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2 8. 삶, 삶, 삶 =========================================================================
공국 수도 로귀하르트.
집정관저.
관저 주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행복에 넘쳐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관저 내의 집정관 표정은 불퉁하다.
최근 륀체르는 정치적 욕구 불만에 가득 쌓여있다. 자기를 음해하던 바너의 인간들을 싹 쓸어버리고 싶은데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하고, 공회 의원들도 입맛대로 뽑고 싶은데 그것도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한다. 사파이어 재단의 배를 불릴 온갖 정책을 밀고 싶지만, 그것도 좌절. 집정관을 뽑는 투표도 백 년 아니, 천 년에 한 번 하고 싶은데, 그것도 오를린 출신 그 누군가의 눈치를 보느라 오 년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정해야 했다.
제국이 몰락한 후, 사람들은 륀체르 사파이어의 독재를 예상했다. 애당초 륀체르는 바너 길바닥 출신에 생부의 가족을 몰살하였다는 흉흉한 소문이 도는 자였고, 그 소문을 증명하듯 자신을 도와준 은인 비오르틴에게 주저하지 않고 칼을 디밀었다. 그 외에 그가 보인 급진적 행보들을 보자면 그가 공국을 독재 통치할 가능성은 아주 커 보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륀체르의 상식적이고도 이성적인 행보에, 사람들은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싫지는 않은 분위기다. 종종 온갖 말들이 나돌기도 한다.
‘사파이어답지 않은 행보다, 사파이어가 정권을 잡더니 사람이 변했다.’ 심지어는 ‘사파이어에게 유령이 씌었다…….’는 말까지.
그리고 그가 오슬 수인족 출신의 무녀와 결혼을 발표했을 땐 드디어 미쳤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정작 륀체르는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보고 미쳤다고 기사를 써대는 로귀하르트 신문을 구겨버리며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체, 내 결혼을 대륙 화합의 표상으로 좀 쓰겠다는데 왜 남들이 난리야? 아, 평화를 위해 내 인생 하나 희생하겠다는데 어째서 미쳤느냐는 말을 들어야 하지? 억울하다!”
그의 말마따나 결혼은 대륙 종족 간 화합의 표상일 뿐이다. 그와 신부의 관계가 소와 닭처럼 심심하고도 건조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홀디네 본은 그의 불평에 적당히 맞장구쳐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륀체르는 그 봉투를 보았다.
참 이상한 봉투다. 오를린에서 보낸 것인데, 보낸 날짜가 바로 어제다. 마력이 사라진 지금 이동 스크롤이나 텔레포트 홀이 없어서 우편물이 하루 만에 오는 일은 불가능한데, 즉 이 봉투는…… 마력으로 전해졌다는 것.
홀디네가 설명했다.
“오를린의 그분들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럼, 그럼! 그들밖에 없겠지!”
륀체르는 봉투를 열어 편지를 보았다. 통통 튀고 발랄한 글씨체가 단번에 눈을 사로잡았다.
「안녕! 내 친애하는 변태여! 잘 지내지? 달마다 한 번씩 배달되는 정국 소식지를 보니 당신이 나라를 아주 잘 이끌어가는 것 같아 매우 기특하고 기뻐! 탐욕스럽게 나라를 독식하려 들면 내가 당신, 튀겨 죽이려고 했는데…… 앞으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아 아주 안심이야! 사실,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는 목적은 다른 게 아니라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사흘 후에 내 결혼식이 있어. 내 충실한 호위기사가 나의 남편까지 되어주기로 했지. 그러니 부디 참석해줬으면 해. 당신은 내가 여행하면서 만난 가장 가까운 친구였으니까. 그럼 이만!
추신. 참! 결혼 축하해! 당신 취향이 뱀 수인인 건 의외였어.」
륀체르는 편지를 가장한 청첩장을 구겨 던졌다.
“젠장, 젠장! 내 취향은 뱀 수인이 아니라 가슴 큰 너라고! 너, 마리니시네였다고! 으아아아! 짜증 나! 이딴 건 왜 보낸담?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나? 자기도 내 결혼식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면서 나보고는 자기 결혼식에 오라? 하여간 이상한 여자야. 자기 중심적이라니까!”
홀디네는 륀체르의 커다란 목소리에 잠시 귀를 막았다가 그가 조용해지자 물었다.
“가실 겁니까? 여정은 그리 고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이 집정관님께 순간 이동을 써서 바로 오를린으로 가시게끔 해줄 것 같은데요.”
륀체르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가긴 무슨! 축하 선물이나 줘버려! 아주 구린 것으로!”
***
오를린 시.
공국의 새로운 정책 때문에 오를린은 영지라는 낡은 이름을 버리고 ‘시’라는 명칭을 달았다. 영주의 직위는 시장으로 바뀌었고, 로테도 영주의 딸이 아닌 시장의 딸로서 그리고 자식을 혼자 키우는 어머니로서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녀에겐 소일거리도 있다. 종종 꽃꽂이와 외국어, 춤, 바느질 등 소양을 쌓고자 오는 아가씨들이 있는데, 그녀는 그들을 대상으로 가르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보수를 받았다.
언니 마리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로테는 예식 당일 딸 리슈라에게 입힐 옷의 마무리에 한창이다.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그녀의 표정이 어째 많이 피곤해 보인다. 최근 며칠 동안 언니 결혼식 준비에 가장 열성적으로 임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걱정된 하녀가 로테에게서 바늘을 빼앗아 들었다.
“이리 주세요. 마무리는 제가 할 테니 아가씨는 그만 쉬셔야…….”
하지만 로테는 그것을 도로 가져갔다.
“언니 결혼식에 입힐 내 딸의 옷이니만큼, 내가 해야 하지 않겠어.”
하녀는 로테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느질에만 집중하는 아가씨의 모습이 심심해 보여서 하녀는 무슨 말이라도 걸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데 갑자기 노크도 없이 문이 열리더니 한 붉은 머리 아가씨가 들어와 수선스럽게 외쳤다.
“로테! 오랜만이야!”
로테는 피곤한 중에도 반가워서 미소를 지어다.
“실로이.”
실로이라는 이름의 붉은 머리 여인은 로테의 사촌으로 네히트에 살고 있다. 눈치가 없고 시끄러운 게 특징이지만, 그다지 악한 사람은 아니다. 지금 이렇게 온 것은 분명 마리의 결혼식 때문일 것이다.
실로이는 사 년 전에 로테를 마지막으로 봤는데, 이렇게 다시 보자 반가움에 어쩔 줄 몰라 실언을 했다.
“이게 얼마 만이니! 저 잠든 귀여운 아이가 작은 황녀님이셔? 뭐? 이름이 리슈라라고? 좋은 이름이구나! 어쩜 이렇게 널 닮아 예쁘니! 아아… 아기인데도 얼굴에 귀티가 좔좔 흐르는 거 보니 황궁 물이 좋긴 좋은가 봐! 나도 너처럼 궁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봤으면 소원이 없겠어…….”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말. 하녀는 헛기침하며 간접적으로 주의를 시켰지만, 실로이는 실언을 멈추지 않았다. 실로이는 로테가 바느질하는 옷을 빼앗아 들고 외쳤다.
“어머, 이 아기 드레스 좀 봐! 이게 황궁식이니? 이런 레이스 뜨기는 황도에서 배운 거야? 응?”
이제는 누구도 황궁이나 황도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도 실로이는 그렇게 물었다.
거듭되는 눈치 없는 말에 로테의 기분이 어두워질 것 같은데, 정작 로테는 전혀 그렇지 않다. 로테는 실로이의 손에 든 옷을 다시 가져가 바느질하며 찬찬히 말해주었다.
“궁이 뭐 별거겠니? 그리고 이 드레스는 황궁식이 아니라 그냥 내 취향으로 만든 것일 뿐이야. 실로이. 궁 같은 그런 허무한 곳에 환상을 가지지 마.”
“하지만 대단하긴 대단했었잖아! 제국이 공국이 되었어도 여자들이 궁에 품는 환상은 여전하다고! 넌 그 환상의 중심에 있었잖니!”
“얘…… 대단이라니. 그곳이 네가 생각하는 대로 정말 대단한 곳이라면 지금 그렇게 몰락했을 리가 없잖아?”
로테는 어깨를 으쓱이며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런 미소가 실로이의 눈에는 어쩐지 진짜 웃음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안해진 실로이는 리슈라를 안아 들면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로테는 바느질하는 것을 멈추고 실로이에게서 리슈라를 빼앗아 안았다.
“이리 줘. 내 딸은 낯선 사람에게 안기면 금세 울어서.”
“아. 그, 그래.”
로테는 하녀에게 바느질감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말한 뒤, 리슈라를 안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사촌의 괜한 소리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 자리를 피하는 게 아니다. 단지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해서 산책을 좀 하려는 것뿐이다. 자면서 하품하는 리슈라의 표정이 답답해 보이기도 했고.
역시나 밖으로 나오니 리슈라가 잠에서 깨어나 방글방글 웃는다. 그런 딸의 얼굴을 보며 로테는 딸을 웃게 하는 여러 소리를 내고 감미로운 노래도 불러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리슈라와 노는데, 갑자기 리슈라의 얼굴이 낯설어 보인다.
“너….”
사람들은 리슈라를 보고 어미인 자신을 쏙 빼닮았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눈에 리슈라는…….
‘어쩔 수 없이 그 피를 받았구나. 너는 누가 뭐라고 해도 비오르틴 그 남자의 딸이야.’
“그아아?”
리슈라가 어미의 눈동자 속에 담긴 말이 궁금한 듯 소리 냈다. 로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활짝 웃으며 리슈라를 안고 숲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사라진 길에 누군가가 들어섰다.
말끔한 여행자 복 차림의 한 남자. 매우 젊다.
암갈색 머리카락은 길어서 목을 넘고, 음울한 회색 눈은 사라진 여자의 방향을 쫓는 듯 초조해 보인다. 마른 입술 사이로 서글픔이 잔뜩 묻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리슈라….”
남자는 한때 딸에게 지어줬던 두 번째 이름을 몇 번이나 읊조리면서, 로테가 사라진 길 쪽으로 걸어갔다.
밝은 달빛이 그 길 곳곳에 총총 내려앉았다.
***
마리와 하이너의 결혼식은 마을 축제처럼 소박하고 화기애애하게 치러졌다. 결혼식에 나왔던 술은 전부 주점 ‘잘생긴 한스’에서 무상 제공한 것이고, 루돌프와 마리아도 결혼식에 참석했다. 로테는 자기 결혼식 때보다 더 기쁘게 언니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리슈라는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이모’라는 발음을 하여 마리와 그 가족들을 기쁘게 했다. 시장 내외, 시의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앞날을 축복해주었고, 뒤늦게 집정관도 와서 마리를 축하해주었다.
집정관은 그들의 결혼을 축하해주면서도 신랑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신랑의 귓가에 대고 이죽거렸다.
“하이너! 이 야심가야! 이거, 이거, 귀족 아가씨에게 장가가서 신분 상승을 좀 해보려 했더니, 여전히 평민이네? 이걸 어쩌나? 앙?”
신분제가 사라진 현재, 하이너는 아가씨와 결혼한다고 해서 귀족이 되지는 않는 사실을 놀리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너는 그런 놀리는 말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계 최고의 힘을 유일하게 다룰 줄 아는 이에게 신분이란 먼지만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이너는 다만 그런 의미를 담은 미소를 륀체르에게 보일 뿐이었다.
***
결혼식과 피로연이 끝나고 다음 날, 마리 부부는 길을 떠나기로 했다. 마리는 마지막으로 조카를 안아보며 축복의 말들을 해주었다.
“건강하게 자라야 한다! 무엇보다 큰 꿈을 가져야 해! 희망의 신 마리니시네님께서 언제나 너를 위해 기도할게! 아휴, 귀여운 것…….”
한참 동안 좋은 말들을 해주다가 마리는 동생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자, 그럼 로테. 잘 있어.”
“너도 즐겁게 여행하길 바라.”
지켜보는 어머니는 표정이 어둡다. 딸이 또 고향을 떠나는 게 싫은 것이다. 아쉬움에 다시 한 번 붙잡는 말이 나왔다.
“마리. 꼭 떠나야겠니? 여기서 정착하는 것도 좋잖니? 하이너도 그걸 원하는 것 같은데.”
하이너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건 아가씨가 원하고, 선택하시는 길뿐입니다.”
“이보게. 결혼했는데 아가씨라니.”
하이너는 멋쩍게 웃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가씨’가 아닌 다른 호칭을 쓰는 건 익숙지 않다.
이번엔 마리의 아버지도 여행을 말렸다.
“마리, 다시 생각해봐라. 우리 영지 아니, 우리 시에는 다른 시를 상대하는 행정 쪽 일손이 부족해. 여행을 많이 다닌 너와 하이너가 그 일손이 되어줄 수 있잖니? 이렇게 꼭 가야만 하느냐?”
마리의 대답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예! 아버지! 저는 꼭 가야만 해요! 그래야 우주를 지키거든요!”
해맑은 말(우주)의 의미를 모르는 아버지는 갸우뚱해졌다. 어머니 역시 ‘얘가 또 미친 병이 도졌나…….’하는 생각을 했다.
우주 정복의 속사정을 아는 하이너만 속으로 끙끙 앓는다.
‘아가씨께선 정말이지, 지금 와서 우주가 어쩌고 하면 누가 알아 듣느냐고. 하여간 꼭 저렇게 티를 내셔야 하나.’
하지만 그가 아가씨를 보는 눈길은 봄 햇살처럼 따사롭다.
로테가 아쉬워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달랬다.
“마리를 그냥 보내주세요. 여행이 지겨우면 한 번씩 오를린에 들른다잖아요.”
마리는 부모님을 달래주는 로테를 지그시 보았다. 자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왜, 마리?”
“아니. 고마워서.”
“뭐가?”
“아무것도. 리슈라 잘 키우렴! 그럼 우린 이만 갈게요!”
탁 트인 평지가 그들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
부부는 남하하여 괴지 쪽으로 갔다. 당연히 두 다리로 걸어서 간다. 마력으로 순간 이동을 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에서는 웬만하면 마력을 쓰지 않는 것이 그들이 정한 법. 하여, 그들은 다리가 아플 정도로 길을 걸었다. 괴지에 도착하면 그때 순간 이동을 해도 늦지 않다.
괴지에 다다르기 직전, 마리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봄 날씨가 매우 덥다. 문득 그녀는 그동안 모호했던 것을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하이너. 내가 마나의 인이라면 죽은 후엔 어떻게 돼? 대륙이나 내 안의 마력들 말이야.”
“무슨 소립니까? 아가씨는 죽지 않습니다.”
“아니, 죽지 않겠지만, 만약 사고로 심정지 같은 걸 일으킬 수도 있잖아. 그럼 부활하나?”
“포울룬디가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겠지요. 뭐, 포울룬디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아가씨의 심장을 지킬 테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아가씨는 분명 영원히 사실 겁니다.”
마리는 기분이 좋아져서 웃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하이너의 목에 두 팔을 감아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그럼 너도? 너도 나와 영원히 사는 거야?”
하이너는 그 점에 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포울룬디가 했던 말에 의하면 영생은 마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지,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은 아닌 듯.
그러나 하이너는 왠지 거짓을 말하고 싶다.
“그럼요. 저도 아가씨와 같이 영원히 살지요.”
하이너는 말만 해도 가슴이 벅차올랐으나, 정작 마리는 실망한 눈치다.
“흐잉, 뭐야! 이 결혼 무를래! 죽지 않고 너랑 영원히 부부가 돼야 한다니!”
하이너는 참 그녀다운 말이라 생각하면서도, 서운함을 어찌할 수가 없다. 삐친 그는 그녀의 몸을 떼어내면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괜스레 못된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이지, 아가씨! 제발 그 낭만 깨는 말씀 좀 하지 않으시면 안 됩니까?”
마리는 나름 진지하여 하이너를 쫄래쫄래 따라가면서 가르치듯 말했다.
“그야 그렇잖아? 너도 언제까지고 한결같을 순 없다고. 좀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란 말이야.”
“아, 예.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그건 현실적인 게 아니라 부정적인 겁니다.”
마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흐음, 그런가?”
하이너는 백치 같은 물음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몸을 옆으로 돌려 마리와 마주 보았다. 그의 두 손이 마리의 두 손을 잡았다.
“그래요. 그렇고말고요……, 저기 아가씨.”
“응?”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가씨를 영원히 사랑할 테니까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그의 입술은 당장에라도 입맞춤을 퍼붓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굳건한 눈동자도 배신이나 변심 따위는 없을 거라고 외친다.
하지만 마리는 괜스레 생글생글 웃으며 의심하는 말을 던져본다.
“헤에,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지? 어떻게 나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희망차게 말할 수 있는 거야, 아앙?”
“……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뭐가 남습니까?”
되묻는 기사의 눈엔 어떤 번뇌도 보이지 않는다.
============================ 작품 후기 ============================
드디어 완결입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후원해주시고 코멘트, 추천 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특히나 윈디 님,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다음엔 현대 로맨스 물로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