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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화 〉 111화 (110/173)

〈 111화 〉 111화

* * *

밖이 소란스러워서 한번 주위를 환기시켰더니 유석우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다.

“아니, 김정현! 빨리 한소희 올려보내라고! 뭐하는 거야? 지금? 귀하신분들 모셔놓고.”

“그 귀하신분이 여기 안에서 마사지를 하고 계신다고! 좀, 기다려요, 형!”

“얼마나 많이 기다려야되는데? 얼마나?”

“하루종일 기다려봐, 그냥.”

“하, 진짜 어이가 없네.”

“어이가 없으면 어쩔건데 형이?”

여전히 투닥거리며 예능스럽게 토크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 아무래도 내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일부러 저렇게 싸우는 모양이다.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이런 분위기 좋은 모습을 앵글에 담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아까부터 진정한 싸움을 하고 있었고 분위기가 다소 어색하고 투쟁적이어서 방송에 어떻게 나갈까 궁금하던 차였다.

‘확실히 예능 고수들은 다르긴 다르네.’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본인들의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예전보다 더 프로패셔널해지기 위해서는 내가 할 일을 정확히 인지해야 했다.

나는 어둠의 기운과 반대되는 기운을 주입시키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집중해야 했다.

그러면서 나는 내게 보이는 색상들에서 해답을 찾기 위해 생각했다.

붉은색은 수축의 정도를 나타낸다... 하지만 사실상 현실과 가장 맞닿아 있다. 사무직 근무자들은 뒷목이나 허리쪽에 붉은색 반점이 수두룩하고, 운동선수들은 각각 쓰는 근육에 따라 붉은 반점의 위치가 달라질 것이다.

푸른색은 기능의 상실... 이것 역시 일상이다. 정확히 말하면 인생에서 한번쯤 거치는 감기몸살 같은 질환이었다.

보라색은 또 말해 뭐해... 자격지심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밖에 없는 무의식의 영역이었다.

분홍색점은 성욕을 뜻하니 당연히 일상에 묻어있을 수밖에 없는 것. 본능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검정색 반점은 내가 만들 수 없는 점이었다. 만들 생각도 없다.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점 따윌 내가 뭣 때문에 만들겠는가.

그렇다면 검정색에 반하는 색상은 무엇일까?

하얀색이다.

뻔한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하얀색 반점을 떠올린다고 해서 바로 만들 수 있는건 아니었다.

나는 도인을 떠올렸다. 가장 순백에 가까운 사람은 다름아닌 도인이 아닐까.

죽음마저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도인은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었다.

색깔이 일상을 뜻하고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뜻한다면 그것들이 전부 없는 하얀색의 반점은 당연하게도 도인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에게만 있을 수 있는 반점일 터였다.

그곳에 무엇을 그리던 내 마음대로인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한 하얀색 반점. 그 하얀색 반점만이 어두운 검은색 반점을 몰아낼 수 있다.

‘그거다. 그 생각에 집중하자. 무색무취... 속세에서 벗어나는 거다.’

구병훤을 치료할 때보다도 더 힘이 들어갔다.

마사지는 손으로 누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색깔 반점들이 말해주는 바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모든 사람에게는 필요한 마사지가 다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걸 찾는게 바로 내가 할 일이다.

한소희도 처음에는 이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내 진지한 얼굴을 봤는지 넋놓고 기다리기만 했다. 이미 그녀에게 있었던 분홍색점들이 전부 사라진 후였다.

‘어? 잠깐만...’

나는 그 부분에서 뭔가 깨우친 기분이었다.

‘분홍색점이 사라져?’

이 순간, 머릿속에 있던 잡념들이 사라지면서 황금색 반점이 번쩍 빛났다.

‘됐다!’

*

시간이 지날수록 밖은 더 소란스러워졌다.

너무 늦게 나온다느니 실격패라느니 친구들과 늘상 떠들어대던 대화가 요즘 연예계 트랜드다.

나와 한소희가 밖으로 나갔을 때,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쪽으로 날아와 꽂혔다.

“가시죠.”

나는 덤덤하게 말했고 한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배드에서 내려온 이후, 계속해서 힘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지금 그녀는 걸을 때마다 신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일 것이다.

육중한 느낌의 걸음걸이. 근육이 이렇게까지 만들어진적이 없기 때문에 걸음이 부자연스러운 거다.

그리고 주변에서 한소희를 보고 한마디씩 거들었다.

“대체 저 안에서 뭘 하고 나왔길래 애 몸이 불어있어?”

“몸이 불다니 저건 펌핑이 됐다고 하는 거지. 근육이 솟았잖아. 팔뚝에 핏줄 선걸 보라고.”

“어유, 저 무식이.”

“아니! 형! 솔직히 이 시간동안 근육이 저렇게 생긴다는게 말이 되요?”

“말이 되지? 말이 되니까 저러고 있겠지?”

“아오, 약올라. 진짜.”

저렇게 농담을 따먹는 걸 보니 생각보다 충격적이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소희의 몸은 태닝만 안 했지, 휘트니스 대회에 나갈 법한 몸매가 되어 있었다. 그간 시간을 보내면서 붉은색점을 만들었다 없앴다 보라색점을 만들었다 없애기를 몇 번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현재 내 몸이 이 상태가 된 것도 그간 비슷한 고생을 했기 때문인데 여자에게도 이런 효과를 가져올지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근육이 생긴 것과 사용하는 건 차이가 있지.’

근육은 요령이 있어야 한다.

갓 태어난 아기가 근육을 쓰는 법을 모르고 꼼지락거리며 조금씩 움직이듯이 한소희의 몸 상태도 마찬가지다.

그저 그녀가 잘 적응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그리고 나는 한소희에게 따로 지시를 해뒀다.

신이설과 마주 본 상태에서 최대한 몸을 많이 더듬으라고 말이다.

주사위를 굴린 후에 한소희와 신이설은 각각 짚어야 하는 부위가 정해졌다.

신이설은 한소희의 머리에만 손을 얹으면 됐고 한소희는 신이설의 허리에 손을 얹어야만 했다. 두 여자는 남자에 비해 팔이 짧았기 때문에 서로의 몸이 밀착된 상태가 됐다.

“어머... 반가워요.”

한소희는 내가 내린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신이설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몸이 정말 좋으시네요?”

“앗... 왜, 왜 그렇게 더듬으... 시는...”

“놀라지마요. 내가 원래 이런 스타일이에요.”

심지어 한소희는 장난스럽게 신이설의 젖가슴을 왈칵 움켜잡기까지 했다.

“꺄악!”

“훗. 뭘 이런걸로 놀라고 그러시나.”

나 역시 씨익 웃었다. 신이설의 뒤에서 두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를 눈여겨 보던 신용섭은 내쪽으로 시선을 줬다. 또 무슨 꿍꿍이냐는 듯. 하지만 이내 썩은 미소를 지으며 날 깔봤다. 네 까짓게 뭘 하든 소용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래서 아는 게 없는 사람은 약도 없다는 소리가 있구나.’

“시작!”

삐익­

유석우가 휘슬을 부르는 것으로 경기가 시작됐다.

내 눈에는 이미 신이설의 몸에 어둠의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한소희가 너스레를 떨며 신이설의 몸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겨 최대한 비비적거린 탓이었다.

그리고 좌중이 시끄러워진 틈, 그것도 아주 짧은 순간에 신이설의 몸은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으... 아앗!?”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으나 여전히 신용섭 쪽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날려줬다.

‘내가 이겼다.’

한소희도 자기 힘에 깜짝 놀랐는지 하늘로 솟구쳐 오른 신이설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놨다. 얼이 빠진 신이설의 팔을 반대쪽으로 넘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끄... 끝?”

유석우는 얼마나 놀랐는지 목소리가 뒤집어지기까지 했다.

1, 2, 3... 한소희의 승리가 확정되고 3초가 지나서야 팀원들은 난리가 났다.

“와아아아아! 이겼다아아아!”

과묵했던 김정현도 이겼다는 사실에 만족해서 팔을 불끈 쥐었다.

승리에 기쁜 나머지 한소희가 내쪽으로 달려왔는데 그녀가 안기려고 하자 다른 팀원들도 덩달아 달려와서 어깨동무를 하고 덩실덩실 춤을 췄다.

“이겼다! 이겼다아아아!”

나는 어깨동무를 한 상태에서도 신용섭을 흘끗 쳐다봤다. 녀석은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는 듯했다. 계산대로라면 절대 질 수 없었을 테니까. 신이설의 목숨을 담보로 그녀의 힘을 맥스로 끌어올렸는데도 진 거다.

그는 실망이 얼마나 컸는지 입모양으로 욕설을 내뱉고는 뒤쪽으로 사라지기까지 했다. 방송이고 나발이고 자기 감정이 중요한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팀원 무리에서 빠져나가 신용섭의 뒤를 쫒았다.

뒤쪽에서는 유석우가 진행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그러면 강준현 팀 승리! 2번째 미션의 보상은 강준현 팀이 가져가게 됐습니다! 아, 이건 정말 박빙의 승부였고, 예측이 불가능했는데요.”

“맞아요. 뭣보다 강준현 씨의 그 근육과 힘! 워킹맨 최고의 근육맨인 고시훈을 메다 꽂아버렸다는 것에...”

“아, 아, 쓸데없는 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아니, 이게 뭐가 쓸데없는 소리예요! 형! 게스트 칭찬하는 건데.”

“아, 글쎄. 진행 좀 하게 옆으로 좀 나와봐. 아니면 그냥 집에 가던가.”

“와! 진짜 울분 터져. 유석우 진짜 맨날 내 말만 자른다니까?”

큭큭큭.

스텝들은 두 사람의 콩트에 웃느라 정신이 없어서 신용섭과 내가 밖으로 나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뭐, 알았다한들 잠깐 밖에 나가서 얘기 좀 하고 왔다고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런데 내가 복도 쪽으로 나갔을 때, 신용섭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벽에 몸을 기대고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 내가 할 소리야.”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이상한 짓을 한건 본인이면서 괜히 내게 성질을 부리려는 속셈이다.

“좆도 없는 실력일텐데 아마 내가 아는 능력도 없을 거고. 이건 말도 안 된다고...”

“능력이라면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삼는 그 능력을 말하는 거냐?”

내가 전과는 다르게 강하게 나오자 신용섭도 조금은 당황한 듯 주춤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다니? 말 조심해라... 지금부터 네가 내뱉는 말에는 책임을 져야 할 거야.”

“허어, 지금 협박하시는 거예요?”

“협박은 무슨. 얼토당토 않는 소리로 얼버무리려는 모양인데 어떻게 한소희의 몸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해명해야할 거야.”

“그 전에 고시훈의 몸이 왜 그렇게 됐는지부터 설명하셔야지.”

“...”

정곡을 찔린 신용섭은 어디까지 알고 있냐는 듯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살인도 불사하는 놈. 그것도 자기 스승을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보낸 놈. 나는 이 놈을 반드시 감옥으로 보낼 예정이다.

“우리 둘 다 똑같은 스승을 둔 거 같은데...”

내가 도인에 대해 얘기하자 마침내 신용섭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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