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3화 〉 74화 (73/173)

〈 73화 〉 74화

* * *

“신용섭이 여기 와 있다고요? 왜요?”

“왜긴 왜야. 전에도 내가 말했잖아. 그 인간은 어떻게든 널 추락시키려고 여길 찾아올 거라고 했잖아.”

근데 왜 하필 오늘이냐는 얘기다. 오늘은 중요한 계약이 있는 날이니까.

아무래도 최원재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더 곤란해하는 눈치였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말했다.

“너 들어오면 바로 알려달라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계약만 빨리 끝내고 신용섭 만나러 가자.”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윗층 계단에서 누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바라봤고 천천히 내려오는 발끝을 볼 수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최원재가 알려주지 않아도 나는 그 발걸음의 주인공이 신용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릎이 보이고 마침내 허리 위쪽이 다 보였다.

생각했던건 되게 통통한 느낌의 아저씨일줄 알았는데 키가 훤칠한 미남이었다.

“오셨나보네요? 그쪽이 강준현 씨?”

나는 당장 대답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 있었다.

“어... 그러니까.”

원래 계획이 수틀어지자 최원재도 버벅였다.

한층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의 신용섭이 내 앞에 딱 서서 자기 허리춤에 양손을 올려놓았다.

그는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내가 입은 검정색 옷보다 훨씬 밝은 베이지톤의 슈트를 입었다. 그가 허리춤에 손을 얹자 펄럭이며 슈트의 뒷단이 위로 치솟았다 떨어졌다.

“강준현 씨가 말한 내용 사실이예요?”

“... 네?”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 사실이냐고.”

“어떤 내용을 말씀하시는건지.”

“사실인가보네.”

신용섭은 말을 끝내고 눈살을 찌푸렸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너무 손쉽게 진심이 아니었다고 말하면 되는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거다.

무의식적으로 반항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내 앞에 서 있는 이 완벽해보이는 남자에게.

“오늘 실력을 한번 볼까요? 원장님.”

“실력이라니? 무슨 방법으로요?”

“샵에 왔으니 걸맞는 방법을 택하면 될 일이죠. 마사지사들이 실력 확인을 하는데 뭐 다른게 필요하겠어요? 이를테면 직원들이 쇼핑을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거든요.”

신용섭은 나와 신이설이 가져온 쇼핑백을 흘깃거렸다.

“아, 이건...”

“뭐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아까 뭐 계약에 대해서 얘기하시는거 같던데.”

나와 최원재는 동시에 깜짝 놀랐다.

나무리 귀가 밝아도 우리의 대화가 위층까지 들리지는 않았을 거다. 도청기라도 달아놨나.

“이 분이 그 분이신가?”

신용섭은 한서연의 위아래를 한 차례 훑었다.

“우리 구면이죠? 한서연 씨... 맞나요?”

“신용섭 씨? 그 TV에 나오시는?”

“아, 예. 반갑습니다. 지난번에 몇 번 마사지 해드렸었죠. 집에 개를 키운다는 걸 숨기셨어서 더 이상 예약을 잡아드리기 힘들었지만.”

“속인게 아니라... 그냥 말을 안 했을 뿐이에요.”

“뭐, 과거의 일은 그만 얘기하고. 이 분은 이미 제 마사지를 받아보신 분이니까 비교가 쉽겠네요. 혹시 여기서 강준현 씨한테 마사지를 받아보신 여.자.분. 있으세요?”

지금 카운터 쪽에 여자라면 한서연과 신이설 밖에 없다. 그런데 신용섭은 뻔히 대상을 정해놓고 대답을 기다렸다. 어떤 성격일지 대충 짐작이 갔다.

신용섭은 한참 신이설을 보다가 문득 고개를 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신이설은 몸을 웅크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저, 저요?”

뭘 모르고 대답한 것 같기는한데 맞는 소리다. 짧은 마사지였지만, 어쨌든 마사지는 마사지였으니까.

“그럼 됐네요. 이렇게 하죠. 강준현 씨는 한서연 씨를 마사지하고 저는 이 분을 마사지하겠습니다. 그렇게 30분을 마사지하고 바꿔서 해보죠. 이렇게 하면 그 어느 때보다 비교하기 편할 테니까. 그 다음에 두 여성분은 좋았던 마사지사에게 표를 하나 주시면 됩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신이설이 전황을 파악했는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저는 준현쌤 편을 들겠죠. 저희 샵 직원인데요?”

“아, 순서는 무작위입니다. 후면부 마사지를 할 것이고 우리 두 사람 중에 누가 먼저 들어갔는지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얼굴을 보여주거나 말로 알려주는 꼼수는 동영상 촬영을 통해 방지할 거고요.”

“아...”

“동영상 촬영이요? 저희가 촬영같은 걸 동의할 이유가 없잖아요?”

“몇몇 샵에서는 오히려 안전을 위해서 촬영을 하기도 합니다. 문제될 게 전혀 없을텐데요. 혹시 안에서 유사 성행위라도 하는 게 아닌 이상에요.”

뜨끔했다, 시발.

생각해보니 내가 했던 마사지들은 다 유사 성행위가 아닐까. 간신히 커트라인을 넘나드는 수준이라고는 해도 어쨌든 여자로 하여금 성행위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야한 손길이니까.

그렇다. 어쩌면 내가 했던 마사지는 진짜 마사지가 아닐 수도 있다.

기초부터 착실하게 배운 신용섭은 고난이도 관절치료 기술까지 익혔을 거다. 그런 그가 내게 치욕을 당했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사실 정신 나간 사람은 그가 아니라 나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꽉 차는게 느껴졌다. 여기서 쪽팔리게 되면 VIP 계약을 앞둔 한서연도 잃게 될 거다.

내가 뭐라고 신용섭에게 비빌 수 있겠는가. 그는 나라에서도 인정받는 마사지사가 아니던가.

“강준현 씨.”

내가 가만히 서 있자 신용섭이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서 있기조차 힘든 거 같은데. 들통나기 전에 빨리 가면을 벗는게 어때요?”

“무슨 말씀이시죠?”

최원재가 나 대신에 대답을 했다.

“하. 대변인 없이는 말도 못하는 풋내기인가? 보세요. 얼굴 피부가 하얗게 질리고 관자놀이 쪽의 핏줄이 섰죠? 맥박이 빨리 뛰고 호흡도 가쁘잖아요. 긴장해서 땀이 맺히기 시작할 겁니다. 이런 애송이 주제에 어딜 감히 나한테 덤빈건지. 오늘 일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줘야겠죠.”

“이봐요, 신용섭 씨. 그러면 우리 준현이가 몸이 많이 안 좋은거 같은데 승부는 다른 날에 하겠다고 하는게 먼저 아닌가요?”

“하하. 웃기는 일이네요. 방금까지는 계약서에 도장 찍으려고 혈안이라도 된 사람들처럼 굴었으면서요. 아니지. 그 전에 명품관에서 쇼핑하고 온 사람이잖아요? 참 재밌는 샵이란 말이지. 몸 상태가 안 좋아서 승부를 기피한다? 이 사실을 메스컴에 알리고 맨즈케어 잡지사에 알리면 아주 재밌는 상황이 연출될거 같네요.”

“그러니까 몸 상태가 안 좋다잖아요...”

“아닙니다, 원장님.”

나는 그들의 대화를 막아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은 내가 벌인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내게 있었던 기적같은 일들이 수동적인 일들이라는 것에서 생각이 멈춰 섰다.

언제까지 남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내 스스로 이 역경을 극복해야 했다.

물론 실력적인 면에서 내가 신용섭보다 떨어지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나만의 능력이 있다.

그 날의 컨디션이 아니라 1년을 바꾸는 능력이.

나는 내 손을 믿었다. 두 손을 내려다보다가 턱을 치켜들어 신용섭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짙은 눈썹 밑으로 활활 타오르는 듯한 눈빛이 내 가슴을 꿰뚫었지만, 나는 꿋꿋하게 참아냈다.

“하겠습니다. 그 승부.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신용섭은 재밌다는 듯 씩 웃어보이곤 팔짱을 꼈다.

“뭐죠?”

“동영상 촬영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제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이건 사실이었다.

내가 마사지 능력에 근본이 없으니 전문가의 눈에는 내 행동이 아무 이유없이 살을 만지는 행위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할 거다. 또한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건 아무래도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마사지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구소민을 통해 증명했다.

“그러면 꼼수를 부릴지 안 부릴지 어떻게 알죠?”

“결단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용섭은 더 뭐라고 하려다가 지그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내가 진심을 얘기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양심에 맡기도록 하죠. 그럼 승부를 시작할까요? 하지만 뭔가 걸려있지 않으면 재미가 없겠죠? 강준현 씨, 강준현 씨가 이겼을 때 나한테 뭘 요구하고싶은지 얘기하세요.”

“...”

나는 잠시 생각했다.

신용섭을 이길 확률은 상당히 적다. 그의 말마따나 내가 꼼수라도 쓰지 않는 이상에야 이기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사리 질 생각도 없다.

어떻게든 내 능력을 최대로 활용해서 이 판도를 뒤집어 놓을 생각이다. 마사지 받는 사람은 두 명. 그렇다는 건 동점이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만에 하나 내가 이기는 경우에는?

“저에게 카이로프라틱 기술을 전수해 주세요.”

“... 뭐라고요?”

“카이로프라틱 관절치료 기술 전수해달라고 했습니다.”

“푸하핫! 그걸 배운다고 진짜 할 수 있을거 같아요? 참고로 허가없이 치료라는 단어를 마구 갖다 붙이는 짓은 하지 마세요. 샵 문 닫는 일 생기니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최원재를 바라보자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용섭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약품을 판매하는 사람은 법적으로 정해져 있고 치료를 할 수 있는 것도 의사밖에 없어요. 아무리 자격증이 있다한들 말이죠. 저는 제 입으로 누군가를 치료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하고 다니지 않아요. 다만, 효과가 좋다. 시원하다. 카이로프라틱을 한다. 이런 식의 표현을 할 뿐이죠. 나는 기술을 제대로 알고 쓰지 못할 사람한테는 알려주지 않아요.”

“그런 문제야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가면 될 문제겠죠.”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신용섭은 다소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럼 이제 신용섭 씨가 이겼을 때 원하는 걸 말씀하시죠.”

그는 다시금 나를 잡아먹을 듯이 째려봤다.

대체 이 남자가 이 내기에서 이겨서 내게 원하는게 뭘까.

아니, 생각해보니 답은 뻔했다.

“인터뷰에 나가서 얘기하세요. 나는 신용섭의 발가락 떼만도 못한 존재라고.”

생긴건 참 멀쩡하게 생겨서 속은 애새끼마냥 좁은 놈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