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7 8. 삶, 삶, 삶 =========================================================================
헤그는 로테에게 왕관을 전해준 뒤 황제궁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 않다. 궁이 사파이어 색깔의 깃발들로 얼룩져 있다. 로귀하르트를 상징하던 붉은색의 깃발은 사라지고, 궁 전체가 파랗게 물들어 있다. 바너에서 올라온 륀체르 사파이어의 사병들이 궁을 점령한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가까운 트리아노네에 있던 헤그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고요하고, 신속했다. 그만큼 륀체르의 지휘력 또한 뛰어나다는 걸 증명했다.
때마침 저 멀리, 본궁 건물에서 륀체르가 나왔다. 헤그는 실눈을 떠 륀체르를 살펴보았다.
거리가 멀지만, 반역자의 표정이 잘 보인다. 전혀 웃지 않는 표정, 어찌 보면 죄책감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륀체르의 표정에, 헤그는 직감했다.
자신의 친우, 로귀하르트 제국 황제 비오르틴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온몸에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하다.
“비올…….”
아버지와 사괴탄을 잃었을 때처럼 먹먹함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어찌할 도리도 없이 몰락해가는 권력의 소용돌이에서, 친우를 지킬 수 없을 거란 사실에 친우와 함께 죽으려고 황제궁에 있었다. 그런데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친우가 먼저 가 버렸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났다.
륀체르의 손짓에 수십 명의 병사가 헤그를 둘러쌌다. 그 밖으로는 수백 명의 궁수가 압박한다. 이렇게 되면 제아무리 무적의 헤그라고 해도, 륀첼의 군대에 맞서거나 도망갈 도리가 없다.
륀체르는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만면에 화사한 미소를 띠고 헤그의 앞에 섰다. 촤앙! 장검을 빼 드는 소리가 끌밋하다. 바너의 검 장인이 만든 최고급 검은 이 순간 숙련된 검황의 검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륀체르는 헤그의 목에 검을 갖다 대며 선택권을 주었다.
“자, 나 바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여기서 죽을래, 아니면 트리아노네의 그분(로테)을 오를린까지 모셔다드리는 호위기사 노릇을 할래?”
헤그의 눈이 흐려졌다.
선택권을 받았지만, 듣기에 영 기분이 좋지 않다. 황후를 데리고 오를린까지 가라고? 그래. 아무래도 약한 모녀가 머나먼 길을 가려면, 호위가 필요하긴 할 테지.
하지만 어째서 륀체르 저 자가 직접 지시하는가? 로테를 오를린에 보내려면 자기가 직접 호위를 붙여도 되잖은가?
설마…… 검황, 황후, 황녀 모두 오를린으로 가는 길목에서 한꺼번에 죽이려 하는 의도는 아닌지.
온정을 베풀면서 귀향하게 해준다고 해도 결국은 보여주기 식이나 마찬가지다. 누군가 보지 않는 으슥한 곳에서 죽여 버리려는 것이, 륀체르의 의도일 것이다. 무릇 반역자들은 승리를 거두면 황손의 씨를 말리는 법이니까.
헤그는 그 속셈을 알 것 같았지만, 그런데도 한 번 물어는 보았다.
“어째서 그분은 살려두는 거지?”
륀체르는 여전히 헤그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댄 채로 천사처럼 대꾸했다.
“난 여자와 아이에겐 언제나 관대하지.”
헤그는 차갑게 비웃으며 물었다.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죽이는 게 당신이 말하는 관대함인가?”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라니까. 관대하게 살려드리겠다고. 그러니 당신은 잘 선택하는 게 좋아. 생각해 봐. 황녀 전하를 지키는 게 검황의 마지막 임무였다……, 그림이 좋잖아?”
헤그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여기서 죽는 것도 마뜩잖다.
친우의 처와 그 자녀를 책임질 수 있는 데까지는 책임지고 싶었다.
“…… 좋아.”
“수락한단 뜻이겠지?”
“그래.”
륀체르는 검을 거두고 헤그를 보내주었다.
헤그는 륀체르 사병들의 감시하에, 다시 트리아노네로 가야 했다.
그리고 얼마 후, 트리아노네에선 아니카 아니, 리슈라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흐아아아앙! 으아아앙! 흐애애애앵!”
궁을 떠나면서 부산스러움에 짜증이 나 우는 걸까. 아니면 배가 고파 우는 걸까. 아니면 잠을 자지 못해서 우는 걸까.
원인이 무엇이든…… 아기의 울음소리라기엔 너무 구슬퍼 듣는 헤그의 심장을 건드린다.
어쩌면 리슈라는 제 아비에게 드리워진 죽음을 아는지도 몰랐다.
***
로귀하르트 제국은 로귀하르트라는 구 황가의 성을 버리지 않았다. 다만, 제국이라는 명칭을 공국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새로운 공국은 집정관 륀체르 사파이어의 주도로 변화를 맞이했다. 제국기술원에서 마력과 관련한 기술을 다루던 이들은 싹 물갈이되었고, 마탑도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했다. 검은 기운이 사라진 암흑지형은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섰고, 각 지역의 텔레포트 홀은 폐쇄되었다. 그리고 제국의 식민지였던 동한과 서한은 자치령이 되어 공국과 평등한 관계를 맺으며 나아가기로 했다.
마력이 사라진 시대, 인간들은 나름대로 살아갈 방식을 구했다. 공국은 인간의 순수한 힘과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기치 아래 의원들을 새로 꾸렸다. 그리고 공국민들은 집정관 사파이어의 새로운 정치를 환영해 마지않았다.
특히나 오슬의 수인족은 륀체르를 신격화했다. 왜냐하면, 륀체르의 주도로 드디어 오슬의 수인족에게도 공국 시민권이 부여된 것이다. 륀체르는 그것 말고도 암암리에 일어났던 종교 탄압을 엄벌하는 법도 만들었다.
모든 일이 가탈 없이 진행되는 와중에 집정관의 정신을 긁는 게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플래티르콘의 다리.
로귀하르트, 할데바인, 로젠플라드 세 곳의 주요 도시를 편히 드나들게 하려고 만든 삼각형의 대형 마력 다리는 마력이 사라진 지금도 하늘에 온전히 떠 있다. 대륙에서 마력은 모조리 사라졌는데, 그 다리에만 마력이 남은 듯 아주 당당하게 말이다.
그 때문에 플래티르콘 다리 아래 살던 밑바닥 인생들은 깔려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다. 다만, 언제 다리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에 하나둘 그곳을 떠나가는 분위기다.
륀체르는 플래티르콘의 다리가 수상하고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다. 마력의 상징이나 마찬가지가 돼 버린 거대 다리가 하늘에 떠 있는 이상, 사람들은 마력을 향한 희망 혹은 집착을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마력 없는 보통 인간들의 새 시대를 연 집정관의 권위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짐짐한 가운데 궁에 손님이 찾아왔다. 바쁘신 집정관의 사정을 알지만,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다는 요청. 마리니시네 루 오를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에게서 온 요청.
륀체르는 온갖 일정을 미루고 마리를 만나기로 했다.
***
“아아! 사파이어 집정관님! 하해와 같으신 마음으로 제 동생의 무사 귀향을 도와준 것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아야 할지요!”
마리는 신을 만나기라도 한 듯 정중한, 너무 정중해서 비꼬는 것 같은 느낌으로 륀체르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로테가 헤그의 보호를 받으며 오를린까지 이동한다는 말을 들은 마리는 걱정에 빠져 있다. 황족이라면 무조건 죽일 륀체르가 황후와 황녀를 과연 무사히 돌려보낼 수 있을지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륀체르는 동생을 걱정하는 마리의 불안한 마음을 훤히 꿰뚫었다. 그는 자기에게 씐 누명이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그러지 말라고. 왜 날 못 믿는 거야? 난 여자와 아이에겐 관대하다.”
섭섭하단 투로 말하며 자리에 앉는 륀체르에게 마리가 마주 앉으며 씩씩거렸다.
“왜 널 못 믿느냐고? 그야 네가 내 동생을 그런 방식으로 고향에 보냈기 때문이지!”
“그런 방식?”
“궁에 넘치고 넘치는 게 사파이어 사병 아니, 공국 수호대 아닌가요? 그들에게 호위를 맡기지 않고 달랑 한 사람, 그것도 옛 검황에게만 호위를 맡기다니! 그건 마치, 그건 마치 돌아가는 길에 내 동생을 검황과 함께 죽여 버리겠다는 의미로 보인단 말입니다! 알겠어?”
륀체르는 마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에 질식할 것 같다. 형제라고는 꼴 보기 싫은 이복형밖에 없었던 륀체르에게, 마리가 느끼는 자매애는 솔직히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다.
“워워, 진정해. 헤세의 검은 제국 최고라고. 네 동생의 호위를 아무에게나 맡긴 게 아니란 말이다.”
하이너 역시 흥분한 마리에게 진정하라고 달랬다.
“아가씨, 분노는 피부에 좋지 않습니다.”
“지금 그깟 피부…!”
마리는 지금 그깟 피부가 문제냐고 외치려다가 갑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발갛게 달아오른 자기 얼굴을 손부채 질로 식히며 차를 들었다. 그리고 제 호위기사에게 보내는 사랑스러운 눈빛까지.
무슨 저런 여자가 다 있나? 분노에서 순식간에 침착함이라니. 감정 변화 속도가 아주 아주 빠르다. 륀체르는 흥미로운 눈길로 마리를 보았다.
하이너는 마치 능숙한 조련사가 야수를 다루듯, 마리에게 일렀다.
“집정관‘께서’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하셨으리라 믿지는 않습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아가씨의 동생인데 나쁜 마음을 품으셨겠습니까.”
륀체르도 거들었다.
“그럼. 로테아르카와 그녀의 딸은 무사히 오를린까지 도착할 거니까 화 풀라고. 아, 그리고 잠시 내 방에 좀 가 있겠어?”
마리가 미심쩍은 표정을 하며 되물었다.
“네 방에는 왜?”
“거기 샹들리에가 있어. 특별 제작한 거지. 네가 온다기에 선물하려고 주문해 놓은 거다.”
“흠, 그래? 설마 유방 모양은 아니겠지?”
륀체르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그것으로 대답이 된 거나 마찬가지다.
마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런 심각한 때에 또 유방으로 장난을 치려 하다니…… 가방에 있는 유방 반지라도 당장 땅에 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그녀의 감정이 또 격렬해지려 하자, 하이너가 끼어들었다.
“설마 진짜 그런 모양이려고요. 아닐 겁니다. 가서 보고 오십시오.”
마리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 선물을 외면하지 말라고.”
“아가씨, 어서요.”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보니, 왠지 두 남자 사이에 할 말이 있어 보인다.
“륀체르, 두고 보자고.”
마리는 시중의 안내를 받아 륀체르가 기거하는 곳으로 갔다.
두 남자만이 남은 탁자엔 침묵이 감돌았다. 륀체르는 하이너가 대체 무슨 수를 써서 마리를 순식간에 얌전하게 만든 건지 궁금해했고, 하이너는 지긋한 눈길로 륀체르를 보고 있다.
‘뭐야, 저놈의 전직 드래곤 자식. 설마 아직도 마력이 있는 거야? 그래서 분노하는 아가씨를 순식간에 최면을 걸어 얌전하게 만든 거?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보이는데…….’
한참 후에야 륀체르가 입을 열었다.
“어이, 드래곤.”
“무슨 소리냐. 난 드래곤이 아니다.”
천연덕스러운 표정의 하이너가 딱 끊어 부정했지만, 륀체르는 믿지 않았다.
“궁에 온 진짜 목적이 뭐지?”
“진짜 목적? 아가씨께서 당신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하셔서.”
“글쎄. 그게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맞아.”
“하! 웃기지도 않는군. 그런 큰 힘을 갖고 여길 그냥 온다고? 그게 말이 돼?”
“말이 안 되면?”
“…….”
하이너는 륀체르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것 같다. 륀체르는 지금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 여전히 드래곤의 마력을 가진 게 아닌지, 그 마력으로 집정관의 자리를 위협할 것인지…….
하이너는 짧은 말로써 륀체르에게 경고했다.
“집정관.”
“왜.”
“앞으로 잘하는 게 좋을 거다.”
“뭐?”
“이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플래티르콘의 날개가 이곳에 떨어질지도 몰라.”
“…… 뭐? 뭐가 떨어진다고?”
“인간 육포라고 들어는 봤나? 궁에서 대량 생산될 테지.”
그리고 그 순간, 하얗게 빛나는 하이너의 눈.
륀체르는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인간 육포라니, 이 잔인한 놈!”
여전히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랬기에 플래티르콘의 다리가 멀쩡하게 하늘에 떠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저 자의 눈이 저렇게 기묘한 빛을 띠는 것이리라.
륀체르는 하이너가 마나의 인을 파괴하고, 진정 모든 마력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치듯 의자에서 일어났다.
“뭐야! 이거, 이거, 되게 찝찝하잖아! 진짜 찝찝하다고!”
집정관이 되고 제국을 통솔하는 인간이 되어도, 왠지 저 정의의 기사님께 계속 감시받고 살 것 같다. 여태 과감하게 행해온 반역의 일들이 종이인형의 놀음처럼 한심해지는 느낌에, 륀체르는 짜증이 치솟았다.
그러나 정작 하이너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는 눈치다.
“찝찝할 게 뭐 있나? 명색을 공국으로 해놓고서 독재만 하지 마라. 그러면 이 궁이 플래티르콘의 날개에 박살 나는 일은 없으니.”
요는 드래곤 자신은 최고의 힘을 숨긴 채, 집정관의 감시자가 되겠다는 선언.
하이너는 용건이 끝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만나서 반가웠다. 난 이만 일어서겠어.”
그 순간, 륀체르가 다가가 하이너의 팔을 잡았다. 하이너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륀체르는 손이 떨리는 것을 겨우 참으며, 하이너에게 자기가 생각한 가장 최선의 수를 두었다.
“가긴 어딜 가! 날 감시할 거면 먼 데서 하지 말고…… 여기서 해. 여기서 네 아가씨와 함께하라고!”
“뭐?”
“그러니까, 기사단 단장이 되는 게 어때?”
그 수란 바로, 가장 강력한 힘을 공국을 수호하는 자리에 앉히는 것.
하이너의 눈이 반짝였다. 과거 ‘소박하게’ 기사 작위를 꿈꾸었던 그가 기사단 단장이라는 직위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륀체르는 찰나에 하이너의 심리를 간파하곤, 이 권유에 더욱 강조를 해주었다.
“아가씨의 호위기사 말고, 진짜 기사가 되는 거지. 정식 기사 말이야.”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성탄절 연휴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