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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21화 (121/122)

00121  8. 삶, 삶, 삶  =========================================================================

아침.

태양은 밤사이 마리가 느낀 분노에 들끓은 달처럼 폭발적인 빛을 쏟아낸다. 차가운 대기가 그 빛에 몸서리를 쳤다.

하이너는 아가씨의 욕설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가씨께서는 잠들어 누운 채로 허공에 삿대질하며 누군가에게 욕을 하신다.

“빌어먹을! 이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년아! 이것 하나만 대답해! 드래콘을 나타나게 한 게 네가 한 짓이라면, 하이너도, 내 호위기사 아니, 내 연인도 네가 한 짓이야? 그를 드래곤으로 만든 것도 네 짓이냐고! 그의 진심도 모두 만들어진 거냐고!”

그러더니 한참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가, 엉엉 우시는 게 아닌가.

“으흑흑! 그가 순정남이라니! 그가 순수 순정남이라니! 나는 어쩜 이리 남자 복이 터진 거야…….”

하이너는 당황해서 웃음이 터졌다. 아가씨의 잠을 깨우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하지만, 깨우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다. 꿈이 너무 진지해 보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이 그는 그녀를 깨웠다.

“아가씨, 좀 일어나 보세요. 무슨 악몽을 꾸셨습니까?”

묵직한 목소리와 따스한 손의 감촉에 마리는 잠을 깼다. 그리고 관자놀이에 흐르는 닭똥 같은 눈물을 닦았다.

“흑흑… 아아?”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하이너를 한참 동안 본다. 하이너가 빙긋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마리는 안도했다.

곧 하이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저 혼자만의 말을 마리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끝인가. 그럼 내 세계 정복의 꿈은…… 이 여행의 의미는…….”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창처럼 날카로운 햇빛, 그리고 하이너의 따스한 미소. 이것은 현실이다. 생생한 현실.

그러하다면…… 간밤에 만났던 다른 세계의 로테, 즉 포울룬디는 악몽 속 인물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마리는 그 결론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다. 여태 꾼 그 어느 꿈보다 생생한 꿈이란 말이다. 포울룬디는 다른 우주에 반드시 있고, 언젠가는 각 우주 마나의 인을 다 모으려고 자신을 찾아올 것 같다. 그 빌어먹을 절대자인지 신인지 그따위 것이 되기 위하여!

아아…. 마리는 피가 나기 직전으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하이너는 그런 모습을 보고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아름답기만 하던 아가씨의 눈매가 너무 진지해서 매서워 보일 지경이다.

“아가씨,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마리가 하이너를 똑바로 보며 나지막이 말을 뱉었다.

“좋아.”

“예?”

하이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마리의 ‘좋다.’는 말은 하이너에게 청혼에 대한 대답으로 들렸다.

“좋다…? 드디어 제 청혼을 받아주시는 겁니까?”

마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이젠 세계 정복이 아니라 우주 정복이야!”

“하아?”

“내 반드시 포울룬디 그년을 그냥 확……!”

“예? 포울룬디는 또 뭐……? 후우. 정말이지…… 아가씨.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셨습니까? 지금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말입니다. 대체 무슨 말씀하시는 건지…….”

“포울룬디는 꿈속의 여자가 아니야! 현실의 나쁜년이라고!”

“으으, 미치셨습니까.”

“미쳤다고 해도 좋아!”

갑자기 마리는 하이너의 몸을 꽉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하이너는 놀라기도 하지만, 자꾸만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아가씨께서 횡설수설하시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청혼을 받아들일 것 같은 분위기라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곧, 청혼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좋아! 이런 미친 나라고 해도, 결혼하자!”

“…… 감사합니다!”

“단, 조건이 있어.”

하이너는 어떤 조건이든 들어줄 자신이 있다. 그가 그녀를 더욱 세게 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 말씀만 하십시오! 다시 드래곤이 되라고 하시지만 않으면 무엇이든지 들어드리겠습니다!”

“있지, 난 한곳에 머무르면 안 돼. 바람처럼 살고 싶어. 아니, 바람처럼 살게 될 운명이야! 나에겐 큰 목적이 있거든! 지금껏 가졌던 목적보다 더 어마어마한 꿈이 있다고!”

“설마 그게 우주 정복입니까?”

“만약 네가 내 사정을 이해하고 동행해주기로 한다면, 난 너와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 어쩔래? 이런 나와 결혼해줄 수 있니?”

“당연한 말씀을.”

하이너의 대답은 말할 것도 없다. 세계 정복도 이룬 거나 다름없는데 우주 정복이라고 못할 게 뭔가!

그리고 실상 그는 아가씨의 목적을 애당초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왜냐.

아가씨를 믿으니까.

그녀가 언제나 말씀하시는 긍정을…… 사랑하니까.

“고마워! 하이너!”

“저도 감사합니다. 아니, 사랑합니다. 아가씨.”

마리가 진정으로 영원한 여행 동반자를 얻는 순간, 이다.

***

약 한 달 보름 후.

오를린.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와 미지근한 바람은 이른 봄을 예고한다. 시대가 제정에서 공화정으로의 빠르게 변화하면서, 덩달아 계절의 변화도 가속한 듯하다.

영주의 저택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한 무리의 사람이 있다. 그들은 영주의 딸 로테를 마중 나온 사람들이다. 최근 사냥에 나갔다가 다리를 다친 영주는 나오지 못했고, 영주 부인과 그 하녀들, 그리고 저택에서 검 좀 쓴다 하는 이들이 호위의 목적으로 미리 나와 있다.

그들은 저 멀리서 마차를 몰고 오는 한 마부를 보았다. 마부는 아주 젊고 이런 시골에서 마차나 몰 것 같지 않은 귀티가 흐르는 미청년이다. 그런데 어쩐지 표정이 매우 피로해 보였다. 아주 오랜 시간 마차를 몬 듯이.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마차가 맞아!”

“저 안에 황후께서 타고 계시겠지?”

“어머, 쉿. 황후라니. 이젠 다시 로테 아가씨… 라고 불러야겠지.”

마차는 그들의 앞까지 가지 않고 갑자기 멈추었다. 누군가가 내릴 모양이다. 사람들의 예상대로 마차에서 나오는 이는 로테와 그 딸 리슈라였다.

멀리서 딸이 나오는 걸 보는 영주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로테는 한참 잠에 빠진 리슈라를 안고 나오면서 마부, 헤그의 앞에 섰다. 헤그는 말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피로가 짙게 번진 그의 눈이 고요하게 로테를 본다. 그의 입가는 아주 살짝 올라가 있다. 미소. 아마도…… 무언의 작별 인사, 인 듯하다.

로테는 그의 웃는 얼굴이 생각보다 부드럽다고 느꼈다.

“헤그.”

헤그는 자신의 가짜 이름 헤세가 아닌 진짜 이름이 불렸는데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로테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헤그는 그 손을 보다가 천천히 잡았다.

로테는 그의 손을 꽉 잡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무사히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이런 인사만으로는 부족할 텐데, 며칠 오를린에서 머무는 건 어때요? 제 아버지 저택 말이에요.”

헤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다른 곳으로 가야 해서.”

“그렇군요. 혹시…… 괴지에 가는 건가요?”

“예.”

“당신의 행운을 빌어요.”

“당신과 따님의 영광을 빕니다.”

인사는 그것으로 끝이다. 헤그는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르게 마차를 몰아 남쪽으로 향했다. 사괴탄의 흔적을 찾아 나서는 길이다.

아니, 어쩌면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지도 모른다. 먼 길을 보는 그의 눈이 아련하다.

그때 로테는 아주 오랜만에 어머니와 저택 사람들을 만나 눈물을 흘렸다. 황궁에서 몸 고생, 마음고생 많이 한 딸을 보고 어머니는 소리 내 울었다.

“오, 딸아! 고생 많았다! 무사히 와 줘서 고맙구나! 이 아이 좀 보렴! 어찌 이리 아름다운 게냐!”

사람들의 수선에 깨어난 리슈라가 깨어나 울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헤그의 귓가에 아주 오랫동안 맴돌았다.

***

오를린에서 가장 맛 좋은 술을 판다는 주점, ‘잘생긴 한스’.

과거, 술과 사람과 마법을 좋아하는 한 약사가 있었다. 그는 드래곤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게 꿈이었고, 그래서 자신의 귀족 작위와 약, 밀주를 팔아 모은 돈 20억 자일로 드래곤이 되는 약인 드래곤 링클을 샀다.

하지만 그 링클이 조수의 실수로 다른 청년(하이너)의 몸에 이식되고, 한스의 꿈은 와장창 깨졌다.

그러나 한스는 좌절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면 즐기라 했던가. 한스는 드래곤이 되지 못해도 오를린에서의 삶을 즐겁게 잘 살아갔다.

공화정은 술에 대한 법을 바꾸었고, 이제 더는 밀주 단속이 행해지지 않는다. 덕분에 한스는 약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술 장인으로 거듭났다. 술 빚는 솜씨가 상당히 좋아 바너 장인 길드 중 주조 길드에서 협업을 요청할 정도.

그러나 한스는 자기 주점인 ‘잘생긴 한스’를 운영하는 것에 만족한다.

한스에게 오랜만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연인인데, 아직 연인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좀 어리다면 어린 게 특징이겠다. 한스는 작은 연인을 반겨 마지않았다.

“오! 루돌프! 공부는 어쩌고 여길 왔느냐,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다. 그런데 이 종달새처럼 아름다운 소녀는 누구지?”

“스승님, 제 약혼녀예요. 마리아. 인사해. 내 스승님이셔.”

소녀, 마리아는 종달새라는 표현을 듣고 수줍은 표정으로 허리를 살짝 낮추어 인사했다.

“야, 약혼녀?”

한스는 기가 찼다. 일단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좀 내주면서, 그간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세상에! 약혼녀라니? 하라는 의학 공부는 안 하고 연애만 했던 게냐!”

“아니에요. 후원자이신 집정관께서 일찍 가정이 안정되어야 학업과 일도 잘된다고 추천하셔서…….”

“그래서 덜컥 약혼을 했다?”

“예.”

루돌프는 수줍게 대답했다. 소년의 후원자 륀체르가 소년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어떤 학문 과정을 밟아도 남들보다 훨씬 빠르게 수료해내는 지력에 반한 것이다. 륀체르는 ‘학자에게 있어 이성과의 안정된 관계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면서 ‘자기처럼 노총각이 되기 싫으면 얼른 약혼하라!’고 부추겼다. 그런 까닭으로 루돌프는 마리아에게 약혼을 요청했고, 마리아는 그 요청을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새 삶을 살아가면서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고 싶어 했고, 또 루돌프를 싫어하지 않아서 약혼 요청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약혼 후 마리아는 루돌프에게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주었고, 루돌프의 의학 연구도 점점 빛을 발휘했다.

한스는 그들을 흐뭇한 눈으로 보다가 갑자기 한 장의 수표를 받았다. 수표 봉투에는 루돌프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게 뭐냐?”

루돌프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2억…자일이에요.”

“하? 이 큰돈을 네가 어디서 구했어?”

“마리 아가씨를 따라다니며 번 돈과 후원자께서 주신 용돈, 그리고 연구 성과금을 모은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 이걸 나에게 줘?”

루돌프는 벌써 잊으셨느냐는 표정이다.

“드래곤 링클이요. 제 실수 때문에 영영 가지지 못하시게 됐잖아요. 이 돈으로 드래곤 링클을 살 정도는 아니지만…… 일단 받아주세요. 앞으로도 살면서 다 갚아드릴게요.”

한스는 봉투를 내쳤다.

“흥! 넣어둬! 넣어둬! 마력도 사라진 마당에 드래곤은 무슨! 나는 지금 삶에 아주 만족해! 너무 만족해서 가끔은 웃다 죽을 지경이라고!”

하지만 루돌프는 그 돈을 받으려하지 않았다. 소년은 봉투를 다시 들어서 스승의 앞에 내밀었다.

“받으시라니까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해요.”

“글쎄 난 이 돈 없이도 문제없다니까! 너 물장사가 얼마나 돈이 되는 줄 아니? 내가 말이야, 바너의 술 장인들보다 훨씬 부자…….”

돈 봉투를 주고 싶어 하고, 돈 봉투를 무조건 받기 싫어 티격태격하던 두 남자는 갑자기 묘안을 냈다.

“자자, 루돌프! 그럼 이건 어떠냐? 이걸 오를린 재단에 전부 기부하는 거야! 넌 고향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는 거고, 나는 우리 지역 사람들이 이 돈으로 넉넉한 생활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지겠지! 응?”

“그거 좋네요! 그렇게 해요!”

“아, 안 돼!”

갑작스럽게 반대의 의사를 내비친 이는 루돌프도, 한스도 아니다.

바로, 마리아였다.

루돌프는 방금 뭔가 잘못 들은 것 같아 마리아를 보았다.

“마, 마리아?”

“…….”

“방금 뭔가 안 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아니야! 나는 잠시 볼일 좀!”

마리아는 자기가 무심코 내뱉은 말이 부끄러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루돌프는 마리아에게서 처음 느끼는 물욕에 놀랐다.

‘눈, 그렇게 탐욕적인 거 처음 봐!’

한스는 마리아를 보고 낄낄 웃으며 중얼거렸다.

“네 약혼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욕심쟁… 아아, 아니지. 아무튼, 나중에 훌륭한 살림꾼이 되겠구나! 자자. 그나저나 며칠 머물다 갈 예정이냐? 이왕이면 엿새 정도 더 머물러라! 엿새 후엔 마리니시네 아가씨의 결혼식이 있거든! 축제는 즐기고 가야 하지 않겠어?”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편이 진짜 마지막 ㅠㅠ...

진짜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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