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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화 〉 154화 (153/173)

〈 154화 〉 154화

* * *

치요는 운전대를 잡고 심호흡을 몇 차례 했다.

“자, 저만 믿으세요!”

눈을 질끈감고 소리 지르는데 정말이지 귀여워 죽겠다. 다니엘과 그레이스는 우리집 앞에서 나와 치요를 배웅했다. 창문을 내리자 다니엘이 말했다.

“명심하세요. 이건 어디까지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한 시행착오예요. 너무 즐기는 일에만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이라도 기억을 되찾을만한 요소가 있다면 바로바로 멈춰서 생각하세요. 아, 그리고 치요!”

“넹?”

“너무 과하게는 하지 말고. 지친다.”

“무슨 말인지...”

“가봐.”

“네!”

치요는 곧바로 악셀을 밟았고 우리는 기우뚱하며 앞으로 이동했다. 나는 조심하라고 주의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아서 그냥 조용히 있었다.

“꽉 잡으라니까요!”

“이거 오토바이 아닌데...”

“시끄러운!”

“...”

나는 보조석에서 손잡이를 잡고는 있었다. 치요의 운전은 사방팔방으로 휘날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그래도 초보운전 주제에 속도를 곧잘 내는건 다행이었다. 거북이처럼 이동했으면 하루종일 차에만 있어야할 판이었으니까.

그러다 신호에서 멈춰선 치요. 그녀는 눈을 부라리면서 다른 차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했다. 그 모습마저도 퍽 귀엽게 느껴진다.

그녀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치맛자락과 그 밑을 감싸고 있는 검은색 스타킹은 내 눈을 사로잡았고 나는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눈길처럼 마찬가지로 그녀의 몸을 훑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완성형의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랬다. 일반인이라고 하기에는 폭발적인 볼륨감을 소유하고 있었다. 사실 모델이라던지 아이돌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몸매. 거기에 일본인 특유의 커다란 눈과 작은 얼굴...

‘너무 귀엽다.’

나는 다시금 현실감각이 떨어져서 멘탈적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다.

치요는 내 시선을 인지했는지 눈길을 마주받고서 베시시 웃었다.

“어디 가고 싶냐니까요.”

“어, 글쎄...”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요. 여자친구 생기면 뭐가 가장 먼저 해보고 싶었어요?”

그러고보니 기억이 지워진 구간 동안 나에게 여러 가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여자친구 하나 없었는지가 궁금하던 찰나였다. 그런데 치요가 물어보는걸 보니 나에게 현시점에서 여자친구가 없다는 것쯤은 유추할 수 있었다.

‘왜지? 차도 있고 집도 있고 사업도 하고 있는데 대체 뭐가 부족해서 연애도 못하고 있는거지. 역시 돈으로도 해결되지 않는게 있는건가.’

“동물원.”

“동물원?”

“네. 동물원에 가보고 싶었어요.”

“동물원 좋지. 나는 카피바라 보고싶어.”

“카피바라?”

“응. 쥐같이 생긴 녀석인데 엄청 커!”

“쥐, 쥐라고..?”

“응. 쥐인데 크고 귀여워요. 흐흥, 그러고보니 사장님이랑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카피바라라는 동물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다. 근데 내가 쥐새끼를 닮았다고 말하고 있는건가. 귀엽다고 말했으니까 좋은 뜻인가.

우리는 결국 동물원으로 갔다.

나는 동물원까지 다행히 도착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치요의 운전이 과격했다. 얼마나 과격했으면 아까 만졌던 헤어스타일링이 아무렇게나 헝그러져 있을 정도였다.

“으아아... 엄청났다.”

치요도 느꼈는지 한숨을 푹 쉬면서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가 클락션 소리 때문에 놀라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깜짝 놀라면서 내 쪽을 보고 폭소를 터트린다.

“하하하!”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동물원에서 최대한 오래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입구에서부터 쭉 연인처럼 행동했다. 그녀는 내 팔에 자연스럽게 자기 팔을 감싸왔고 더 가까워질수 없을 정도로 딱 달라붙었다. 걸어다니면서 주변 남자들의 시선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치요의 외모는 눈이 부셨다.

“사진 찍는거 좋아해요?”

“아니, 별로요.”

“그럼 나 찍어줘요.”

“아, 어... 지금이요?”

“아니! 지금은 이러고 있을 거야. 이따 동물 구경할 때 찍어줘요.”

치요는 내 팔을 더 세게 끌어안고 얼굴을 내 어깨에 묻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렇게 여자친구가 생기게 되는건가. 아직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 사실 치요가 너무 개방적인 탓에 이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일본은 성적으로 좀 더 개방됐다는게 내 선입견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녀가 촬영했던 영상들까지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거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를 멋대로 판단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녀의 진정한 속마음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치요의 이마가 눈부시게 빛났던 거다.

그러니까... 외모가 눈이 부신 문제가 아니라 정말 알 수 없는 형형색색의 색상이 그녀의 이마를 빛내고 있었던 거다.

“어... 치요 씨?”

“응?”

“그, 뭐야... 이마에 뭐 묻은거 같은데.”

“어, 음... 여기?”

치요는 반대쪽 손으로 이마를 훑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봤자 이마에 묻은 눈부신 얼룩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림자에 손을 댄 것처럼 지나쳐버리는 손끝. 3차원의 것이 아닌 다른 차원의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가 아니었다.

얼마나 눈이 부셨는지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떡할까 걱정될 정도여서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없어졌어요?”

“아, 예...”

나는 우선 넘어가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이 신경쓰면 그때는 내 손으로 닦아줘야겠다.

그런데 어느 누구도 치요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넘어오는 시선은 그저 부러워하거나 동경하는 듯한 시선들뿐. 누구도 치요의 이마에 있는 형형색색의 반점을 의아하게 쳐다보지 않았던 거다.

‘대체 뭐지..?’

나는 의문을 갖은채 치요의 손에 이끌려서 어디론가 향했다.

그 의문은 처음 코끼리를 만난 순간 어느정도 해소가 되는 듯했다.

“코끼리다!”

치요가 소리치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었고 생각보다 작은 크기의 코끼리를 보고 실망했다. 그래도 신기하게 생긴건 신기하게 생긴거지. 저 커다란 귀며 기다란 코. 일반적으로 어디서 보기 쉽지 않은걸 발견하면 그곳에 시선이 머물기 마련이다. 주위에 있는 어린아이들만 봐도 그렇다. 녀석들은 처음 보는 코끼리에게 시선을 머물면서 입을 벌리기까지 한다.

근데 왜 치요의 이마에 있는 이 비정상적인 빛에는 어느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느냔 말이다!

젠장! 오늘 동물원에서 느긋하게 시간 보내기는 글렀다.

그러다 문득 다니엘의 말이 떠올랐다.

오늘은 내 기억을 되찾는 시간이라고. 그러니까 기억이 되살아날만한 일이 생기면 유의깊게 그 현상에 대해 생각해야했다.

‘그러니까... 치요의 이마에 있는 빛이 내 기억을 찾는 요인 중 하나라는 뜻..?’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저 빛은 난생 처음 보는 빛이다! 그리고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저 빛이 보이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

치요가 갑자기 뾰루퉁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마에 눈이 가버렸다. 그러자 치요는 한숨을 쉬었다.

“왜요. 왜. 왜. 동물원 괜히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엥?”

아무래도 치요는 이 현상을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진짜아. 사장님 예전 같았으면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다 얘기했을텐데. 오늘은 참 눈치만 보고.”

“내가요..? 제가 솔직한 사람이었나요?”

“응, 그럼! 있는 그대로 따박따박 얘기하는 그런 스타일이었지. 내 행동이 싫으면 싫다. 이런건 고쳐라. 바로바로 얘기하는 스타일. 그러니까 사장님은 나한테 좀 더 솔직해도 좋아. 지금같은 경우 말이야! 뭔가 재미없는 거예요? 내가 벌써 질렸어요?”

“아, 아니... 치요 씨는 너무 좋아요.”

“내가 좋아요?”

‘아니... 왜 대화의 흐름이 이렇게 흘러가는 거지.’

나는 치요의 이마에 뭐가 묻었다고 또 지적해주려고 하면서 은근슬쩍 닦아주려고 하다가 그녀가 내게 초근접 해오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내가 좋아요!?”

다시 한번 묻는 그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와... 그립감이 미쳤다. 어쩜 이렇게 호리호리할까. 그렇다고 가슴이 작지도 않고... 너무 좋다. 그냥 그녀에게 안겨서 세월을 보내고 싶어졌다.

치요는 그 순간,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게 키스 타임일지도 모르겠다. 모쏠아다인 나로써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부분이었다. 가슴이 콩닥거리는걸 넘어서 입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 됐다. 두근거리는 박동이 뇌까지 울리면서 머리가 하얗게 서렸다.

나는 치요처럼 눈을 감고 얼굴을 그녀쪽으로 밀어냈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치요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져다 댄 것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자석처럼 그녀의 오색찬란한 반점쪽으로 입술을 향했고 그 지점을 향해 입을 맞추고 말았다.

쪽♡

아...

첫키스는 이렇게 물건너 갔구나. 생각하려는 찰나.

치요의 오색찬란한 빛은 나의 정신을 빨아들이기 시작했고 나는 이상한 현상을 보게 됐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현장.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배경으로 봐서는 도시가 확실한 이곳, 도심 한복판에 암전이 있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고 누군가는 방독면을 쓰고 걸어다녔다.

치요는 건물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 그 음성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이었다.

일본어.

이곳은 일본이었다.

방에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 벌거벗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치요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고, 치요는 어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그리고 그 후에...

나는 역겨운 일을 보려는 순간 정신을 차렸다.

“사장님..?”

나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치요를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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