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110화
* * *
“죽음을 가져오는 자, 신용섭은 악마와의 거래를 하고 있는 거다.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그게 사람의 영역인가요?”
“사람의 영역이라는 것은 우리가 정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게 뭔가요?”
“기적이라는 것. 네가 말하는 사람의 영역에서 기적이라는 것도 품을수 있느냐?”
“...”
“예부터 그래왔다. 위인들부터 해서 이름 모르게 잊혀져 간 수 많은 선교사들과 신자들 그리고 의사들. ‘기적의 손’이라는 말은 지금에 와서 변질됐다. 네가 하는 일에 따라서 ‘기적의 손’이라는 단어의 가치가 결정된다. 사람의 영역이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언제나 맞는 말이다. 사람을 상대로 하기 때문이지... 네가 그 ‘기적의 손’으로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제가 하고자 하는 바...”
“그래. 네가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이상이 무엇이냔 말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이상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예전의 내가 아닌, 훨씬 더 나은 사람. 어딘가에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지금까지 나는 이 ‘기적의 손’을 나를 위해서 많이 사용해왔다.
그러나 구소민의 아버지인 구병훤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을 돕기 시작하고서 내게 새로운 원동력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이때만큼 행복해본적이 없다. 이때만큼 집중해본적이 없다.
지금 내가 한소희에게 하는 마사지는 그녀를 항체로 만들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닿는 곳은 어디든 어둠의 기운을 물러나게 할 수 있도록. 비록 그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도 아니고 목격한 적도 없지만, 나는 신념을 갖고 움직였다.
나는 가능하다.
라는 신념으로.
꺼져가는 황금색 반점이 그 광채를 더하기 시작했다.
*
소민은 프랑스에서 화보 촬영을 끝내고난 뒤, 늦은 오후에 성당을 찾아갔다.
지역에서 유명한 성당은 높이가 아주 높아서 고개를 들면 그 높이 때문에 어질어질 해질 정도였다. 아직 남아있는 햇빛의 잔향이 은은하게 스며들어와 예배당 의자에 앉은 소민의 옷을 비췄다. 붉은색과 푸른색과 보라색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색상들이 각기 햇빛을 다르게 받아 반사시키는 모습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졌다.
소민은 유럽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가끔 고향에서의 분위기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성당을 찾았는데 그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속죄였다.
신부님에게 자신의 죄를 말하는 고해성사. 가끔은 죄를 쥐어짜야 할 때도 있었지만, 이럴 때만큼은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오늘은 신부님이 외부에서 찾아온 신부님 한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계 사람인 듯 몸이 까맣고 눈에서 푸른 안광이 쏟아져 나왔기에 신비로운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소민은 늘 그렇듯 신부님에게 먼저 가서 인사를 했고 마침 흑인 신부와 눈이 마주쳐서 인사를 서로 통성명을 하게 됐다.
신부의 이름은 다니엘이었고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 외에도 막상 인사를 하고나니 신뢰감이 드는 인상을 심어줬는데 신부라는 타이틀을 벗겨놓고 보더라도 참 강단이 있고 신념이 확고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다니엘도 소민에게 관심이 생겼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최근에 운명이 바뀌셨군요.”
“... 네?”
“사람에게는 정해진 길이 있습니다만, 좋은 사람을 만나서 좋은 운명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보통 불교에서는 귀인을 만났다고 하죠.”
다니엘은 개방적인 생각을 갖은 신부였다.
아무리 천주교에 몸을 담고 성당을 드나든다지만, 최근에는 많은 신자들이 다른 종교를 공부하고 있었다. 다니엘도 그런 부류의 신자들 중에 하나였다. 다른 종교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배우면서 자신의 신념을 다져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다니엘의 신뢰감있는 말에 소민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실제로 소민은 준현을 만나서 좋은일이 잔뜩 생겼기 때문이다.
소민은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니엘은 소민을 꿰뚫는 듯한 눈을 하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오히려 무섭기까지 한 그의 매서운 눈매에 소민은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분을 제가 만나뵐 수 있을까요?”
“... 왜요?”
“그런 귀한 사람은 만나기 쉽지 않으니까요.”
대답은 단호하고 명쾌했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커다란 재앙에 그분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커다란 재앙이요?”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신부님이 부연설명을 해줬다.
“다니엘은 그 재앙 때문에 이곳에 찾아왔어요. 물론 다른 신부들은 쉬쉬하고 있어서 다니엘의 말을 무시하는 편이지만, 저는 오랜 친구라 들어준답니다.”
“먼 길을 돌아왔지.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전부 없어지면 나는 항상 자네를 찾으니까. 그 정도로 지금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아. 아마 소민 씨도 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거예요.”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소민은 속으로 생각했었다. 역시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는구나. 겉은 저렇게 멀쩡하게 생겨서 되도 않는 재앙 드립을 치고 있으니 말이다.
소민은 눈길을 돌려 구원의 신호를 보냈다.
“신부님도 재앙이 온다고 생각하세요?”
“어제까지는 저도 부정했지만, 오늘 다니엘의 눈빛을 보니 믿게 됐습니다. 그게 재앙이 되든 우리에게 좋은 일이 되든 어쨌든 세상에 기묘한 일이 닥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해졌습니다.”
“어떤 증거가 있나요?”
소민이 예리한 질문을 하자 두 신부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말해도 되겠느냐는 신호였고 다니엘은 고개를 끄덕인 후에 자신이 직접 설명을 해줬다.
“세상에 혼란이 다가올 때는 언제나 메시아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오랜 연구 끝에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비단 예루살렘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방방곡곡에서 메시아를 비롯한 전쟁영웅과 수 많은 철학자와 과학자, 의사들이 대거 출생했고 활동했다는 증거들이 남아있으니까요.”
“그래서 다니엘이 소민 씨에게 그 분을 만나고 싶다고 한 겁니다. 공교롭게도 다니엘이 찾아온 오늘, 소민 씨가 방문을 해줬고 소민 씨의 지인분들 중에 그런 유능한 분이 계셨다는 건 또 다른 운명인 겁니다. 소민 씨의 발언 하나로 소민 씨의 또 다른 운명이 바뀔 수도 있겠군요.”
잘 들어보면 사이비 같은 소리였다. 소민은 이런 말에 현혹될 정도로 우매하거나 비이성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신뢰가 느껴지는 건 바로 준현의 존재를 알았다는 것이다. 넘겨 짚었다기에는 너무도 정확했다. 저런 식으로 모든 신자들에게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소민이 오기 전에 다른 신자들에게도 대화를 시도했다면 소민은 단박에 이들이 사기를 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애초에 신부들은 신자들이 먼저 다가오기 전까지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다니엘이라는 사람은 애초부터 이 성당의 신부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두 사람은 소민에게 그 무엇도 강요를 하고 있지 않았다. 어찌보면 부탁을 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신의 뜻이 닿는다면 어련히 알아서 연결이 될 것처럼 준현을 소개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고 있었다.
“만약 제가 안 된다고 한다면요?”
“그렇다면 그 분은 그 분 나름대로 활약을 할 수 있는 길을 하느님께서 열어두셨을 겁니다.”
온화하게 웃고 있는 다니엘의 말은 거짓 같아 보이지 않았다.
미친 사람이거나 진실을 말하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다.
“재앙이라면... 정확히 어떤 재앙이죠?”
소민은 이제야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자신이 꼭 물어봐야 할 질문을 물어봤다. 이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거다.
다니엘은 어깨를 한 차례 으쓱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신의 뜻을 저희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다니엘은 한 차례 뜸을 들이다가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곤 자신의 십자가 목걸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그리곤 아까보다도 더 차분해진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인류의 절반 이상이 죽을 것이라는 겁니다.”
“... 절반이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쉽사리 나갈 수 없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만나지 못할 것이며 힘든 사람을 도와주지도 못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겁니다. 부자들은 자만심 때문에 죽을 것이며 가난한 자들은 굶어서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근원이 되는 곳이 있습니다.”
“... 어딘... 데요?”
“중국입니다. 중국에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죠. 실제로 중국 인구의 전부가 죽는다면 인류는 20% 정도를 잃게 됩니다. 그리고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죠... 그리고 중국에서 시작한 재앙은 가장 가까운 나라를 괴롭게 할 것입니다.”
설마...
소민은 등줄기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목이 메이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막 아버지의 병이 나았는데 다시 또 괴로운 일이 생긴다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소민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더욱 아버지가 걱정됐다. 또한, 그녀가 사랑하고 따르는 준현 마저도 걱정스러울 수밖에. 아무리 영특한 능력을 갖은 사람이라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게 분명했다.
“그런데 소민 씨.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 뭔데요?”
“당신에게는 빛과 어둠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
“다시 말해서 당신은 빛과 어둠, 그 두 가지의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다는 겁니다.”
다니엘의 푸른 눈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 어둠은 제가 말한 재앙의 근원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