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61화
“관계를 주기적으로 맺어주시는 게 한서연 씨에게 필요한 솔루션입니다.”
내가 말을 마치자 한서연은 의자에 앉은채로 상체를 돌려서 날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전혀 거리낌없이 말했다.
“섹스요?”
나는 순간 입안에 있는 걸 뱉을 뻔하다가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했다.
반면에 한서연은 노골적인 말을 내뱉고도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네.”
나는 “네, 섹스요.”라고 대답하려다가 그냥 이렇게만 대답했다. 도무지 뒷 단어가 입에 붙지 않았다.
그랬더니 한서연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섹스는 주기적으로 하고 있어요.”
“..?”
남편이랑은 관계를 거의 맺지 않는데 섹스는 주기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 다른 남자가 있다는 소리. 외도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는 소리렸다.
다시 상체를 원상태로 돌려 정면을 보는 한서연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남편이라고 딴 여자 안 만나겠어요? 한창 성욕이 활달한 나이에 고자가 아닌 이상에야 딴 년이랑 붙어먹고 다니겠죠.”
이게 말로만 듣던 쇼윈도 부부인가. 이미경을 부부 동반 사교모임에서 만났다고 했는데 모임에서는 진짜 사랑하는 부부처럼 서로를 아끼는 척 하다가 뒤 돌아서는 순간 바로 남남이 되어버리는 현실.
나는 아무말 없이 계속 어깨를 주물렀고 말은 한서연이 혼자 다했다.
“그쪽이 호두 치료해줘서 내 비밀을 얘기하는게 아니에요. 어차피 다 아는 사실이거든요. 집사도 그렇고 남편도 그렇고.”
그래서 이런 화두를아무렇지 않게 던질 수 있었던 거였다.
“나름대로 괜찮은 애들이랑 파트너를 하고 있으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이런.
이런 여자의 파트너 정도되려면 얼마나 잘생겨야 되는걸까. 키도 크고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겠지. 더불어 엄청 어릴거다. 이미경같은 여자들이랑 끼리끼리 몰려다니면서 묵혀놨던 욕정을 풀 것이다.
남자 90% 이상은 이렇게 생긴 여자라면 이런거 저런거 따지지도 않고 바로 고맙다고 살을 섞어댈테니 원하는 남자를 쟁취하는 건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군요...”
“왜요? 내가 파트너 없었으면 선생님이 해결해주려고 했어요?”
나는 속마음을 들킨 느낌이어서 순간 움찔했다. 내 멈칫함을 느꼈는지한서연은 쿡쿡거리며 웃었다.
“호두 고쳐줬다고 날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예요. 내가 얼마나 눈이 높은데.”
“저는 그런 생각을 품은 적이 없습니다. 그저 몇 가지 조언을 해드리려던 것 뿐이었습니다.”
“그래요. 그럼 계속 해보세요.”
“네?”
“몇. 가. 지. 조언이라면서요. 하나 했으니까 더 해보시라고요.”
나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뭐라고 둘러댈까 하다가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속으로 손뼉을 쳤다.
“지금 상태에서알아볼 수 있는건 그게 다입니다. 이제는 마사지 배드에 누우세요.”
“아, 그래요. 접이식 배드를 벽에 세워뒀으니까 바로 내려서 펼치면 되요. 집사님더러 도와달라고 할테니까 저는 옷 갈아입고올게요.”
“네. 벗기 쉬운 가운으로 입고 오셔야 할겁니다.”
“벗기 쉬운?”
“네. 저는 맨살로만 마사지를 해드립니다.”
“... 아... 그렇군요. 뭐, 상관없어요. 미경 언니한테도 어느정도 들은 얘기니까.”
“잘됐군요. 이 부분 때문에 거부하시는 분들이 있으셔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입니다.”
한서연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에요.”
“무, 무슨 말씀을...”
“푸핫! 지갑 열기 어려울거라고요. 오늘하신 일에 대한 사례는 해드릴 테지만, 미경 언니 말만 듣고 바로 카드를 긁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였어요. 왜 그렇게 당황하고 그래요?”
“... 아까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이신줄 알았습니다.”
“뭐, 알아서 생각하세요. 저는 그럼 씻고 옷 갈아입고 올게요.”
음.
생각보다일이 쉽게 흘러가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호두를 치료해주고나서 내게 꽤 개방적인 듯했으나 그것들은 모두 연기였다.
한서연은 마치 내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내 마음을 다 읽고 있었다. 남자 경험이 많아서일까. 아니면 여러 사람을 많이 만난 경험에서 우러나온 행동일까. 어떤 경우라도 내게 그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다리도 쉽게 벌리고 지갑도 쉽게 열었으니까.
한서연에게는 뭔가 더 충격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이윽고 집사가 안으로 들어와서 마사지 배드를 알현실 가운데에 적절하게 깔아줬다.
그런데 그냥 나갈줄 알았던 집사가 내게 귀띔이라도 해주듯 말했다.
“사모님이랑 업무 외적으로 너무 가까워지지 마세요.”
“...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지만, 이유는 듣고 싶네요. 왜죠? 한서연 씨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사모님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적어도 내 상식선에서는 자기 고용인을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 꽤나도전적인 행동이었다. 그만큼 내가 걱정된다는 뜻일까.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몇 가지 가능성은 더 있었다. 예를 들어 집사가 한서연을 사모하고 있어서 질투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거나 한서연의 남편에게서 그녀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을물리치라는 부탁을 받았다거나.
‘이 정도면 소설 하나 나오겠는데.’
워낙 허황된 소리를 쓰다보니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대화할 때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걸 느끼지 못했는데요.”
“... 아무튼 제 말을 잘 유념하셔야 합니다... 더 가까이 지내시면 헤어나오지 못할 수 있어요.”
어?
이제보니 집사가 꽤 어려보였다. 그런데 나이도 나이지만, 중요한 건 외모였다. 화장을 하지도 않았는데 뚜렷한 이목구비와 군살없이 샤프한 턱선,그리고 사슴처럼 똘망똘망한 눈망울. 여장을 하면 잘 어울릴 것만 같은 미소년의 상이었다.
남자를 관찰하는 취미는 없어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데 상당한 미남이다.
“집사님,혹시 몇 살이시죠?”
“스물다섯입니다.”
“아. 그럼 여기서 일한지는 얼마나되셨어요?”
“3년이 다 되가죠. 군대 제대하고 바로 일하러 왔거든요.”
“그럼 한서연 씨에 대해 알만큼 아시겠네요.”
“뭐, 그렇죠.”
대충 얼버무리듯 질문을 했지만, 사실 속내는 따로 있었다.
스물다섯인데 제대하고 바로 일을 시작했다는 건 대학을 휴학했거나 혹은 아예 대학을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3년이나 일하고있는 걸 보면 스스로 이 일에 꽤 만족하고 있다는 얘긴데 아까 했던 말과 앞뒤가 안맞지 않나.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한서연이 말한 파트너 중에는 이 집사도 속해 있을 거라고.
보통 집을 관리하는 일은 경험이 많은 사람한테 맡기는 법이다. 그런데 이런 풋내기에게 집안 일을 시키는 이유가 뭐겠는가. 일도 시키고 뽕도 따려는게 아닐까.
나는 떠나려는 그의 등뒤로 그를 떠보기 위한 말을 꺼냈다.
“한서연 씨가 많이 힘들게 하나보네요.”
“네?”
집사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날 봤다. 나는 멍한 그의 얼굴에 다시금 적시타를 먹여줬다.
“한서연 씨가 많이 매력적이기는 하죠. 근데 아까 하시는 걸 봤을 때, 그닥 아껴주시는 것 같지는 않더군요. 속앓이를 꽤나 많이 하셨겠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그럼 이만 제가 할 일을 하러... 가보겠습니다.”
“네.”
아주 멀리 가슈. 머얼리.
나는 집사가 나가고 머릿속으로 10까지 센 다음에 문을 열어 밖을 살짝 봤다.
호두가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집사가 호두를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나는 걸어서저택의 안을 둘러봤다.
이런 곳이 한국에있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집이다. 이 정도 집에 살려면 대체 얼마나 돈을 벌어야 하는 걸까.
거실이라고 부를만한 공간에는 거대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위한 마호가니 가구들이 다채로운 느낌으로 집안을 장식했고, 벽에는 거대한 액자에 알 수 없는 화려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왼쪽 구석진 곳에서 물줄기가흐르는 소리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는 한서연이 샤워를 하고 있는 곳은 왼쪽이다. 그렇다면 오른쪽에는 뭐가 있을까.
나는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오른쪽 복도로 걸어갔다.
몇 개의 방은 굳게 잠겨 있었다. 또 몇 개의 방은 아주 쉽게 열렸는데 안에는 옷들이 잔뜩 있는 창고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방에는 침대가 있었고 그 외의 가구들은 아무것도 없는 곳도존재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위한 휴게실이 아닐까 했다.
그렇게 제일 막다른 곳까지 갔을 때, 나는 아주 비밀스러워 보이는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곳보다 문이 훨씬 작았는데, 딱 보기에도 창고처럼 보이는 작은 방이었다.
이런 곳의 문이 열려있을 리가 없었지만, 그냥 한 번 문고리를 돌려봤다.
달칵.
문이 열렸다.
나는 또 호기심이 발동해서 머리를 쑥 집어넣어서 안을 봤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근데 이 익숙한 냄새는 뭘까. 어디선가 맡아본 이 냄새.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다고 해야할까.
아, 이건 한서연의 냄새였다. 그녀의 향긋한 냄새가 여러 가지 냄새와 오묘하게 섞여서 기묘한 냄새를 풍겼는데 이렇게 다채롭게 섞인 냄새 또한 내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나는 안쪽으로 몸을 더 넣어서 전등 스위치를 찾았다.
그리고 그걸 켰을 때, 나는 말 그대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딸칵-
다시 조용히 조명을 끄고 원래 내가 있어야할 곳으로 조용히 돌아갔다.
‘시발. 시발. 시발. 시발.’
머릿속에 그 단어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 여자 진짜 미친 여자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