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16화 (116/122)

00116  8. 삶, 삶, 삶  =========================================================================

어느 해, 그러니까 비오르틴에게 아직 앳된 소년티가 그대로 남아있었을 때의 일이다.

먼 곳에서 황궁까지 손님이 찾아왔다. 궁의 출입 허가를 받은 적이 없으며 귀족 작위도 없는 그자의 이름은 바로 륀체르 사파이어였다. 그는 비록 귀족 작위는 없어도 바너의 모든 길드장을 통솔하는 길드 마스터의 직위는 있었다.

그의 진알 요청에 궁 안 황족, 귀족의 시선이 쏠렸다.

“제 아비를 죽이고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데, 그런 자가 무슨 이유로 황태자 전하를 만나려고 하는 게지?”

“모르지, 뭐. 설마 바너의 영주 자리를 달라고 청할지도?”

“오, 그거……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새끼 사자와 바너의 깡패가 장래를 위해 힙을 합친다는 그림인가?”

황태자는 처음엔 륀체르의 진알 요청을 거절했으나, 사흘에 걸친 집요한 요청, 포기를 모르는 륀체르의 성격이 괘씸하기도 하고 흥미가 도는 것도 사실이라 결국에는 진알 요청을 받아들였다.

둘의 만남은 야울 궁의 응접실에서 단둘이서만 은밀하게 이뤄졌다.

그들의 회담이 있었던 후, 황태자의 친우 헤그는 걱정이 되어 궁을 방문했다. 륀체르가 바너의 영주 자리를 황태자에게 청탁했을 거라고 여긴 헤그는, 황태자가 그 청탁을 받아들이는 것을 시기상조라고 여겼다.

“어쩌실 겁니까.”

“지원해야지.”

“하지만 륀체르 사파이어는 출신이 불분명한 자 아닙니까. 그에게 도는 소문도 심상치 않아 뒤탈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그래. 자기 입으로 뒷골목 출신이라 하더군. 제 아비를 죽였느냐고 묻는 말에 딱히 부정하지도 않았고.”

“너무 솔직한 인간이군요.”

“…… 그래서 마음에 들었어.”

헤그는 황태자의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황태자가 륀체르 사파이어와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궁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어. 그래서 염력어로 대화를 나누었지.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엔 어떤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는 자신에게 단점이 될 만한 사실도 거침없이 말해주더군. 내가 내게 진실한 자의 부탁을 어찌 외면하겠나?”

“그저 솔직하다고 해서 청탁을 들어주려 하시다니요. 그리고 그가 솔직한지 아닌지 누가 장담한단 말씀입니까.”

“내가 그런 조사도 하지 않고 그를 만났을 것 같나?”

황태자는 륀체르가 진알 요청을 하는 사흘이라는 시간 내내, 륀체르에 관한 모든 소식을 수집했고 그 정보를 토대로 륀체르의 진심을 판단한 것이다.

헤그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가 륀체르 사파이어라는 자에게 느낀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헤그 너도 알겠지만, 염력어는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지. 특히나 도시 뒷골목 출신 창부로 살아온 이가 단시간에 배우기엔 너무 어려운 기술이야. 그런 기술을 그자는 마치 그제, 어제, 늘 써왔던 것처럼 능숙하게 썼어. 염력어 뿐만이 아니야. 손 한 번 대지 않고 빈 찻잔을 탁자에서 옮기는 것, 그 속도를 볼 때, 그의 염력은 상당 수준이지.”

“즉, 그 말은…….”

“그는 길드 마스터가 되기 이전부터 자기 앞날을 준비할 줄 아는 인간이란 이야기지. 탐나지 않아?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거기까지 올라와 그런 능력을 거침없이 쓰는 패기. 나는 그런 자의 부탁을 외면하고 싶지 않아. 그리고 친해지고 싶지.”

헤그는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었다. 앞을 그릴 줄 아는 용기 있는 야심가는 나중에 황태자가 황권을 잡을 때 크게 이용할 수 있는 존재로 클 것이다. 황태자는 아군을 만들어두려 하는 것이다.

“그럼 그를 정말로 바너 영주로 천거하실 예정입니까?”

“무슨 말이야, 바너 영주라니? 내가 황제 폐하라도 되는 줄 알아? 난 아직 거기까지 힘이 미치지 못해.”

“그렇다면…….”

“듣자하니 예전 길드 마스터의 편에 서서 상업을 주름잡던 이들이 륀체르에게 날을 세운다더군. 나는 그걸 조금 정리해줄 작정이야. 그가 바너에서 막힘없이 사업할 수 있도록 말이지. 그거야말로, 지금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호의지.”

황태자는 그 당시만 해도 륀체르를 도와주면서, 거목으로 자라날 나무의 씨를 심는 기분만을 느꼈다. 그 후로 그와 형과 아우 할 정도로 친분을 다지면서, 헤그 다음으로 든든한 사람을 얻었다고 여겼다.

***

황도 로귀하르트.

궁의 겨울은 죽은 듯 고요하다.

황제궁 연못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매끈하고 투명한 표면은 마치 물이 아니라 거울 같고, 그 위에 떨어진 빛은 태양의 부서진 파편 같다. 물가의 헐벗은 나뭇가지에서 사파이어처럼 새파란 털 빛깔을 가진 겨울새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그 때문에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들이 연못으로 떨어져 작은 파문이 일었다.

그런데 파문이 인 것은 연못뿐이 아니었다.

연못가에 자리를 깔아놓고 책을 읽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황제 비오르틴의 암흑 같은 꿈속에서도 파문과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아…!”

제 입으로 내지른 짧은 신음에, 악몽을 꿨단 걸 지각한 황제는 눈을 떴다. 시린 겨울 해가 얼굴을 강타했다.

“허, 허헉…….”

너무나도 생생한 악몽, 그 속에서 륀체르는 자신의 목을 잘라 버렸다. 최근 그가 반란군을 데리고 진격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인지 꿈도 그런 흉흉한 걸 꾼다.

황제는 그를 믿고 싶다.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륀체르가 자신과 제국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륀체르에게 예전에 그러했던 것처럼 염력어를 보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그의 성을 부르고, 이름을 부르고, 친하게 어울리던 때처럼 형이라고 불러도, 륀체르에게서는 답이 없다.

아아, 어둡다. 포르투바를 암살한 륀체르는 이제 제국을 넘보려 하겠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거나 다름이 없다. 황의회 의원들과 황제가 가진 모든 재산을 합쳐도 륀체르가 가진 것에는 미치지 못하고, 그러므로 륀체르는 거침없이 군대를 일으킬 것이다. 아니, 이미 일으켰다. 사파이어 가의 깃발이 이곳에 꽂히게 되면, 제국 황제에게 미래는 없다.

그게, 현실이다.

비오르틴은 새하얗게 질린 자기 두 손, 이제는 무력해져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두 손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제발, 그 아이만은……!”

***

트리아노네.

현재 트리아노네에 시녀라고는 없다. 당연한 일이다. 황의회 의원들도 황도를 버리고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섰는데, 귀족 출신의 시녀들이 궁에 발을 붙이고 있을 리 없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저 멀리서 먹구름이 쫓아오면 비와 벼락을 맞기 싫어하는 이들은 알아서 또 다른 햇볕이 드는 자리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구름에 가려진 해는 그들을 도무지 막을 도리가 없다.

로테는 지금 콧노래를 부르면서 오를린의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내용은 곧 자신이 딸과 함께 귀향할 테니 기다려달라는 애정 어린 말이다. 아직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은 오를린 출신의 병사 하나가 편지를 받아들고 먼 길을 떠났다.

로테는 아니카가 잘 자는지 확인했다. 딸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 그 어디에도 현 상황에 관한 걱정은 찾아볼 수 없다. 이미 그 점에서 그녀는 자기가 황족과는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고 느낀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얼마 전 포르투바가 암살당했어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포르투바는 제국 기술원을 이용하려고 접근한 관계, 황족의 안위와 아니카의 눈을 치료하려고 접근한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황족의 파멸이 결정되고 아니카의 눈이 정상으로 돌아온 지금, 로테에게 포르투바는 먼지와 같은 단어일 뿐이다.

어미의 기척을 느낀 아니카가 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다. 청록색의 커다란 눈동자는 어미의 얼굴을 보자 한층 더 밝아지는 듯하다. 로테는 그런 딸의 눈을 보면 그저 좋아서 딸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두 눈을 마주치며 다정히 말했다.

“그거 아니, 오를린의 봄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걸? 사람들은 로샤타르트의 평지가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하지만, 그건 오를린의 진가를 알지 못해서 하는 말이야. 평지의 사계절은 단조롭지. 오를린은 그렇지 않아. 서쪽으론 실렌틴 광산, 북쪽으로는 소용돌이 산, 남쪽으로는 괴지와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둘러싸인 오를린은 봄만 되면 사방에서 꽃으로 물든 산을 볼 수 있단다. 소담한 계곡과 그 물을 찾는 작고 아름다운 동물들도 그림 같지! 왜 몰랐을까. 그곳이 낙원의 풍경과 가장 닮았었는데, 왜 모르고 나는…… 황궁을 원했던 걸까. 딸아. 우리는 그곳에 갈 거야. 너는 거기서 크게 되겠지. 평온하게, 또 한가롭게…….”

“그아아아, 갸아.”

아니카는 어미의 말에 대꾸라도 하듯 옹알이를 하며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때, 황제궁의 사람 하나가 찾아 왔다.

그는 바로 검황, 아니 이제는 권력의 불안정함으로 검황이라는 직위조차 입에 올리기 무안해져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 헤세 레 지괴르. 곁을 지키는 이가 모두 사라진 황제에게 유일하게 남은 한 사람이다.

헤세는 가지고 온 상자를 로테에게 내밀었다.

로테가 물었다.

“이것은 뭐죠?”

“열어보시면 압니다.”

로테는 아니카를 잠시 침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보았다. 상자의 가장 위쪽엔 종이가 놓여있다. 종이를 펼쳐 드니, 고어로 리슈라, 즉 ‘빛’ 혹은 ‘행운’을 뜻하는 단어가 적혀 있다. 어쩐지 필체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헤그가 쪽지에 관해 설명했다.

“폐하께서 보내신 아니카 전하의 새 이름입니다.”

로테는 하! 하고 비웃었다. 아니카라는 이름에 결코 좋은 뜻이 담긴 게 아니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서글픈 이름을 지어준 이는 바로 다름 아닌 아니카의 아버지 비오르틴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무슨 마음의 변화로 새 이름을 지어주는 것인지?

로테는 종이를 바닥에 버리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속은 반짝이고 있다. 로테가 한때 썼던 작은 왕관, 거기서 나오는 빛이다.

“이것은…….”

어제, 로테는 이 왕관이 더는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오늘 황제는 이것을 다시 돌려주고 있다.

로테는 뚜껑을 닫아버리며 짜증스럽게 외쳤다.

“내 것이 아니니까 돌려준 것일 텐데요!”

“그랬지요. 하지만 폐하께서는 이것을 다시 당신이 가지길 원하십니다.”

“대체 그이는 무슨 생각을…….”

헤세는 황제에게서 들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이 말씀을 전해주라고 하셨습니다.”

“……?”

“이 왕관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로테아르카 당신뿐이라고. 마리니시네가 아닌 오직 당신뿐이라고.”

그는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뒤돌아서서 그곳을 나섰다.

로테는 확 분노가 치밀었다.

이 왕관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 나라고? 언니가 아닌 나라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왕관.

바너의 길드 마스터 륀체르 사파이어가 제작했다는 고가의 물건.

무겁고 사치스러운 것.

혹은…… 아름다운 것.

이걸 마리가 아닌 자신에게 주는 이유가 뭔가. 이 무겁고 사치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자신에게 주는 이유가 대관절 뭐냔 말이다.

“왜 이딴 걸 내게 주는 거야! 내가 되돌려준 걸 왜, 어째서! 어째서 마리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마음을 안정하려고 아니카를 안아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 날씨가 추워서 그런 게 아니다. 단지 겨울이라, 마력 난방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은 절대 아니다.

불길한 일이 어디선가 일어나는 것 같다.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지는 것만 같다.

왠지 그런 느낌에 온몸이 떨렸다.

그런데 그 느낌이 자신의 느낌만은 아닌지, 아니카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으애애앵…….”

로테는 아이를 달랬다.

“자자, 괜찮다. 다 괜찮단다…… 리, 슈……라.”

싫은 말을 했으면서도 끝내는, 아니카의 새 이름, 더 밝고 희망찬 이름을 부르는 그녀다.

***

그 시각, 황제궁.

황제의 처소에는 붉은 열기가 가득하다. 그것은 갓 반역을 당한 황제의 몸에서 나오는 피의 온도일까. 아니면 반역을 일으킨 어느 청년이 뿜어내는 야심의 온도일까.

바닥에 쓰러진 비오르틴의 모습은 처참하다.

륀체르는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살에서 자신의 단도를 빼 들었다.

참 적절한 시간이었다. 그림자처럼 황제를 지키던 검황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자신이 황제의 거처에 찾아들었으니 말이다. 뭐, 물론 검황 헤세 레 지괴르가 있었다고 해도 황제를 지킬 가능성은 0이겠지.

륀체르는 하늘이 자신을 돕는다 생각하며 피 묻은 구두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피 묻은 단도를 닦으며 한 쪽 입가를 올렸다.

“참 고단한 여정이었어, 할데바인 땅을 지나 로귀하르트까지…… 그치? 나도 이런 단시간에 해낼 줄은 몰랐다고.”

그의 부하들은 륀체르와 같은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제국의 미래는 밝을 것 같습니다. 마스터. 아니, 이제는 폐하라고 불러야 하나요?”

“글쎄. 난 폐하라는 호칭 싫은데. 집정관 어때? 그게 더 세련돼 보이잖아. 세습권력은 역사에 남겨버리고 이제 공화정을 시작하자고.”

부하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피 흘리는 황제의 육신을 관에 담았다. 그리고 그 관은 밖으로 옮겨졌다. 로귀하르트 제국의 마지막 황제, 비오르틴과의 영원한 이별에 륀체르는 모자를 벗어 정중히 예를 갖추며 중얼거렸다.

“이제 편히 쉬길 바란다. 형이 돼서 뒤통수나 치고 정말 미안하구나.”

이제 비오르틴의 육신은 초라한 땅에 버려질 것이다. 이왕이면 괴지와 가까운 곳이 좋겠다고, 륀체르는 생각했다.

권력은 이런 것이다. 이토록 단순한 것이다.

치거나, 당하거나.

그게 자신의 지론이다.

륀체르는 황좌에 앉으며 모두에게 명령했다.

“자자, 황의회에서 이빨을 가장 잘 털던 놈 데려와. 본격적인 일은 지금부터잖아?”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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