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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18화 (118/122)

00118  8. 삶, 삶, 삶  =========================================================================

플래티르콘의 다리.

서남쪽 방향.

황도에서 서남쪽 오를린까지 내려가는 길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특히나 마력 이동 편의 시설을 사용할 수 없는 요즘 같은 경우에는 각오를 단단히 해야만 한다.

황도 로귀하르트에서 플래티르콘의 다리를 타고 리데바인까지 간 다음, 줄곧 남하하여 생명의 역광 강을 타고 동쪽으로 가다 보면 네히트가 나온다. 그곳에서 강을 타고 동쪽으로 한참 동안 가야만 오를린이 나오는데, 전 황후 모녀와 그들을 지키는 남자 이 세 사람이 아무리 빠르게 간다고 해도 족히 오십 일 정도는 걸린다.

긴 시간도 시간이지만, 가는 동안 무사히 갈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공화정이 시작되고 옛 제국의 행정 체계는 급작스러운 변화에 몹시 어수선하다. 그 사이 공권력의 물갈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자연스레 공국 수도 이외 지역의 치안도 불안정해진다. 위험한 마력생물이 사라졌어도 마력생물보다 더 악독한 게 사실은 인간이라, 이런 시기 역시 여행자들에겐 그다지 좋지 않다.

로테와 리슈라, 그리고 헤그는 플래티르콘의 다리를 걸었다. 그러다가 리데바인에 가까워지는 어느 한 지점의 낡은 여관에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물론 치안 문제 때문에 그들은 한방을 썼다.

황도를 떠나 이레가 되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을 겪었다. 불량배들에게 시비가 걸리는 건 기본이고, 여자와 아이를 팔지 않겠느냐고 묻는 불법 노예 상인들의 음험한 권유를 받은 적도 있으며,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은 불한당들이 헤그에게 칼을 겨눈 적도 있다.

물론 헤그는 상처 하나 나지 않았고, 그런 그가 지키는 로테 모녀도 무사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습격을 당할 수 있단 사실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그렇잖은가. 단지 이레 동안 일어난 불상사들이라기에는 너무 잦다. 로테는 헤그에게 매번 보호의 도움을 받아도 어마어마한 불안을 느껴야 했다.

황도를 떠나던 당시만 해도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던 그녀는 금세 해골처럼 말랐으며, 리슈라 역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지 밤이면 밤마다 울어댔다. 지금도 리슈라는 목청 높여 울고 있다.

“으아아앙! 으아아아앙!”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밑바닥의 신산한 인생을 살다 보니 한밤에 우는 아이를 너그럽게 봐줄 성격이 되지 못했고, 여관 곳곳에서 로테가 묵는 방에 욕설이 날아들었다.

“거, 애 좀 조용히 시켜!”

“주둥이를 진흙으로 막아버리라고!”

“다섯까지 셀 동안 조용히 시키는 게 좋을 거야! 어디 팔려가기 싫다면 말이지!”

사람들의 모진 소리를 알아듣기라도 하는지, 리슈라는 더 서럽게 울어댔다. 참 박복한 아이다. 태어나자마자 앞 못 보는 저주에 걸리나 싶더니, 그 저주가 사라지자마자 아비를 잃었다. 그리고 이젠 어미와 함께하는 고단한 여행길.

“리슈라… 옳지, 뚝.”

로테는 리슈라의 기저귀를 확인해주기도 하고, 혹시나 추울세라 이불을 더 덮어주기도 해봤다.

그래도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로테는 결국, 리슈라에게 젖을 먹이기로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다. 잘 나오지도 않는 젖이지만, 리슈라는 어미의 가슴을 빠는 것으로 울음을 그치고 안정을 찾았다. 덕분에 여관에서 머무는 손님들의 사나운 말도 멈췄다. 그제야 로테는 한시름 놓았다.

‘오를린에만 가면 돼, 오를린에만 도착하면 우리는…… 편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제국이 몰락했다 하더라고 새로운 공국 정부는 기존 영지의 영주들에게 호의적이기에, 오를린 영지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오를린 영지민을 늘 움츠리게 했던 소용돌이 산의 사나운 마력생물들도 모두 사라진 터라 그곳은 인간이 지내기에 참 아늑하고 좋다. 로테는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도착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리슈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다.

이 좁은 방에서 시선이 느껴질 만한 곳은 단 한 곳.

언제 잠에서 깨어난 것인지, 저쪽에서 헤세가 이쪽을 보고 있다.

“……?”

헤그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미술작품을 감상하거나 고귀한 성물을 바라보듯, 어미가 아이의 젖을 먹이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그는 문득 로테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실수를 해버렸다.

로테가 비록 이제 더는 황후가 아니더라도, 예의는 지켜야 할 상대다. 그런데 그만 자기도 모르게 실례를 저지른 것 같다.

헤그는 소릴 낮춰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로테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았다. 수유하는 모습을 보던 헤그의 시선이 전혀 불쾌함을 자아내지 못할 정도로…… 순진무구했다고 할까?

“죄송할 것까지야. 자연스러운 모습일 뿐인데요.”

“…….”

“아니면 뭔가요? 유모에게 젖 주는 일을 맡겨야 할 황후라는 여자가, 이런 누추한 데서 직접 젖을 먹이니 우스워 보이나요?”

헤그는 그런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다시 고개가 돌아갔다.

“그건 절대 아닙니다만….”

그러다 그는 로테의 눈을 보았고, 로테는 풉 하고 웃었다.

헤그는 급하게 다시 시선을 깔았다. 로테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장난으로 해본 말이었어요. 그나저나, 검황께서도 당황하고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군요.”

헤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 황후가 이런 험난한 여정 중에 사람을 놀리는 여유를 보여주다니.

……몰락한 황가를 마지막으로 섬기는 헤그에겐 위안이 되는 모습이다.

그리고 헤그는, 방금 로테가 보여준 장난기가 마리와 닮았다고 느꼈다. 달라 보였어도 역시 이럴 때 보면 자매는 자매인 모양이다.

헤그가 다시 잠이 들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로테가 물었다.

“나를 오를린에 바래다준 후에 당신은 어쩔 예정이죠?”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헤그는 눈앞이 새하얘졌다.

어쩔 예정이라니. 특별히 계획은 없다. 몰락한 제국의 검황이 할 수 있는 게 대관절 무엇일까. 지금은 맡은 일만 끝난다면야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오를린까지 간 김에 그곳에서 가까운 괴지에 가보는 것도 좋겠지. 사괴탄의 마검제조공장을 둘러보고 싶다.

“……약혼녀를 만나러 가볼까 생각합니다.”

로테는 금시초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약혼녀요? 그런 사람이 있었나요?”

“있었…습니다.”

“지금 어디 있지요?”

“괴지에 있습니다. 아마, 있을 겁니다.”

마검제조 장인이 소멸했단 사실을 믿으면서도, 사실은 믿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라도 헤그는 괴지에 가고 싶고, 약혼녀가 만든 흔적을 느끼고 싶다.

로테는 괴지라는 말에서 헤그의 약혼녀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했다. 그리고 헤그가 누구인지도…… 알 것 같다. 여태 긴가민가하던 생각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역시 저 사람은 헤세가 아니라 헤그였어. 루빈의 그가 맞다고.’

이제 와 그의 정체를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로테는 리슈라가 잠이 들자, 자기도 잠이 들려고 누웠다. 헤그가 나지막이 밤 인사를 했다.

“그럼 주무십시오.”

“…….”

헤그와 사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좋았다.

적어도 이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한 남자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

「아가씨의 호위기사 말고, 진짜 기사가 되는 거지. 정식 기사 말이야.」

륀체르에게서 아주 매혹적인 제안을 받았으나, 하이너는 단칼에 거절했다.

진짜 기사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그는 ‘기사단장이 되는 것보다 공국의 슬기로운 치하에서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남자로서의 길을 택하겠다.’는 대답을 남기며 마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웃기지도 않아! 하고 륀체르가 못마땅해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

한때는 황제궁이었으니, 지금은 륀체르의 거처가 된 호화롭고 널찍한 방.

마리는 그곳 바닥에 놓인 괴이한 모양의 샹들리에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곁에 륀체르가 없는데도 륀체르에게 하듯 중얼거렸다.

“오, 사파이어! 너는 어쩜 이리도…… 한결같을 수 있는 거니?”

동그란 두 개의 유리구와 그 각각의 가운데 붉은색 광석을 받은 샹들리에는 마지 예전에 선물 받은 유방 반지의 장식을 거대화한 모습이다. 이런 것을 선물이랍시고 주는 것에 마리는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선물한 자를 찾아가 그 가슴에 딱총을 날려야 할지 고민됐다.

“이 변태가 공국의 집정관이라니! 정말 큰일인걸! 법도 막 이상하게 만드는 거 아니야? 가슴 작은 여자는 노역 의무를 더 부과한다든가, 가슴 큰 여자에겐 높은 자리를 준다든가 하는…… 좀 얼간이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지. 궁에 새로 들어온 시녀들의 그 가슴이 파인 옷을 보면 딱 느껴지잖아? 흐음.”

그녀는 이 선물을 거절하자니 좀 아쉽다. 선물에 붙은 보석들이 좀 고가인가? 그렇다고 보석 하나하나 다 떼 가자니 이런 샹들리에를 완성한 장인의 예술혼을 무시하는 짓 같기도 하고……, 그런데 한편으로는 가슴 변태 집정관의 주문에 따라 이런 걸 만든 장인에게 과연 예술혼이 있나 싶기도 하면서 머리가 복잡해지는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한 남자가 그녀를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보고 있다. 그는 바로 하이너 그로스.

세상 모든 마력을 압축한 최강의 인간이라고 해도,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남자에게 받은 선물 그 휘황찬란함에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몹시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딴 녀석이 준 것을 뭘 그리 유심히 보십니까!’

보라. 아가씨께서 저렇게 보석 하나하나를 만지는 해낙낙한 손길을. 그리고 보석보다 더 빛나는 눈빛을! 아가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변태 같은 모양의 샹들리에는 아니라고 생각하듯 체머리를 흔들다가도 다시 보석을 만지신다.

그것은 지켜보는 호위기사 아니, 연인의 가슴을 불타오르게 했다.

“아가씨.”

그가 마리의 뒤에 바짝 서자, 놀란 마리가 뒤돌아섰다.

“어머, 언제 왔니? 글쎄 이젠 아가씨라 부르지 말고 마리라고 부르래도…….”

“결혼합시다.”

“……하?”

급작스러운 청혼에 마리는 당황했다.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영원한 사랑의 맹세를 얻은 뒤라 득의양양해진 건가?

결혼이라니, 당치도 않다.

그녀는 호위기사의 옷에 구김이 간 것을 펴주며 가르치듯 말했다.

“아직 세계 정복이란 숙제가 남아있다고. 내 말 알지?”

하이너에게 이 거절이 반가울 리 없다.

그런데 그때, 하이너 대신 하이너의 대변인이 된 사람이 그곳에 도착했다.

“이봐, 야망쟁이 아가씨! 이제 암흑지형도 없고 차원균열도 없는데 세계 정복은 뭐하러 하게?”

그는 륀체르 사파이어로, 기사단장직을 거절한 하이너를 어떻게든 회유하려고 머리를 굴리고 있다. 아가씨가 또 세계 정복이다 뭐다 해서 대륙 곳곳을 다닌다면, 그의 호위기사도 아가씨를 따라가느라 이곳에 머무를 일이 없다. 그렇게 되면 기사단장직에서 더더욱 멀어지겠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사단장 하이너 그로스라는 완성체를 보고 싶은 륀체르는 지금 당장 마리의 세계 정복 욕구를 꺾어야 했다.

“귀찮게 살지 말고 이곳에 눌러앉으라니까. 세계 정복을 꼭 거창하게 할 필요 있어? 차기 오를른 영주 후보인 마리니시네 네가 이곳 로귀하르트 공국의 의원으로 살면서 세계를 조금씩 천천히 바꾸는 것도 정복이라 할 수 있다고. 좀 생각을 유연하게 해보란 말이야. 그리고 그리고 대체 뭐 때문에 세계 정복에 집착하는 거야, 응?”

높은 자리를 제안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나, 마리는 딱 잘라 거절했다.

“어머나! 집정관 감투를 쓰시더니 정부 인사도 막 제멋대로 하려고 하시네요? 웃기지 말라고! 너 같은 제멋대로의 독재자가 집정관으로 있는 이상, 내게 세계 정복을 해야 하는 명분은 사라지지 않는 거라고!”

그러자 륀체르가 눈을 축 늘어뜨리고 혀를 내미는 등 힘 빠진 시늉을 했다.

“오, 그런 말은 말자. 기껏 의원직 하나 주겠다는 말 했다고 나를 제멋대로 행동하는 인간으로 판단하면 곤란해! 그리고 뭐? 독재자라고? 진짜 독재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랴?”

“뭐?”

진짜 독재자. 그 말이 곧 최강의 마력을 가진 자기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어서 하이너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마리는 륀체르가 하는 말의 의도가 궁금했다.

“륀체르, 무슨 말이야?”

륀체르는 하이너를 가리켰다.

“네 기사님께 물어봐. 여전히 드래곤이신 네 기사님께…… 물어보란 말이지.”

여전히 드래곤이라……, 마리는 하이너를 의심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너, 아직도 마력이 있는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뾰로통했다.

“제 청혼도 받아주시지 않는 분께 대답해서 뭐합니까.”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표지를 바꾸었어요. 이 소설도 끝나가고 취미 삼아 놓았던 그림이나 그려보려고... 그래서 표지가 시시각각 변할지도 모르겠음. 세라비이 2호 말로는 표지의 하이너가 댕기동자 같다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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