 순식간에 운전대에 익숙해졌다.
그런데 내가 신나게 운전을 하는 동안, 옆에서 치요는 점점 더 열이 차오르는 듯 힘겨워하고 있었다.
“치요 씨! 정말 괜찮은거 맞아요?”
“응... 네... 하아... 잠깐 누워있으면 나을 거예요. 아니면...”
“아니면?”
“사장님이 마사지 좀만 해주면 나을지도?”
“마사지? 제가 마사지를 잘하나요?”
“큭... 아, 웃기지 마요... 나 아픈데...”
“웃... 겼어요?”
“사장님 손은 약손이다... 해주면서 주물러 주면 나을거 같아요.”
“아... 그런 뜻이었구나. 그래요. 제가 마사지 해드리면 나을거 같다는데 해드려야죠.”
“좋아...”
나는 그녀와 함께 호텔에 방을 잡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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