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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 73화 (72/173)

〈 72화 〉 73화

* * *

내 VIP가 되어서 박유영처럼 자기도 섹스를 하고 싶다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다 된 밥이다.

후하. 후하.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에 과감하게 말했다.

“제 VIP가 되면 어디서 마사지를 받으시게요?”

“생각해둔 데가 있어요.”

“어디?”

“여기서 가까워요. 가, 갈래요?”

“시간이... 두 시간 정도 있나?”

“그, 그런거 같아요.”

우리는 앉은채로 허겁지겁 나갈 준비를 했다. 벗었던 외투를 입고 꺼내놓은 지갑과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주변 온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뜨끈뜨끈해진 서로의 촉감. 이와중에도 손은 놓지 않았던 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원래 생각지도 않은 꽁떡이 제일 설레는 법이다. 그것도 상정된 미래라는 것이 놀랍도록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그것보다 상대가 신이설이라는게 더 놀랍지... 그녀랑은 어떻게든 연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근데 손 계속 잡을 거예요?”

역시 싹퉁바가지. 어차피 우리 이따가 섹스할 거고 손 잡고 허벅지 잡고 엉덩이와 허리를 붙여먹을건데 이제와서 뭔 손 타령인지.

여자를 때리는건 육봉뿐이라고 했었지. 신이설도 서아 때와 마찬가지로 육봉 교육대를 보내줘야겠다.

나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잡았던 손을 놓았다. 그리곤 그녀가 이끄는 데로 뒤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얼마 뒤에 일어났다.

그녀를 따라 명품 매장을 완전히 벗어나 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탔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나는 거였다.

킁킁.

냄새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그랬더니 신이설의 바로 앞쪽에 한서연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집사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 이 옷 안 입고 온다고 했잖아.”

“사모님... 저는...”

“너도 마찬가지야. 어휴, 아까부터 호두 털 묻은 거 구찌 직원이 볼까 무서워서 얼굴이 뻘겋게 벌벌 올라오더라. 에휴에휴.”

“그럼 어떡합니까... 요즘 호두가 집안을 미친 듯이 누벼대는 걸요.”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야?”

“아뇨. 그런게 아니라... 그 마사지사가 온 이후로 호두 다루기가 너무 어려워졌어요. 몸집은 황소만한데 짖어대면서 집안을 들쑤신다니까요... 옷장 안에도 들어가고 저희 창고에도 여러번 들어가서 옷이며 카펫이며 털이 잔뜩 묻었어요.”

“그걸 다 털어내는 게 네 일이 아닐까?”

“사모님...”

“그놈의 사모님, 사모님 좀 그만해.”

“그럼 어떻게 부르나요?”

“주인님.”

“전 개가 아닙니다, 사모님.”

익숙한 냄새다 했더니 호두의 냄새였다. 호두 냄새가 얼마나 강렬한지 하루밖에 맡아보지 않은 냄새인데도 바로 알아맞출 정도였다.

근데 저 두 사람이 여긴 어쩐 일일까.

“그 마사지사가 다시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다시 불렀어. 근데 왜? 나는 마사지 받으려고 하는건데 너는 왜 그 사람이 필요한데? 너 그 사람 마음에 들어?”

“무, 무슨 그런 말씀을? 이성적으로 말하시는 겁니까?”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 그래. 농담으로 듣고 다음으로 넘기면 되지.”

“하하... 그렇죠. 아니, 그게요. 호두가 문제가 아니라 초코가 문제예요. 호두를 밖에서 기르려고 하면 초코가 아주 난리거든요. 엄청 짖고 침을 질질 흘려대서 호두가 선 채로 오줌을 질질 싼다니까요.”

“마치 너가 침대 머리맡에서 좆물 질질 싸는 것처럼?”

“아... 사모님... 여기 사람들이 다 듣잖... 어? 강준현 씨?”

“뭐? 헐... 강준현 씨?”

나는 얼굴을 돌려 시선을 피하려다가 딱 걸려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누구예요?”

“아, 저분이 한서연 님이예요. 이미경 님이 소개해주셨던...”

“아! 안녕하세요! 저 샵 실장이예요.”

신이설이 깍듯하게 인사하자 한서연이 신이설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한 차례 훑었다. 딱 보기에도 기분이 나쁠 수 있는 제스쳐였지만,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인 신이설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뭐, 안녕하세요.”

근데 웃기는 건 우리의 만남이 에스컬레이터였기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내려가면서 일어났다는 거다. 이보다 더 어색한 경우가 있을 수 있나?

초면인 사람이나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나 인사를 한다는 건... 참 어색한 일이었다.

“두 사람, 여기 무슨 일이예요? 명품이랑은 별 연관성이 없어보이는데.”

나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이설과 한서연의 불똥 튀는 대결을 예감했다. 신이설이 아무리 자낳괴라고 해도 자존심이 강해서 선을 넘는 치욕적인 발언을 넘기지 않는다.

신이설은 웃으면서 한서연의 말을 받아쳤다.

“원래 속이 빈 사람일수록 겉을 치장하려고 명품을 사는 법이잖아요? 어? 근데 손에 든 그거 구찌 상표 아닌가요?”

“뭐? 푸흡. 속이 빈 뭐? 이게 지금 빙 돌려 까고 있네?”

이젠 하다 못해 에스컬레이터에서 둘이 말싸움을 하고 있다.

“이게라뇨. 저도 나이 먹을만큼 먹었는데요. 아, 나이가 너무 많아서 내가 거의 갓난아기 수준으로 보이시겠구나.”

“저기... 이제 그만하세요. 사모님도 그만하세요, 제발.”

“너 지금 저 여자 편 드는 거야? 내가 갑이고 저 사람이 을이야!”

“제가 왜 을이예요? 들어보니까 계약도 안 하신거 같은데.”

“곧 할거 거든요. 그러면 그쪽이 나한테 이런 짓한거 후회 안 할 수 있어요?”

“죄송한데 저희도 아무 고객만 받는게 아니거든요. VIP 고객으로 들어오려면 실장인 제 승인이 필요해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마사지를 받을 수 없다는 뜻이거든요. 오히려 저한테 잘 보이셔야죠.”

“이잌! 말 다했어요, 지금?”

나는 참다 못해 말했다.

“자, 둘 다 그만하세요. 더 이상 싸우면 두분 다 마사지 안 해드릴 거예요.”

내 말에 신이설은 억울하다는 눈길을 보냈다. 왜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냐는 눈짓이었다.

재밌는 점은 두 사람 다 내가 나서자 싸움을 딱 그쳤다는 거다. 다행이었다.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부분에서 싸웠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한서연에게 먼저 질문을 던졌다.

“집사 분이랑 쇼핑 나오셨어요?”

“아, 뭐. 가끔씩 나와요.”

그게 아니라 대놓고 외도를 하려는 거겠지.

집사를 동반하는 게 아니라 데이트를 한 거다. 아까도 들었지만, 침대 머리맡에서 좆물을 질질 흘린다는 소리를 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두터워 보였다.

“이 사람이랑 사귀어요?”

한서연이 신이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슨 곱등이라도 바라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아뇨. 사귀는 사이 아닙니다.”

“후. 이대로 샵으로 복귀?”

“어...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사실 샵 실장이랑 쇼핑을 한 것도 이상한데 이대로 샵으로 복귀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들어가는 김에 저 봐주세요.”

“네?”

나는 신이설을 봤다. 그녀는 이미 포기했는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내가 신이설을 볼 때 집사도 한서연을 바라봤다. 한서연은 여전히 나를 잡아먹을 듯 보고 있었고 집사 쪽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두 사람도 쇼핑 끝나고 섹스를 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그 말은 즉슨, 집사 저 새낀 한서연의 S성향 섹스를 좋아하는 M성향이라는 소리다.

“샵 가서 저 마사지 좀 해달라고요. 내친 김에 계약도 좀 하고. 여기 실장님이 말하신대로 실장님 승인 안 떨어지면 VIP 계약도 못한다면서요.”

“아, 그건 그렇죠.”

“물론 이번 마사지만 여기서 받고 이 다음부터는 우리 집에서 봐줘야 한다는게 계약 조건인건 알고 있죠? 미경 언니가 원장님이랑 얘기 됐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신이설 쪽을 보는 한서연. 두 사람의 신경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네, 그렇게 하셔도 되요.”

이미 체념한 신이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얘기했다. 그녀도 이미 최원재에게 들은 얘기가 있었던 거다.

나는 여기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냐. 아니면 돈이냐.

내가 고민을 하자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한서연은 약간의 강압성과 억지를 동반한 눈길이었고 신이설은 따스하면서도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촉촉한 눈길이었다.

이런, 젠장.

“저는...”

내가 선택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

운전석에서 집사가 운전을 했고 나와 신이설은 뒷좌석에 탔다.

냉랭한 기류가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샵에 도착했다. 그 동안 신이설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라? 왜 벌써 왔어?”

최원재는 너스레를 떨며 말하다가 뒤에 한서연이 따라 들어오자 금세 표정을 바꿨다.

“안녕하십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에스테틱입니다.”

“원장님. 이분이 이미경 님이 말씀하신 한서연 님이세요. 오늘 마사지 받고 계약까지 하기로 하셨어요.”

“어, 어... 반갑습니다. 저는 이 샵의 원장입니다.”

“여기는 원장님이 카운터도 보시나봐요.”

“아하하. 그게 좀 그렇게 됐네요.”

“나오세요.”

신이설은 카운터로 들어가며 최원재를 향해 무덤덤하게 말했다.

삐졌다. 그 신이설이 삐져버린 거다.

젠장. 나중에 잔뜩 예뻐해주고 훈육시켜줘야지.

“잠깐. 나 좀 보지.”

그런데 최원재가 내 팔을 이끌고 복도 쪽으로 함께 걸었다.

“지금 그 인간이 여기 와 있어.”

“예? 누구..?”

“누구긴 누구야. 신용섭이지.”

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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