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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화 〉 121화 (120/173)

〈 121화 〉 121화

* * *

밤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한 나는 화장실 샤워기에서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서아니?”

묻자 대답이 없다.

문을 열어서 놀래켜줘야지 싶어서 문을 열고 샤워 커텐을 치웠는데 아뿔싸, 처음보는 사람이었다. 순백의 속살. 동양인의 순백의 속살이 아니라 진짜 하얗디 하얀 속살이었다.

“오마이갓!”

“누, 누구세요? 아니... 죄송합니다??”

시발, 처음 보는 사람이 우리집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내가 왜 미안해야 하는거지?

거실로 나가자 다니엘이 소파에 앉아서 한가롭게 TV를 보며 말했다.

“그레이스 수녀님이에요.”

“시발, 나가!”

“흐흐, 어제 성수는 잘 이용하셨는지요?”

다니엘은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 아는가. 흑인이 저렇게 활짝 웃고 있으면 은근히 무섭다는 걸. 몸은 근육질로 탄탄한데 얼굴은 개구쟁이 같은데다가 눈은 또 파란색으로 똘망똘망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또 그 성수를 아주 잘 이용했다는 거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다니엘이 마저 말했다.

“성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녀의 피가 필요합니다. 순정일수록 더 좋죠. 그래서 그레이스 수녀님을 데려왔습니다.”

“그, 그 말은 무슨 말이예요? 지금 내가 수녀님 피를 마셨다는 얘기예요?”

“아!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혈액에 있는 성분을 어느정도 가져온다고 보면 됩니다. 이미 저쪽 방에는 제조실을 차려놨으니 준현 씨는 준현 씨 방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여기다 살림이라도 차려놨단 거예요? 누가 열어준거야, 대체?”

“혹시 모르실까봐 말씀드리지만, 서아 씨가 문 열어줬고 어제 밤새도록 여자분 세 분이서 술 퍼먹고 노는동안 저는 이삿짐을 옮겼답니다. 덕분에 아침에 저만 멀쩡해서 공항까지 그레이스 수녀님을 데리러 갔다 올 수 있었죠.”

그때, 뒤에서 화장실 문이 열리고 목욕가운으로 몸을 칭칭감은 그레이스가 나왔다.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수녀가 이렇게 예뻐도 되?’

순백색의 피부와 유럽 미녀 특유의 갸름진 턱선과 작디작은 얼굴. 그 안을 가득 채우는 이목구비는 몽롱할 정도로 신비로웠다. 커다란 눈은 다니엘과 마찬가지로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는데 눈썹은 또 샛노랗고 머리카락 색도 완전한 금발이었다.

나도 모르게 위에서 아래까지를 훑은 다음 변태처럼 침을 꼴깍 삼켰다.

“아, 그리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수녀님은 항체가 필요 없으십니다.”

“전혀. 전혀. 전혀 어떤 이상한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안녕하세요... 한국말 배우는 중이에요.”

“아, 한국말 배우는 중이시군요? 지금도 잘하시는데요.”

“과잉 칭찬해봤자 같이 안 자드립니다.”

옆에서 자꾸 추임새를 넣는 다니엘을 날카롭게 째려봤다.

“뭐가 어쨌든 저희 집에서 재워드리기는 힘듭니다.”

다니엘이 내 말을 통역해주자 그레이스가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와, 씨.’

팽팽하게 끌어당기는 소매. 그리고 애처로운 듯한 눈망울은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가서 잘 곳이 없다고 말하는군요. 다시 귀국을 해야하냐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레이스 수녀님은 제가 불러서 온 겁니다. 이곳에 재워주시는 분이 있다고 말씀드렸고,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고 말했거든요.”

“아니... 다니엘 씨?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요. 그리고 왜 그레이스 씨가 오셔야하는지 이유도 못들었는데요?”

“아! 그레이스 수녀님은 당연히 처녀입니다!”

“아니, 그니까 그걸 물어본적이 없다니까요?”

나는 옆에 서있는 그레이스의 눈치를 살피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힐끗힐끗 얼굴을 자꾸 보게 되는데 진짜 눈 돌아가게 이쁘게 생겼다.

“그리고 저녁에 거실에서 노브라로 필라테스하는 게 취미고, 요리도 무척 잘한답니다.”

“그니까요... 하나도 안 궁금하다니까요?”

사실 노브라로 필라테스하는 그레이스가 무척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내 보금자리다.

수 많은 여자들과 섹스를 하기 위한 요충지인 것이다. 그런데 여자들을 데려왔을 때, 이곳에 말도 안 되게 예쁜 여자가 있는데 수녀이고 처녀라고 하면 믿겠는가?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다. 거기에 이렇게나 예쁜데 같이 동거하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하, 시발... 처녀, 아니... 수녀랑 동거하기냐 아니면 서아, 연두, 이설, 도하 네 명이랑 질펀한 난교파티를 하느냐인데. 어느모로 보나 후자가 땡기는데 왜 갈등이 되는거지? 미치겠네.’

나는 다니엘의 표정을 한 번 살폈다.

그는 이미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한 마디 더 덧붙여줬다.

“수녀님이 없으면 성수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성수는 다양한 종류가 있어요. 아마 준현 씨가 앞으로 많이 애용하게 될 겁니다.”

확실히... 성수는 개사기 아이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기적의 손을 대체할 수 있는 물약임과 동시에 내게 있는 반점을 상대에게 옮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섹스만 해도 서로의 반점이 마구 옮겨붙으니까 효과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응용력 면에서 봤을 때 준현 씨에게 탁월한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수를 분명 잘 사용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건 그건데요... 저희 집은 방이 2개고 거실이 하나... 그래서 세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힘듭니다.”

“괜찮습니다. 준현 씨 방 침대가 크더라고요. 제가...”

“아니! 다니엘 씨? 제발 꺼져주세요. 제발요.”

“제 말을 끝까지 들어주세요. 제가 방 하나를 차지하도록 하고 준현 씨 방에서 그레이스 수녀님이 같이 주무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여자 분이시니까 몸집도 작으시거든요.”

“... 네?”

나는 그레이스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내 소매를 잡고 있었고 우리의 대화내용을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내가 완전히 거절하는 눈치는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응! 응!”

하...

졸라 귀엽네.

그나저나 나더러 그레이스랑 같이 자라고?

“섹스는 안 됩니다.”

“생각도 안 했습니다.”

섹스를 하지 말라고?

이게 무슨 소린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다음에 생선을 먹으면 가시에 찔려 죽으니 알아서 하라는 식의 소리였다.

“그레이스 수녀님이 섹스를 하게 되면 처녀성을 잃어서 성수의 효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 점을 참고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수녀님! 여기 이 방을 사용하시면 될거 같아요. 저기 저 사람이 침대에 들어와도 괜찮습니다! 금욕수련 중인 분이시거든요! 아주 출중한! 능력있는!”

“오, 좋아요. 저도 금욕수련을 하고 있답니다.”

시발, 시발, 시발.

금욕수련은 개뿔... 내 넘쳐흐르는 성욕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그런데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마땅한 핑계거리가 없었던 거다.

그렇게 내 허점을 잘 파고든 다니엘은 성공했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TV를 끄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평안한 밤 되십시오. 아니, 금욕의 밤! 굿밤!”

저 새끼, 한국인이야. 분명 한국인이라고.

나는 그레이스가 내 방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거실에 옷을 벗어두고 샤워를 했다.

오늘 하루동안 씻은적이 없어서 찝찝했다. 허도하와 나체로 눈을 뜬 이후에 대충 물티슈로 성기 부분을 닦아낸게 전부였던 거다.

뜨거운 물로 오래오래 몸을 뿔려서 묵은 정액을 닦아낸 후에 상쾌한 느낌으로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내가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은 온데간데 없었고 거실에 있는 식탁 위에 고이 개어놓은 잠옷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레이스가 해놓은 것 같다. 그녀는 잠옷 옆에 차가운 물이 들어있는 컵도 준비를 해놨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게 동거녀의 장점이라는 건가. 그것도 아주 세심하고 센스있는 동거녀.

나는 개어놓은 잠옷으로 옷을 갈아입고 침실로 들어갔다.

어느새 잠에 들었는지 새근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그레이스가 행여나 잠에서 깰까봐 조심스럽게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소리밖에 안들린다. 어두워서 그레이스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이대로 그냥 자는 거야?’

나는 천장을 응시하며 발기된 성기를 추스르기 위해 무던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시발, 오줌 마려.’

오줌이 마려워도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혹시라도 잘 자고있는 그레이스가 깰까봐. 그나저나 그녀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한 마디로 미쳐버릴 상황이라는 얘기다.

2호점 준비가 된 건 둘째치고 동침녀에 동거남까지 생겨버렸다.

생각지도 못한 급작스런 전개들.

기적의 손과 더불어서 나에게 생겨난 커다란 과제들.

내 인생은 이제 막 알에서 부화한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줄 알았는데 어느순간 잠이 들어버렸다.

하긴 그렇게 섹스를 해대면서 몇 십번이나 싸댔다는데(허도하의 증언) 멀쩡한 것도 이상하다.

유럽에서 왔다는 그레이스는 나를 위해 한식 레시피를 공부했고 다니엘에게 내가 어제 힘 썼다는 말을 듣고는 소고기뭇국을 끓여줬다.

안 그래도 체내에 단백질이 필요한 차였기 때문에 허겁지겁 먹었는데 맛있다. 처음하는 한식 실력이 만만치 않은걸로 봐서는 주요리는 또 얼마나 맛있을지 기대가 됐다.

“그레이스는 주로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요리를 자주 해요. 저랑 한때 동거하면서 많은 요리를 해줬답니다.”

“아... 근데 그레이스 씨 어젯밤에 자면서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다니엘이 통역해주자 그레이스는 손사래를 치며 엉성한 한국말을 구사했다.

“난 괜찮았어. 준현 씨 코고는 소리? 나 괜찮아. 괜찮아.”

“코 고는 소리 때문에 깼다는 소리입니다.”

“한국말을 굳이 통역 안 해주셔도 되요.”

다니엘은 어깨를 으쓱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이번에 신약을 개발하고 있는데요.”

“신약?”

“아, 잘못 말했네요. 성수요.”

“... 말 실수 조심하세요.”

“하하하. 이번에 발명할 아이템은 기대해주셔도 좋아요.”

“뭔데요?”

내가 호기심 가득하게 묻자 다니엘은 이번에도 음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번에는 마시는게 아니라 바르는 약이예요.”

왜.

부연설명 없이도 무슨 약인지 알 것 같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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