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9 8. 삶, 삶, 삶 =========================================================================
“뭐얏! 얼른 대답이나 하지 못해?”
“제게 마력이 있는지 없는지 알고 싶다면, 얼른 저와 결혼하겠다고 대답해주세요.”
“이것 봐라…… 아니, 우리 호위기사님께서 왜 이렇게 갑자기 유치하게 구실까?”
“그러는 아가씨야말로 왜 평소와 다르게 대답이 술술 나오지 못합니까?”
“청혼에 대답을 술술 하는 여자는 원래 잘 없어!”
“흥.”
“뭐, 흐응?”
마리가 하이너를 찌릿 째려보았다.
그 사이 그들을 지켜보는 누군가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며 저주 같은 응원을 퍼붓고 있다.
‘오, 싸워라! 싸워라! 싸워서 아무나 이기든지 말든지 해버려! 그대로 헤어지면 더 좋고!’
륀체르는 저들이 저렇게 계속 티격태격 싸우다가 영원히 사이가 틀어지면 정말 뛸 듯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끼어들었다.
“이봐, 마리. 얼른 그의 청혼을 수락해주라고…… 안 그러면 확 내가 청혼해버릴 테니까.”
마리는 륀체르의 농담 같은 진담은 단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팽 토라진 표정을 하는 연인의 고개를 돌려 자기를 보게 했다.
“하이너.”
“…….”
“내 눈을 봐.”
하이너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진실 아닌 대답은 원치 않는 마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고 엄중하게 물었다.
“아직 힘이… 남아있는 거야? 마력이 남아 있어?”
“없습니다.”
“정말?”
“없다고 하잖습니까.”
하이너의 대답은 칼처럼 날카롭고 바위처럼 묵직하다.
그걸 지켜보는 륀체르는 세상에 저런 뻔뻔한 거짓말쟁이도 없다고 생각하며 마리의 귓가에 수다쟁이처럼 속삭였다.
“믿지 마. 믿지 마. 마력이 아직 남아있는 게 분명하다니까. 분명 나보고 ‘독재하면 인간 육포를 만들어 버린다!’니 어쩌니 협박했다고. 그게 다 저놈에게 마력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러니 마리, 네 드래곤의 청혼을 받아들여. 그게 세계를 정복하는 지름길이다.”
마리는 하이너의 깊은 우물 같은 눈동자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아가씨를 꿰뚫어 본다. 건방지다 싶을 정도로 당당하게.
…… 보면 볼수록 거짓말을 하는 눈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관절 륀체르의 말은 뭐란 말인가.
‘설마 마력이 없으면서 있는 척하고 륀체르 저 녀석에게 겁준 거야? 오호…… 그게 가능성 있겠는데.’
마리는 뒤돌아서서 나갈 준비를 했다.
“어쨌든 륀체르, 샹들리에 고마워. 가지고 가긴 부담스러우니 마음만 받을게. 이제 그만 여길 떠나야겠어. 참! 알아두는 게 좋을 거야. 난 세계 정복을 하기 전까진……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는다는 걸!”
그러자 륀체르는 하이너보다 더 빨리 마리의 뒤에 따라붙었다. 마리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고 이대로 가는 건 아니 될 일이다. 륀체르는 하이너가 듣든 말든 대놓고 제의했다.
“흐음. 어쩔 수 없군. 그럼 이렇게 된 이상…… 나랑 결혼해.”
“미쳤어?”
“집정관의 아내도 세계 정복하기 쉬운 위치라고. 말 한마디로 나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니까? 베갯머리송사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당신은 나를 몰라도 정말 몰라!”
“윽!”
마리의 팔꿈치가 륀체르의 가슴을 세게 쳤다. 그리고 하이너는 그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하여간 이 변태는 그저 틈만 나면…….’
***
로귀하르트 황궁 주위의 어느 여관.
밤은 차가운 대기를 검푸른 색으로 두껍게 칠하고 또 덧칠했다. 소리마저 칠흑 같은 어둠에 덮인 이런 시간에, 하이너는 한숨도 자지 않고 있다.
아니,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 맞으리라.
‘그 변태 녀석, 끝까지 아가씨한테 청혼 타령을…!’
은밀한 질투심으로 달아오른 하이너는 마리의 몸을 뱀처럼 감쌌다. 신중한 포식자처럼 은밀하고 강하게 움직이는 하이너 덕분에 마리의 몸은 깊은 잠에 빠진 중에도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앗, 안 자? 거기를 왜…… 아앗!”
“아가씨…….”
“흐으읏!”
한몸이 된 그들이 서로가 흘린 땀에 젖는 건 순식간이다.
“으으, 하이너! 침대가 질척해….”
얼마나 격정적으로 서로를 탐했는지 보송보송하던 침대도 축축이 젖어든다. 하이너는 잠시 마리에게서 몸을 빼내고 침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가벼이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마리가 물었다.
“어엇! 뭐하려고?”
“침대가 질척하다고 하셨잖습니까.”
하이너는 달빛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마리를 안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얄상궂게 눈을 빛내더니 마리를 데리고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은 그들의 모습을 반사했다. 방은 어둡지만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와 그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편이다. 하이너는 마리를 안은 채로 그녀의 가녀린 두 다리를 활짝 벌려 거울에 비추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기 것을 아주 깊고 빠르게 삽입했다. 덕분에 마리의 모든 근육이 수축했다.
“으읏! 하아…… 갑자기 이런 자세라니….”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서.”
“하지만…….”
“싫습니까?”
“싫다기보다 읏! 네가 불편하지 않을까 싶은데… 아!”
하이너는 걱정도 팔자라고 중얼거리며 마리의 안쪽을 무지막지하게 파고들었다. 한 번의 사정 이후에 하는 몸짓은 훨씬 여유롭다. 자신의 만족보다 아가씨의 쾌감에만 집착한다. 안쪽이 심하게 죄면 더욱 퍼붓듯 찌르고, 아가씨께서 견딜 만하다는 듯 숨을 천천히 내쉬면 그 호흡의 속도에 맞춰주는 듯하다가 갑자기 콱 치고 들어간다.
“앗, 아앙! 아!”
마리는 그가 한 번 치고 들어올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쾌감에 자기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하으, 읏, 으응! 하이, 너! 하이너!
멈출 것 같지 않은 쾌감도 버거운데, 그 쾌감이 점점 더 큰 쾌감으로 변해 머리를 부술 것 같다.
“으으, 그만! 아!”
그러나 하이너는 그만이라는 말을 반대로 들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박아 넣으며 그녀의 귀와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여유롭게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마리의 귀마저 녹여버릴 기세다.
“소리가 너무 크잖습니까.”
“으읍!”
“그렇다고 참으려 하지도 마십시오. 참으려 하시면 더 터뜨리고 싶은 법이니까.”
“아, 앗! 읍! 하이너!”
느긋한 말투와는 다르게 허리는 미칠 듯이 몰아붙이는 하이너 때문에 마리는 이를 악물고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혀를 스스로 깨물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을 살짝 뜬 그녀가 거울 속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의 은밀한 곳, 늘 같은 자리에 있는 별 모양의 점!
그 점이 달빛처럼 황금색으로 강하게 반짝이고 있다. 그 반짝임은 하이너가 더욱 거센 쾌감을 줄 때마다 더 강해진다. 나중에는 마리가 거울에 반사된 그 빛을 제대로 볼 수가 없을 정도.
“하아, 후, 읏! 아아… 하아…… 하이너, 저게 뭐, 앗! 지? 저게 뭐야? 앗, 아, 아아아!”
마리가 묻는 중에도 하이너의 몸짓은 멈추지 않고 더욱 강렬해졌다. 결국, 마리는 바닥이 흥건해질 정도로 절정을 느껴버렸고, 하이너는 이제 자신의 절정을 향해 가면서 뒤늦게야 마리가 말하는 거울 속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픽 웃고 말았다.
저, 점. 마치 별처럼 빛나는 저 점이 아가씨는 아주 신기하고 궁금할 것이다. 그렇다면 답을 알려드려야겠지.
그는 체머리를 흔들어 눈을 가리는 자기 앞머리를 치웠다. 입가가 올라간 묘한 미소가 스민 얼굴이 드러난다.
“모르시겠습니까?”
“모르, 읏! 겠는데, 아앙! 그만! 아!”
“마력이 사라진 지금, 아가씨의 이곳만 후우, 읏! 이렇게…… 반짝이는데, 정말 뭔지 모르시겠습니까?”
마리가 대답하려는데, 하이너는 갑자기 그녀를 엎드리게 하고 자신을 그녀의 안에 담았다. 곧 그가 절정에 이르자, 마리는 엎드린 채로 거친 숨을 내쉬며 흐트러진 감각을 정리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바닥에 엎드려 누웠고, 하이너는 그런 그녀의 등에 함께 엎드렸다. 그리고 파르르 뜨는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하아, 하…….”
“하이너.”
“후우, 예.”
“하아…… 저기,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물어볼게. 너… 나한테 마력을 넘긴 거니?”
하이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예. 그랬습니다.”
“네가 가진 모든 힘을…?”
“예. 제가 가졌던 것과 세상에 머무는 모든 마력을요.”
얼마간, 마리의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마리는 서서히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그와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의 두 팔을 잡았다. 지금 그녀는 당황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이너가 별 점에 관해 설명했다.
“아가씨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약자들이 고통받지 않는 세계를 원하신다고도 하셨습니다. 대륙의 하층민들이 모여 산다는 플래티르콘의 다리 밑, 아시는지요. 그 위의 다리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아가씨께서 그 가련한 인생들이 죽길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 다리는 허공에 떠 있는 게 가능합니다. 암흑지형이나 차원의 균열도 마찬가지예요. 아가씨께서 그 수상하고 위험한 현상을 꺼리시기에…… 모두 사라진 겁니다. 자. 이쯤하면 눈치채셔야 할 겁니다. 이건 아가씨만 알고 계셔야 해요. 아가씨는…… 마나의 인이 되셨습니다.”
“……뭐라고!”
“그리고 저는 그것, 그러니까 마나의 인이 된 아가씨를 다루는 유일한 사람이 되었고요.”
“하이너! 어째서 나를 그렇게…….”
마리는 이 현실을 믿을 수 없다. 자신이 마나의 인 그 자체가 되다니. 그렇다면 이 작은 몸 안에 세상 모든 마력이 응축돼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힘을 조종하는 사람이 하이너라고? 여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마리는 하이너의 몸을 흔들며 물었다.
“하이너! 다시 설명해봐! 왜 이렇게 한 거야?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왜 멋대로 남의 몸을 마나의 인 같은 무시무시한 물건으로 쓰느냐, 그렇게 따지는 말과도 같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얼른!”
“…… 제가 저주에서 벗어나려고 마나의 인을 파괴했을 때, 오갈 곳이 없어진 채 한 데 모인 이 세계의 모든 신비로운 힘, 즉 마력은 강력한 구속제가 필요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마력은 대륙 곳곳에서 제멋대로 날뛰어 세상을 어지럽힐 위기였어요. 쉽게 말하자면, 당장 그 힘을 담을 단단한 그릇이 필요했단 말이겠지요. 또 새로운 마나의 인이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그릇이 나냐고!”
“물론 처음에 저는 제 몸을 마나의 인으로 쓰려고 했습니다. 아가씨께 그 짐을 지시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얼마든지 저 자신을 마나의 인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만…… 끝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째서? 너는 정의로운 기사님이잖아! 그거로 충분하잖아! 자격이 된다고!”
“글쎄요. 저는 그간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 있었습니다.”
하이너는 아가씨를 안았다. 그리고 아가씨를 마나의 인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던 속내를 터놓았다.
“아가씨. 저는 평범을 원합니다. 초야에 묻혀 사랑하는 분과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조용히 살길 원합니다. 이런 저는 처음부터 아가씨처럼 자의로 큰 포부를 가진 적도 없고, 그러므로 아가씨와 같은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도 미천합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힘(마력)은 저보다 아가씨에게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가씨께…….”
마리는 허탈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솔직히 말해서, 아가씨처럼 밝은 분이 그런 큰 힘을 지니시기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자신을 마나의 인으로 만들었단 이야기인가.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힘을 담은 그릇이 된 기분, 이상하다. 기쁨도 아니고 화도 아닌, 그렇지만 뭔가 경이롭고도 섬뜩한 기분에 빠진다.
“아가씨는 반 이상 꿈을 이루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아가씨가 원하는 세상이요? 지금부터 륀체르만 잘 감시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아가씨. 저는 아가씨를 믿습니다.”
마리는 하이너의 등을 어루만졌다. 하이너에게 무슨 감정이 들어서 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분을 정리하려는 손짓.
갑자기 하이너가 그런 마리를 일으켜 세웠다.
“당황스러우실 거란 건 충분히 짐작합니다. 하지만 걱정은 마십시오. 제가 곁에 있잖습니까.”
그는 그녀의 앞에서, 마치 서임식에서 주군에게 인사하는 기사처럼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를 올려다보는 하이너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정중하고, 엄숙하다.
“감히 이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평생 연인이 되어주신다는 말보다 저는 더 강한 약속, 아가씨와의 더 끈끈한 고리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이건 청혼입니다. 낮에 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식 청혼입니다.”
“하이너!”
“저와 결혼해주십시오. 저를 평생 부려주십시오. 마나의 인이신 아가씨를 평생 모시며, 당신의 영원한 종으로 남고 싶습니다.”
마리는 새하얗게 질려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며 중얼거렸다.
“홀딱 벗은 채로 그렇게 진지해지지 말란 말이야…….”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내심 그 어느 때보다 하이너의 청혼, 아니, 자신의 몸 안에 깃든 거대한 힘을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자의 청혼을 진지하게 따져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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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편 더 남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