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92화 〉 92화 (91/173)

〈 92화 〉 92화

* * *

“자해해라.”

“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소리다.

‘자해라고? 내가 방금 잘못 들은건가?’

내가 멍청하게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도인은 내 머리를 다시금 빡 소리가 나게 때렸다. 내가 뒤통수를 부여잡고 울먹거리자 도인이 말했다.

“자해를 해야지. 언제까지 내가 네 놈 손목을 꺾어주랴?”

“...”

그래. 무슨 뜻인지는 알겠다. 꺾어서 푸른점을 딱딱하게 만든 다음에 그걸 없애는 걸 반복해서 몸을 단련시키라는 뜻이다. 근데 그게 말처럼 쉽냐 이 말이지...

자해를 해본 건 아니지만, 예전에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해서 스스로 목을 조르는 게 유행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돼는 유행이었다.

학교 뒷자리에 앉은 골 빈 녀석들이 목을 움켜잡고 숨을 참은 후에 약 2분 가량 그 지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입에 거품을 물면서 옆에 있는 친구들이 깨우면 자기가 방금 지옥을 보고 왔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그래서 따라 해봤다. 근데 좆도 그런거 없다. 일단 공포감이 먼저 몰려와서 금방 손을 떼게 된다.

사람에게는 자기 방어의 본능이라는 게 있다. 살고 싶은 의지가 없는 사람만이 자해나 자살을 할 수 있게끔 설계가 되어 있는 거다. 그렇게 보면 영화에서 나오는 포로나 첩자들이 기밀사항을 누출하지 않기 위해 자기 혀를 깨무는 건 진짜 말도 안 될 정도로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걸 지금 나더러 하라고?’

이 도인... 아니, 노인네가 지금 정신이 나간게 아닐까 싶다.

내가 잠자코있자 도인은 내게 다시 말했다.

“어떤 고통이라도 참기로 하지 않았냐?”

“...”

하긴.

이런게 아니라 뾰족한 바위에 엉덩이를 박으라고 해도 못할건데. 하물며 내 몸을 내가 상처내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가볍게 손가락부터 시작해볼까.

합!

나는 반대쪽 손으로 손가락을 잡아서 뒤쪽으로 세게 넘겼다.

“아야야...”

쉬운 일이 아니다. 붉은색점이 확 달아오르긴 했어도 푸른색점이 나올 정도로 꺾이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 꺾는거야 쉽지. 이영준도 그렇고 임태훈도 그렇고 박유영네 매니저도 그렇고.

나는 도인을 쳐다봤다. 그러나 도인은 고개를 저을뿐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후... 하...”

다시 한 번 꺾기를 반복.

세상에... 자해하면서 수련을 할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는 무려 2~3시간을 손가락 잡고 씨름을 하다가 결국 자해에 실패했다. 날이 저물 때까지도 내가 실패하자 도인은 화도 나지 않는지 말없이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숲 사이에 있는 초가집같은 집이었는데 나더러 들어오라는 말도 없이 안쪽에서 문을 굳세게 잠궈버렸다.

씨발... 지금 이게... 말이 되는 거냐고. 제자 실패냐.

몇 번 문을 두드리며 “스승님” 소리를 외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운 나는 천장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대체 어떻게 하면 손가락을 꺾을 수 있을까. 큰맘먹고 자해를 하기 위한 다른 대안이 없는 걸까.

그러다 마침 자해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게 고통을 선사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

다음날 아침, 나는 샵으로 출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도인이 있는 강원도의 산으로 향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향한 곳은 다름아닌 한서연의 집이었다.

한서연은 내 연락을 받고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 어머나? 진짜? 지금? 아, 어떡해... 나 지금 밖에 있는데?

“언제 들어오시는데요?”

­ 하, 한 시간? 아니, 30분 이내로 맞춰볼게요. 제발 기다려줘... 어떡해... 나 오늘 진짜 하고싶었단 말이야.

이제는 하고싶다는 말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한다. 엄연히 마사지하러 온건데 말이다.

하지만 나 역시 이번에는 같은 목적을 띄고 이곳에 찾아왔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릴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알현실에 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덩치 큰 호두 녀석이 헉헉거리며 알현실에 들어와서 날 반갑게 반겨줬다. 연신 꼬리를 흔드는데 생각보다 기운이 없다. 전에 있던 남집사가 사라져서 그런가? 그렇다기엔 너무 기운이 없어보이는데.

나는 기운이 없는 녀석의 목덜미를 주물러주면서 붉은점들을 천천히 풀어줬다. 녀석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몸을 발라당 뒤집어 배를 보여줬다.

“귀여운 녀석... 덩치는 산만해서 집 지키는 재능은 하나도 없구나?”

호두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낑낑거리면서도 혀를 낼름낼름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당 쪽에서 와장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컹컹컹! 컹컹컹!

누굴 잡아먹을 듯이 짖어대는 걸 보니 초코가 분명했다. 호두가 뭐만 하면 광견병 걸린 것처럼 미친 듯이 짖어대는 도베르만 녀석. 녀석이 난장판을 저질러놓자 밖에 있던 정원사가 부리나케 달려와서 개를 진정시키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나는 겁먹은 호두를 진정시킨 후에 밖으로 나갔다.

컹컹컹! 으르르!

미친 개다. 미친 개가 분명했다. 밥그릇을 뒤집고 철창을 부셔버릴 듯이 달려드는 초코는 자기 몸이 다치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은 모양이다.

“초코! 초코!”

정원사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발정난 개처럼 앞다리를 들고 철창을 때려댔다.

‘아무리 개인 정원에서 키운다지만, 저런 식으로 소란을 피우면 이웃들이 민원을 넣을텐데.’

그러면서 정원사의 옆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도 궁금했지만, 정원사의 덥수룩한 수염, 희끗희끗한 머리털과 주름이 인상적이었던 거다. 도인보다는 한 20살 정도 어려보이는 인상인데 사람이 참 됨됨이가 좋아보인다.

정원사는 차분하게 초코를 다독였지만,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고 어쩔줄 몰라했다.

나는 그를 도와주고 싶어졌다.

“잠깐만요.”

내가 철창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정원사가 황급히 나를 말렸다.

“아니! 들어가시면 큰일나요. 위험합니다.”

“괜찮아요.”

사실 괜찮지 않았다. 사냥개인 초코가 날 물수도 있을 터. 사냥개의 송곳니는 상당히 날카로워서 자칫 잘못하면 중상을 입을 수도 있는 걸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은 있었다.

내가 이 녀석을 치료해줄 수 있다는 확신.

녀석의 짧은털 곳곳에 숨겨진 광분의 원인들이 눈에 밟혔던 거다.

정원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지켜봤고 나는 그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한번 더 보내고 철창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크르르­

자기보다 덩치가 큰 생명체가 들어오자 쉽사리 덤비지는 못하고 주의를 주는 초코. 녀석은 사냥본능이 일어난 게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싶었던 거다.

따라서 공격을 하지는 않지만, 내가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자신을 공격하는줄 알고 도약을 했다.

나는 기다리고 있다가 옆으로 살짝 피했고 녀석은 목줄이 차져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닿지는 않았다.

나는 손을 뻗어서 초코에게 내가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줬다. 추가적으로 널 공격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주면서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이런 자세를 본적이 있었다. 맹견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다큐멘터리. 물론 본다고 해서 다 따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에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확신이 있을 뿐이다.

“기다려. 기다려.”

나는 조용히 말하면서 조금씩 초코에게 다가갔다.

크르르­

그러나 여지없이 날아오는 공격. 나는 어쩔 수 없이 녀석의 목덜미를 콱 움켜잡았다. 심한 몸부림이 있을 법도 했지만, 내가 목덜미를 잡는 순간 녀석은 얌전해졌다.

붉은색 점을 제거했기 때문에 근육이 느슨해지면서 힘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초코의 몸 뒤쪽으로 돌아들어가 다리며 옆구리 부근에 있는 붉은점들을 빠르게 제거해서 녀석을 앉게 만들었다.

멀찍이서 쳐다보는 정원사는 놀란 눈을 떴다.

그래, 이게 바로 희열감이라는 것이지. 처음 보는 사람이 내 능력을 봤을 때의 경이롭게 바라보는 저 시선이 날 기쁘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수는 없다.

나는 초코의 퍼렇게 물든 다리를 지나 발끝으로 손을 향했다. 그리고 발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재빨리 빼냈다.

유리조각이었다.

“유리조각이네? 유리조각이 왜 정원에... 혹시 짐작 가시는게 있으세요?”

“... 모르겠는데요.”

정원사는 전혀 짚이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정원사가 모르면 누가 그걸 알겠는가.

어쨌든 유리조각을 빼낸 이후에 초코는 얌전해졌다. 출혈이 있어서 정원사가 구급키트를 가져와 상처를 씻고 약을 발라줬다.

“얼마 전부터 아주 난리였거든요. 호두가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이 녀석이 미친 듯이 짖는 바람에 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그때는 유리조각을 발견하지 못했거든요.”

“어딘지 모르겠는데 그 병원은 앞으로 가지 마세요.”

“그래야겠네요.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초코 발바닥에 유리조각이 붙어있는지는 어떻게 알았나요?”

“뭐... 초코가 아주 미세하게 발을 절더라고요.”

“그렇군요... 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어요. 그나저나 마사지사 맞으시죠? 대단히 유능한 분이시네요.”

정원사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는 다시 자기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그나저나 이상하다. 유리조각은 유리조각인데 왜 호두가 뭐만 하면 미친 듯이 짖어댔을까? 설마...

아니다. 아니겠지. 그건 정말 동화같은 일이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져버리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한서연이 정원으로 걸어들어와서 인사를 했다.

“오래 기다렸어? 왜 안에서 안 기다리고 여기 있어?”

그녀는 나에게 말을 하면서 힐끔거리며 정원사 쪽을 봤다.

“잠깐 일이 생겨서요. 안으로 들어가죠. 오늘은 제가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게 있어서요.”

“부탁? 무슨 부탁?”

나는 안으로 들어가면서 한서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차피 정원사는 일하는 중이고 우리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한서연은 몸을 살짝 빼내면서 옆으로 멀어졌다.

“왜, 왜 이래? 이, 일단 안으로 들어가.”

이상하다. 대체 누구한테 나와의 관계를 숨기려는건지 모르겠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한서연은 내 몸에 밀착하면서 내 얼굴을 쓰다듬었다.

“왜? 무슨 부탁인데?”

순식간에 돌변한다. 그런데 그녀의 애교가 내 눈을 돌아가게 만들어서 구태여 다른 질문을 하지 않게 됐다. 찰싹 달라붙은 가슴. 가슴골이 얼마나 찰지게 생겼는지 침을 꼴깍 삼킬 정도였다.

나는 아까 다 끌어안지 못한 그녀의 호리병같은 허리를 끌어안아 내 쪽으로 당겼다.

“오늘 나 좀 괴롭혀줘요.”

“... 어?”

한서연은 무슨 미친 소리냐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 *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