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 107화
* * *
결과는 우리 팀의 패배였다.
시간이 없었던 것도 있고 중간에 의외의 불청객이 찾아왔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다.
“손도장 50대 75로 신용섭 팀 승리. 최종 미션을 위한 힌트를 드릴 겁니다.”
허도하조차 모르고 있는 최종 미션에 대한 힌트.
제작진측에서는 내게 찾아와 이번 사건이 방송에 나가게 되면 내 위상이 더 높아질 거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졌지만, 이긴 거라는 뜻.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번 방송을 통해 내가 얻고자하는 바는 그런 시시콜콜한 승리가 아니었다.
신용섭이라는 화 덩어리를 확실하게 짓밟는 것. 그것이 내 목표였다.
‘그나저나 검은 기운을 찾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았어.’
결국 수련의 결과였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피나는 수련을 한 결과, 얻어낼 수 있었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고통을 감내하는 법. 도인이 내게 열심히 자해를 알려준 이유는 다름아닌 그런 부분 때문이었다.
신용섭이라는 악과 맞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대항마. 지금 그 존재는 나 밖에 없다.
나는 그 사실을 송주연을 치유하면서 느꼈다.
힌트는 당연하게도 신용섭 팀만 몰래 볼 수 있다. 그를 도와주는 신이설을 비롯한 어시스트들과 연예인 팀이 미션을 확인하고 조용히 우리를 노려본다.
경쟁에는 어느샌가 불이 붙은 거다.
제작진에서 원하던 그림도 바로 이런 그림일 테다.
이상하게도 이전 프로그램 때보다 더 숙연했고 다들 사명감을 갖고 미션에 참여하는 분위기였다.
“자, 그럼 다음 미션을 설명드리겠습니다. 다음 미션은 다름아닌...”
PD가 뜸을 들였다. 이번에는 얼마나 대단한 미션이길래...
라는 생각을 하는데 PD의 다음 대사에 우리는 모두 뒤로 자빠지고 말았다.
“팔씨름입니다.”
‘뭐? 팔씨름? 지금 장난해?’
손바닥 레이스다 뭐다 하더니 결국엔 팔씨름이냐. 게다가 신용섭 팀에는 힘으로 절대 이길 수 없어보이는 고시훈이 있다.
고시훈은 씨름 선수 출신으로 RPG게임으로 따지면 올힘 찍은 힘캐라고 볼 수 있었다. 지능이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독불장군.
워킹맨을 가끔 틀어놓으면 독불장군 고시훈의 활약상이라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로 힘으로 하거나 운동신경을 요구하는 게임들이라면 고시훈이 다 이겼다. 물론 명목상으로는 김정현과 양대산맥이라고 하면서 가끔씩 김정현이 이기는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인 팔씨름이라면 고시훈이 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체중 100kg이 넘어가는 육중한 몸과 근육과 지방이 섞인 근육돼지 그 자체.
짐승돌이라고 불리는 슬림한 김정현과는 차원이 다르다.
대결은 당연히 4대4로 이뤄지는데 누군가 한 번 이기면 계속해서 앉아서 다음 상대와 겨루는 식이다.
따라서 첫 주자가 중요한데 신용섭 팀에서는 당연히 고시훈을 내보냈다.
‘저 놈을 어쩐다?’
이 방송이 시작되고나서부터 계속 생각했던 점이다.
만약 힘을 쓰는 미션이라면 고시훈이 상당히 신경 쓰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힘 겨루기를 하게 될 줄이야.
미션도 이미 한 번 졌기 때문에 두 번째마저 지게 된다면 최종 미션에서의 패배는 사실상 확정이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두 번째 미션에서 제작진이 팔씨름을 내세웠다는 건...
‘신용섭한테 뒷돈 받은거 아니야, 이거?’
누구나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나는 그 생각을 하자마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시팔. 진심을 다해서 이기는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이번 팔씨름 미션은 조금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때, PD가 추가설명을 덧붙였다.
“이번 레이스가 손바닥 레이스인만큼 각 팔씨름 선수들은 상대방의 신체부위에 손바닥 도장을 찍은 상태로 팔씨름을 하게 되는데요. 주사위를 굴려서 나오는 숫자에 따라 어디에 손을 얹어야할지가 정해집니다. 만약 팔씨름이 끝나기 전에 손바닥이 떨어지거나 끝나고나서 손바닥이 선명하지 않으면 팔씨름을 이겼다해도 패배입니다. 둘 다 선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양쪽 다 실격처리됩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주사위를 통해 예를 들어, 머리가 나오면 머리에 물감도장을 찍은 채로 팔씨름을 해서 상대의 팔을 넘겨야 한다는 얘기.
따라서 만약 6이 나오면 상대방의 종아리 부분에 손바닥 도장을 남겨야하는데 그 자세로 그대로 상대방과 팔씨름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주사위가 중요해졌네.”
아무리 고시훈이라도 상대방 발목을 붙잡은 채로는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주사위 눈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 그럼 양팀 첫 번째 선발을 뽑아주시고 각자 나와서 주사위를 굴려주시면 되겠습니다.”
우리 팀 네 사람은 모여서 회의를 했다.
“선생님이 하자는대로 할게요.”
김정현이 내게 말했다.
“두 가지 전략이 있을거 같아요. 어차피 상대팀은 고시훈이 에이스니까 고시훈이 선발일 거예요. 혼자서 우리 3명 정도는 쓰러트리겠다는 각오로 나올거란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나가서 최대한 체력을 소모시키거나 아니면 맞불작전으로 고시훈을 이길 생각으로 내보내는 방법이 있겠죠.”
“근데 팔씨름을 한다고해서 체력이 소모될까요? 저 정도 몸집이면 체력소모가 거의 없을거 같은데.”
“아뇨. 체력이란건 오히려 몸집이 크면 클수록 소모가 커요. 그리고 이 게임을 이해하시면 아시겠지만, 앉아서 하는 게임이 절대 아니에요.”
“앉아서 하는 게임이 아니다?”
“네. 1이 나오면 머리라서 상관이 없겠지만, 나머지 숫자가 나오면 테이블이 있는 상태에서는 결코 할 수 없죠. 그러니까 일어서서 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요령만 있으면 시간을 오래 끌수도 있다는 소리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이 팔씨름은 이름만 팔씨름일 뿐, 룰이 완전히 다르다. 허벅지라던지 종아리, 허리 같은 부위가 걸리면 당연히 손은 밑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김정현 씨가 먼저 나가줄래요?”
“아, 맞불작전으로 가겠다?”
이번에는 한소희가 거들었다.
“그러면 정현이가 탈락하면 우리 팀은 끝이에요. 희망이 사라지는 거죠.”
“어쩔 수 없어요. 김정현 씨 다음으로는 내가 나갈게요. 그리고 그 다음 한소희 씨가 나가고, 그 다음은...”
“음, 그래요. 어차피 모 아니면 도일 듯 해요. 음... 우리가 이길 확률은 낮지만, 건투를 빌죠.”
한소희의 피부는 나와 섹스하기 이전보다 훨씬 좋아져 있었다. 표정도 밝아졌고 말도 전보다 더 많이 했다.
회의를 끝내자 눈치 빠른 연두가 내게 와서 말했다.
“둘이 했지? 언제 또 했어?”
“뭐, 뭔 소리야?”
귀신이네, 이거.
“밤꽃 냄새 다 난다고! 제대로 씻긴 씻은 거야, 오빠? 그래놓고 나한테 해달라고 말하기만 해... 나 진짜 이번에는 화낼 거야.”
“어휴, 연두 개코는 못 속이는구나. 알았다고. 오늘만 좀 봐줘. 나도 이기려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피... 말도 안 돼.”
연두는 결국 내 설득에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 팀의 라인업은 내가 말했던대로였다.
따라서 김정현이 대표로 앞으로 나갔고 자신이 짚어야할 곳을 정하기 위해 주사위를 굴렸다.
결과는 3. 무난한 숫자로, 상대방의 허리 위에 손바닥마크를 남겨야 했다.
그리고 고시훈이 주사위를 굴렸다!
결과는 6!
우리는 모두 환호했다. 6이라면 상대방의 종아리를 잡아야하는데 종아리는 몸의 중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있으니 아무리 체급 차이가 나더라도 김정현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좋았어!”
김정현이 주먹을 불끈쥐며 좋아했고 한소희도 희망이 생겼노라며 박수를 쳤다. 그녀는 몸을 섞은 이후부터 계속 내쪽으로 가까이 붙어서 촬영내내 엉덩이를 내쪽에 붙이고 있었다. 그랬기에 박수를 치면서 몸을 떨어대는 그녀의 엉덩이 감촉이 내게 그대로 전달될 수밖에 없었다.
‘천하의 한소희가 내 앞에서 방댕이를 흔드네.’
“자, 그럼 매치 시작하겠습니다!”
청코너의 김정현. 홍코너의 고시훈. 각자 자리에 나와서 몸을 풀었다.
언제나 그렇듯 유석우는 멀찍이서 사회를 보면서 호들갑을 떨며 진행을 이어나갔다.
“야, 시훈아! 기술이 중요한 게임이야! 너무 방심하지 마!”
그렇다. 그 말이 맞다.
한 가지 조건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나는 첫 번째로 단상에 올라온 고시훈을 보고 놀랐다.
‘신용섭, 저 새끼는 또 뭔 짓을 한 거야?’
신용섭 쪽을 바라봤더니 그는 사악하게도 한쪽 입술을 끌어당겨 웃고 있었다.
아마 아무도 모를 것이다.
지금 고시훈의 몸이 불덩어리처럼 붉은색을 띄고 있고 몸 주변에서 끊임없이 검은색 기운이 뻗어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레이스가 손바닥 레이스라서 그런건지 놈이 능력을 발동시키기 위해선 손바닥을 찍어야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고시훈의 몸에는 검은색 손바닥 자국이 가득 남아있었다.
내가 신용섭을 계속 노려보고 있자 그의 작은 목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듯했다.
“목숨과 승리를 내게 바쳐라.”
신용섭은 그 말을 하면서 희열에 젖어드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놀라서 얼른 김정현 쪽을 보았다. 종아리와 오른손을 잡힌 김정현. 이제 휘슬이 부는 순간, 게임이 시작되는데...
“잠깐만! 경기를 중단해야 해!”
나는 놀라서 까무러칠 뻔했다.
이게 예능 프로그램이 맞아?
삑
소리가나자마자 고시훈이 씩하고 웃더니 김정현의 발목을 잡고 있던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김정현은 우당탕 소리를 내며 속절없이 쓰러졌고 곧바로 팔을 반대쪽으로 넘겨 게임을 끝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