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5화 〉66화 (65/173)



〈 65화 〉66화

나는 출발하기 전에 최원재와 신이설에게 허락을 구해야만 했다. 구소민보다는 구소민의 아버지가 더 위급하기 때문에 병원에 방문하겠다고 미리 말을 했고 어쩌면 며칠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해뒀다.
최원재 입장에서는 내가 꼭 필요한 인재이기도 했고 요 며칠 사이에 부쩍 나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져 있던 터라 단숨에 허락해줬다.
신이설은 그럼 자기는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가슴 마사지를 더 해줘야 하는거 아니냐며 툴툴거리더니 결국에는 알겠다고 말했다. 뭐, 원장님이 허락해줬는데  깟게 뭐라고 날 막겠는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구소민의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은 서울 근교의 한적한 산골에 위치해 있었다.
당연히 대중교통이 없는 곳이기에 나는 망설일 것 없이 택시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병원 앞에서 나를 발견한 구소민은 저만치에서 걸어오는 구세주를 발견한 것처럼 나를 반겼다. 나 역시 그녀가 얼마나 간절한지 알고 있었다. 이제 그녀에게는 병원비를내줄 임태훈도 없으니까.
나는 그녀의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본주의의 일환으로써 그녀를 마주 보려고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시발, 이놈의 찐따 천성... 어쩔 수 없는건가.
구소민은 이전에 살을 한 번 섞었기 때문에나를 자연스럽게 끌어안았다. 뭉클한 감촉이 가슴께에 닿았다. 왜 여자의 가슴은  번 만져본 건데도 또 그 감촉이 궁금할까? 촉감에 치매라도 걸린 걸까. 참 이상하다.

“와줘서 고마워요.”
“아니야. 약속했잖아.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 뿐이야.”
“태훈 오빠 이외에는 여기 오신 분은 준현쌤이 처음이예요. 아무한테도 말 못했거든요.”

나는 지그시 구소민의 인중 쪽을 쳐다봤다.
지난번에 키스할  잠깐그녀의 미래를 봤었고, 그녀와 섹스를 한 이후에 그 영롱했던 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녀의 인중에 다시 휘황찬란한 빛깔이 감돌고 있었다. 저번보다 빛이 희미하긴 하지만, 어떻게 봐도 내 능력에 의해 보이는 반점이다.

‘미래가 갱신된 후, 다시 운명이정해진 건가?’

이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소식은 들었어요. 그럼 태훈 오빠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래도 전여자친구라고 임태훈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나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는 쪽이었다. 개떡같은 녀석이어도 엄연히 말하면 한때 자길 도와줬던 사람이기도 하다.

“법의 판결을 받을 거야.”
“서아 언니가 결국 합의는 안 해주겠다고 한 모양이네요.”
“그렇지.”

사실은 내가 합의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지만.
구소민은 슬픈 듯이  눈을 밑으로 깔았다. 하지만 어느순간 굳은 결심이 섰는지 턱을 치켜들었다.

“저는 이제부터 전적으로 준현쌤을 믿을게요.”

그러자 구소민의 인중에 있는 영롱한 빛깔이 확 빛나기 시작했다.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빛깔이 뚜렷해질수록 그녀의 운명이 확고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아무리 멍청이여도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키스를 해보지 않아도 구소민의 미래는 내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  있다. 나의 ‘기적의 손’에.

“아버지한테 가자.”
“네.”

나는 구소민을 따라 병동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의사가 이외에는 마땅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내가 그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왔다는 사실은 비밀이었다. 다만 문제는 구소민의 아버지였다. 과연 아버지가 내게 치료를 맡길까?
아니나 다를까 병실에 도착한 나는 구소민의 아버지에게 인사를하자마자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의 이름은 구병훤. 이름만 봐도 왠지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단순히 기분탓은 아니었나보다. 그리고 이름이 병훤? 시발...

“돌아가라고 해라.”
“... 아빠... 그래도...”
“돌아가라고 하라니까. 내가 말했잖냐. 전에 데려왔던 사람한테 도움받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았다. 근데 뭐라고? 그 사람이 성폭행범이었다고? 날 돕다가 네 인생 망치는  보고 싶지 않다. 돌아가라고 해라.”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구태여 끼어들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구병훤의 움직일 수 없는 다리는  뻗은 채로 있었고 발은 맨발이었다. 다리쪽은 보이지 않아서 모르지만, 발끝이 이미 푸른빛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범위를 보아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무슨 스머프 마냥 피부가 와전히 푸르딩딩했다. 이 모습을 구소민이 봤다면 눈물을 찔끔 흘렸을 정도다.

“아빠.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선택한 삶이예요. 내 인생에서 아빠를 빼고 생각못해.”
“이상한 소리하지 말아라. 아빠 마음 약하게 만들 생각이라면 그만두는게 좋을 거야.”

구소민은 아무리 말해도 아버지가 설득되지 않을  같자날 향해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하.
이 마사지 능력은 여자를 위해서만 사용할줄 알았는데 최원재 이후로 남자한테 쓰는건 처음이 될 거다.
이게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할 수 있는 거라 나는 조금 진지하게 감정을 이입할 필요가 있었다.
스읍- 후.

“아버님.”
“내가 왜 그쪽 아버님이요?”

와, 처음부터 개띠껍네.

“그쪽이 내 딸 남자친구라도 된단 말입니까?”
“그런건 아닙니다. 불편하시면 병훤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 그러쇼.”
“병훤 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병원에서 힘을 쓰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재활운동을 하신다고도 들었고요.”
“뭐, 쓸데없는 얘기를 들으셨구만. 그쪽이  바 없는 일이요. 어서 돌아가시오.”

나는 주체하지 않고 곧바로 구병훤의 손을 잡았다. 구병훤은 뿌리치려고 했으나 순간적으로 힘이 빠지는 걸 느꼈을 거다. 내가 재빨리 그의 손에 있는 붉은점을 지워 없앴으니까.

“병원에서 재활운동을 시킨다는 건 회생의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제가 힘을 쓸수 있다는 뜻이죠.”
“그쪽이 뭔 수로 날 돕는다는 거요?”

말은 저렇게 해도 내 손을 뿌리치지 않는 걸 보니 들을 마음은 생긴 듯했다.
옆에서 구소민이 내 팔을 조용히 끌어안았다. 불안했는지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제가 임태훈 씨처럼 병훤 씨에게 금전적인 뭔갈 해드리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임태훈 씨처럼 대가성 교제를 원하지도 않고요.”
“...”
“저는 정말 진심으로 소민이와 병훤 씨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 돕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인간은 누구나 자기 만족을 위해 행동을 결정하는법이야.”
“물론입니다. 저 역시 그런 행동결정의 절차를 밟았고요. 당연한 말씀이지만, 제가 원하는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병훤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신 후에 말씀드려도 늦지 않을  같습니다. 약속드리지만, 금전을 요구하거나 교제를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구병훤은 한참동안 나를 꼬나보고 뜯어봤다. 그 때문에 몇 분간 침묵이흘렀다. 옆에서 매달려있는 구소민은 새끼 고양이처럼 나한테 조금씩 더 달라붙었다.
구병훤과 구소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대충 예상이 된다. 드라마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딸바보 아빠와 아빠바라기 딸같은 느낌이다.
구소민은  아버지가 내게 꼭 마음을 열어주길바라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연륜 있어보이는 짙은 눈썹과 깊은 고뇌로인해 자글자글해진 눈가의 주름. 샤프한 턱선과 세련되 보이는 깔끔한 헤어스타일까지. 사고는 자동차사고라고 들었는데 이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그가 고만고만한 회사원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말투를 비롯한 특유의 자존감과 딸을 향한 이타적인 생각 등을 고려해봤을 때,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이 정도 생각을 마치고 있을 즈음에 구병훤이 다시 입을 열어 침묵을 끝냈다.

“하... 무슨 생각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의사도 못한 일을 그쪽이 무슨 수로 하겠다는 건지.”

내 팔을 붙잡고 있는 구소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마음의 문이 열린 거다.

“저는 테라피스트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사지사고요, 지금부터 병훤 씨의 다리에 생긴 문제를 차근차근 맞춰나갈 겁니다.”
“그러니까...”
“아빠...”

이번에는 구소민이 자기 아버지의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갰다. 내가 구병훤의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세 사람의 손이 함께 포개졌다.

“내  믿고 한번 맡겨봐. 준현쌤, 진짜 능력있는 분이셔.”
“소민아...”
“진짜야. 아빠. 진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자기 딸이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아버지는 이런 딸의 행동에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뭐, 믿지 않으면 사실 그만 손해다.
내가 그를 속이려고 하는 것도 아니니 진심이 전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럼 한번 맡겨보마.”
“하아... 미안해요, 쌤. 저희 아빠가 완전 옛날 사람이라...”
“소민아,아빠 귀는 멀쩡하다.”
“그래도 이렇게 결정해줘서 너무 고마워. 흑... 진짜  너무 힘들어서 무서웠어. 아빠가 고집 때문에 치료 안 받겠다고 하면 어쩌나 해서.”
“소민아...”

구소민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눈물 한방울이 떨어질 때마다 구병훤의 마음이 얼마나찢어질 듯 아플지 상상이 갔다.
두 사람의 진지한 모습에 나 역시 열의가 끓어올랐다.
감동적인 장면 연출은 여기까지 하고 바로 일을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럼 지금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소민아, 이만 집에 돌아가봐.”
“어... 저도 여기 있을게요.”
“아니, 너는  인생이 있으니까 어서 돌아가. 시간이 되고 궁금해지면 가끔 얼굴 비추는 정도만 해. 그것만으로도 아버님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실 거야.”
“몇 일 여기 있으시게요?”
“그건 모르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나조차도 이 정도로  공사를 해본적이 없으니까.
나는 소매를 걷고 구병훤의 발쪽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푸른점 위에 손을 얹었다.
발목쪽에 있는 피부는 부드러웠으나 푸른점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손을 댄 부분의 푸른점이 푸석하게 하게 느껴졌다.
아니.
다른 사람들처럼 어느 한 부분이 딱딱한 점으로 이뤄진 게 아니었다.
나는 불안한 예감을 끌어안은 채 구병훤의 병원복 바지 밑단을 접어 올리기 시작했다. 허벅지까지 올린 순간, 나는  일이 쉽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반신 전체가 전부 딱딱한 점으로 이뤄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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