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38화
영화가 끝나고 가볍게 식사를 했다. 이연두는 날 데리고 가까운 분식집에 들어갔다.
“하- 떡볶이 너무 먹고 싶었어요.”
“떡볶이?”
떡볶이가 먹고 싶은 음식에 낄 정도로 대단한 음식이 아닌데 라는 생각으로 물었다.
“다이어트하고 있거든요. 딱 오늘만 빼고! 오늘은 자동으로 치팅하는 날이에요.”
다이어트? 치팅? 평소에 멸치 소리를 듣는 나에게는 머나먼 이세계의 얘기처럼 느껴졌다.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하나. 이연두는 오늘을 위해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있었다. 나는 애틋하게 그녀를바라보다가 일부러 긍정적인 멘트를날려줬다.
“그럼 이거 먹고 소고기 먹으러 가면 딱이네요. 소고기에 소주 한잔 딱!”
“에흉... 오늘 이렇게 먹으면 내일부터 또 엄청 굶어야겠다.”
“근데 연두 씨가 다이어트를 왜 해요? 다이어트 할 데가 어디있다고.”
나는 순간 그녀의 나체 드로잉을 떠올렸다. 군살 없는 몸매. 물론 있어야할 곳에도 살이 안 붙긴 했지만.
“뱃살이 좀 나와서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지만, 꼭 나한테 들어달라는 소리처럼 느껴졌다.
밑밥이라도 까는 걸까. 귀엽다. 진짜 귀엽다. 그러면서 동시에 흥분되기도 했다.
“떡볶이 나왔습니다.”
붉고 매운 떡. 누군가 그랬다. 첫 데이트 때 매운 음식을 먹는 걸 추천한다고. 공포 영화를 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볼 수 있다나 어쨌다나. 심장이 더 빠르게 뛰고 내가 상대방 때문에 설렌다는 묘한 착각을 일으키게 만든다고 했었다.
근데 로맨틱 코미디도 생각보다 좋았던 것 같다. 특히 대놓고 19금 드립을 마구 날려대는데 나랑 이연두의 유머코드가 어느정도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는 기회였다고 할까.
마침 영화 생각이 나서 떡볶이를 맛스럽게 앙 깨무는 그녀에게 물었다.
“영화 어땠어요? ‘산악회의 목적’.”
“크흠. 오, 이거 맛있다. 아, 영화요. 영화... 재밌었어요.”
‘응? 왜 이렇게 반응이 미적지근하지? 분명 영화 보는 내내 잘 웃었는데...’
“저는 그 장면이 좋았거든요. 처음에 주인공이 홍수가 나서 자기 부모님한테 전화하는데 반대쪽에서는 여자가 자기 남자친구한테 전화하잖아요. 근데 그게 오버랩되면서 너무 웃겨가지고...”
내가 말하자 이연두는 아주 잠시 후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저도 그게 재밌었어요.”
“연두 씨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산장같은데 갇히면.”
“갇히면? 흠... 글쎄요. 뭐, 방법이 없지 않나? 헬기 부를수도 없고. 준현 씨는 어떨거 같아요?”
“저야 뭐. 완전 땡큐죠.”
내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하자 이연두가 빵하고 웃었다.
“푸핫! 뭐가 땡큐에요, 또.”
“완전 땡 잡은거죠.”
“아, 그래서 땡큐다?”
“네.”
“진짜 어이없이 웃기네. 근데 영화 되게 재밌게 보셨나봐요. 영화 얘기하니까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어요. 귀여워.”
“네? 귀엽다고요?”
내가 빙글거리며 묻자 그녀는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턱을 살짝 아래로 내리고 떡볶이에만 시선을 보냈다.
“아, 이거 맛있네. 튀김 추가하길 잘했다아아. 주먹밥도 맛있겠다. 준현 씨는 오늘 식사하고 오셨어요?”
“아뇨... 자느라. 일어나서 바로 오기 바빴죠, 뭐.”
“늦잠? 하긴 저도 신입 때는퇴근하면 집에 가서 바로 곯아떨어지고 주말만 되면 초죽음이었죠. 거기에 준현 씨는 VIP 매출건도 두 개나 따냈으니. 아, 참. 그럼 커미션은 바로 들어왔어요?”
“네. 즉각즉각 들어오더라고요. 다들 신규 VIP 가입이여서...”
“진짜 VIP 따기가 하늘의 별 따기긴 해요. 그만큼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바로 입금도 되니까 눈에 불을 켜고 하는데... 후, 아무래도 실력이 안 받쳐주나봐요.”
질겅질겅. 쌀떡을 씹어먹는 이연두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말과 행동이 다르다. 그 말은 즉, 고민이 많다는 소리다.
나는 그 고민거리를 이따 술 마시고 들어주겠노라 생각하고시간을 확인했다. 여섯 시가 조금 넘어가는 시간. 바로 술을 먹으러 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 아닐까.
“저기, 연두 씨.”
“네?”
“그, 혹시... 밥 먹고 뭐 하고 싶은거 있어요?”
“읏! 갑자기요?”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괜히 오바해서 놀랐다.
“네, 갑자기 궁금하기도 하고. 밥 먹고나서 술 먹기 전에 뭐 할지 모르겠어서.”
“아... 그런 뜻이구나. 음. 보통은 볼링하러 가거나. 카페에 가죠? 준현 씨, 카페는 별로이려나?”
“카페 좋아요. 카페 갈까요, 그럼?”
“아니다... 아니에요. 카페 보다는... 음...”
이연두는 잠시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턱쪽으로 가져갔다. 사실 골똘히 생각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잘 갈 것 같다. 카페에 가든 어딜 가든 상관이 없었다. 마주 보고 앉을 수 있으면 그게 베스트가 아닐까.
그런데 이연두는 뭐라도 하고싶은 모양이다. 창문 밖에 있는 간판을 쭉 훑어보다가 손가락으로 어딘갈 가리켰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그곳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방탈출’이라고 적혀 있었다.
“준현 씨, 무서운거 괜찮?”
“... 무서운거?”
공포 영화를 보거나매운 음식을 먹어라. 가능하면 술을 먹는 것도 좋다.
그 조언은 아직도 유효했다. 공포 영화는 안 봤지만, 이연두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이거 오히려 내가 공략 당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피식 웃고는 그녀의 뜻에 한번 따라주자고 생각했다.
“방탈출하자는 거죠? 저 그거 처음인데. 뭐, 무서워봐야 얼마나 무섭겠어요.”
나는 어렸을 때, 놀이공원에서 찾아갔던 귀신의 집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러자이연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따가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크큭. 뭐, 얼마나 무섭다고. 이만 일어날까요?”
떡볶이를 다 주워먹고 남아있는 양파를 깨작거릴 즈음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탈출 카페는 걸어서 바로 맞은편에 있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우선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한번 들렸다 오겠노라 말한 이연두는 아까보다도 더 예뻐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가 1분, 1초를 예뻐보이고 싶어한다는 마음이 전해져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우리는 난이도 별 다섯 개 중에 네 개짜리 방탈출을 선택했다. 그러자 알바생이 고개를 갸웃했다.
“초보자시면 별이 좀 낮은걸로 먼저 선행해보시는 걸 추천해요.”
“아뇨!우리 이걸로 해주세요.”
이연두는 왜 저러나싶을 정도로 되게 적극적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준비가 되는대로 안대를 쓰고 손을 잡는다. 그리고 안내자가 이끄는 곳에서 안대를 벗었다.
그러자 쿵. 소리가 나면서 별안간 천장에서 사람 얼굴이 떨어졌다.
“으악!”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러버렸다.
“푸하하하하. 아, 웃겨.”
와, 씨바 이게 뭐야!
진짜 리얼해 보이는 사람 모가지가 바닥을 뒹굴자 나도 모르게 자빠지고 말았다. 반면에 태연하게 웃는 이연두. 와, 이거 제대로 당했는데. 그녀는 날 내려다보면서 웃다가 손을 건네줬다.
“잡아요. 내 옆에만 꼭 붙어있어요.”
남녀 역할이 완전 바뀌었잖아. 나는 창피해서라도 벌떡 일어나 옷 매무새를 다시 잡았다.
“괜찮아요. 처음이라 놀란 것 뿐이에요.크흠.”
“크크. 웃겨. 그래서 이 손 안 잡을 거예요?”
그건 또 아니지.
나는 못 이기는척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 따라와요. 이거 제한 시간도 있고 풀어야 하는 퍼즐도 있으니까 머리 잘 써야해요.”
“머리는 또 제가 잘 쓰죠. 학창 시절에 공부 꽤 잘했다고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는데.”
“알면 깜짝 놀랄 겁니다.”
“암튼 이걸 열면 힌트가...”
겁 없이 궤짝을 여는 순간, 뭔가가 불쑥 튀어올라왔다. 이건 또 뭐야! 마네킹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무 놀랐는데 이번에는 이연두도 좀 놀랐는지 내 몸에 자기 몸을 최대한 밀착시켰다.
마네킹의 가슴에는 비수가 꽂혀 있었고 그 비수와 함께 종이 쪽지가 붙어 있었다.
“이 사건은 장난이 아니다. 실제 상황이다.”
내가 여기까지 읽자 그 다음부터 이연두가 이어서 읽었다.
“너희들은 모두 죽을 거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으... 뭔가 내가 생각한 공포랑 좀 분위기가 다른데요.”
“쏘우 같은 느낌인데.”
이런 종류의 영화를 몇 번 봤던 적이 있다. 근데 그렇다고 이런 류의 게임에 자신이 있다는 건 또 아니다. 내가 그런 영화에 출연하게 되면 제일 먼저 죽을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연두 씨?”
“아... 예! 자, 자. 따, 따라와요오.”
우리는 어두운 숲속에 떨어진 헨젤과그레텔이 된 듯 벌벌 떨면서 퍼즐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그와중에 꺅! 하거나 으악! 하면서 서로 끌어안기 일수였고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많이 하게 됐다.
무서운거 만세. 확실히 공포영화같은 영상매체보다 눈 앞에서 직접 벌어지니까 공포감이 확 다르다.
처음에는 자신있어 하던 이연두도 이내 부둥켜안으면서 꽥꽥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개꿀잼이네, 이거.
나는 어느순간부터 이 공포를 즐기고 있었다. 다음에는 또 어떤 공포스러운 상황 때문에 이연두가 나를 끌어안을까. 나 역시 놀라면서 그녀를 같이 끌어안았다. 이연두의 허리는 비현실적으로 잘록해서 팔로 끌어당기면 휘청거리며 따라올 정도였다.
가슴이 내 몸에 닿아 뭉개지는 건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DVD방을 왜가? 여기가 리얼 스킨십존인데.
그렇게 한참을 재밌게 놀다가 제한 시간이 다 돼서 아르바이트생이 들어왔다. 원래 다른 게임들은 클리어까지의 시뮬레이션을 보여주지 않는데 이 게임은 유독 클리어한 사람들이 없다며 남아있는 퍼즐을 풀어주며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여줬다.
근데 옆에 아르바이트생이 있는데도 이연두가 내 팔을 꼭 끌어안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바람에 기분이 더 좋아졌다.
‘하, 씨. 누가 보고 있으니까 괜히 우쭐해진다. 이연두처럼 예쁜 여자가 달라붙으니까 저 새끼 엄청 부러워하는 표정이네.’
그렇게 방탈출 카페를 나가고 기진맥진해진 이연두는 여전히 내 팔에 팔짱을 끼고 걸었다.
“후, 하... 아잇! 쪽팔려... 흥... 저 원래 이런거 안 무서워하는데.”
“근데 왜 무서워했어요?”
“아니... 내가 생각하는 공포랑 뭔가 달랐어요. 나는 귀신같은거는 하나도 안 무서운데 피 튀기고 살덩이가 낭자하고 이런거는 무서워하나 봐요.”
“크큭. 그래요? 잘 됐다. 다음에 또 이런거 해요, 우리.”
“... 다음에?”
“네, 다음에. 왜요, 오늘만 보고 말 생각이었어요?”
“아, 아뇨! 하, 암튼 재밌었다. 우리 그럼 술 먹으러 갈까요?”
“좋죠. 어, 근데...”
나는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면서 말했다.
“귀걸이 했네요? 몰랐어요.”
“아... 오늘만 좀 해봤어요...”
샵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던 귀걸이다. 나는 한동안 그녀의 귀밑을 살피면서 감탄했다.
“예쁘다.”
“고, 고마워요. 근데 계속 그렇게 보면 창피한데...”
“아, 미안해요. 크큭. 우리 가요. 그, 맛있는 소고기 집 내가 검색해놨어요. 아쉽게도 예약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오, 좋아좋아. 준비성이 좋네요. 가요, 가요. 아흐~ 웨이팅 없어라.”
그렇게 나란히 서서 걷는데 생각보다 여자랑 딱 붙어서 걷는게 편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게 모쏠이었던 나의 현실인가. 박자를 맞춰서 딱딱 걸어야하는데어색해서 엉거주춤 걷게 됐다.
이상한 걸 느꼈는지 이연두가 옆에서 킥킥거리며 웃었다.
“아, 진짜 귀여워.”
“뭐, 뭐가요?”
“몰라도 돼요. 소고기 집 어디라고요? 여기서 가까워요?”
“음, 거리가 좀 되긴 해요. 한 15분은 걸어야 해요.”
“좋아요. 더 좋아요.”
“뭐가... 아니다...”
이연두와 내내 방금 방탈출할 때 있었던 일들을 떠들으면서 걷다보니 어느새 2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혼자 걸었으면 15분이면 컷인데 같이 걸으니까 20분이 됐다. 그런데 하나도 싫지 않았다. 그녀의 말마따나 ‘더’ 좋았다.
여자들은 백이면 백 소고기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여기에 소주까지 더해지니 금상첨화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취한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오늘은 이연두를 자빠뜨리는 날. 따라서 술을 진탕 먹일 생각이었다.
“연두 씨는 주량이 어떻게 돼요?”
“음... 글쎄요. 한 5병? 평범해요.”
?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며 베시시 웃는 이연두.
설마 좆됀건 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