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14화 (114/122)

00114  8. 삶, 삶, 삶  =========================================================================

그 장소는 마리가 당분간 편하게 쉴 수 있는 시귀르의 거처이다.

***

황도 로귀하르트.

황제궁.

검은 드래곤이 향한 곳은 바로 이곳, 황제가 있는 곳이다. 멀리서 검은 드래곤의 모습을 발견한 궁의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제각각 으슥한 곳에 몸을 숨겼고, 검은 드래곤은 황궁 광장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왠지 그의 걸음걸이가 이곳에 날아올 때의 빠르기처럼 빠르지 않고 느리다.

검은 드래곤은 위엄이 넘치는 건물의 기다란 복도를 걸었다. 그의 내부에선 제각각의 욕망을 지닌 여러 인격이 끊임없이 다투어댔다.

마황은 여전히 ‘암흑 지형을 파괴하여 세상의 비밀을 밝히라!’고 강요했고, 대현자는 ‘인간 마력자들의 마력은 간에 기별도 차지 않는다!’며 ‘얼른 마나의 인을 움직여 세상 모든 마력을 들이켜라!’고 부추겼다.

지칠 줄 모르는 그들의 부추김을 멈추는 존재는 마르틴, 즉 검은 드래곤의 죽은 동생이다. 마르틴의 영혼은 그 파괴적인 인격들에게 경고하며 제 형이 나아갈 길의 등대 노릇을 해주었다.

「다들 조용히 하지 못해! 모두 좀 닥치라고!…… 그리고 형! 형도 참을 만큼 참았어! 이젠 망설이지 마!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다 알아. 형이 저들에게 시달리고, 빌어먹을 가을 때문에 드래콘 소녀만 보면 괴로워했다는 걸! 어디 드래콘 소녀뿐이야? 그 대부호의 비서 노릇을 하는 흑인 여자에게도 괴로움을 느껴야 했지! 그래서 형은 늘 충동에 시달려야 했어! 발정 충동이 아니라 마나의 인 자체를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말이야! 하지만 형은 마나의 인을 파괴할 수 있으면서도 그러지 않았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마르틴의 영혼은 잠시 침묵한다.

하이너는 동생의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듣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틴은 기어이 이어서 말하고 만다.

「마나의 인을 파괴하면…… 나를 살아있는 때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 그게 두려웠기 때문이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하이너는 걸음을 멈추었다. 번뇌에 시달려 새하얗게 된 그의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나 때문에 마나의 인을 파괴하지 못한 거잖아!」

하이너는 가슴이 저릿했다. 동생의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니라, 동생 영혼의 목소리가 뇌리에서 울리는 것뿐인데, 마치 성대에서 울리는 서글픈 감정의 목소리가 두 귓가에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러지 마.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영혼이 부활하려면 누군가의 신체를 강탈하는 건 필수라면서? 그건 싫어. 나는 남의 몸을 빼앗아가면서까지 살고 싶지 않아. 나는 그저, 이런 영혼으로서 형을 곁에서 지켜볼 수만 있다면 바라는 게 없어. 그거로 만족해.」

하이너의 감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력생물로 평생을 살아갈 생각은 조금도 없는, 그저 일상의 평온함을 원했던 자신에게 내부의 인격들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세상의 비밀을 알고 싶어 환장한 마황과 흡마귀의 괴물이 되라고 부추기는 대현자를 모조리 소멸하고 싶었다. 이 몸의 마력을 없애고 평범한 인간이 되어 예전처럼 아가씨의 평범한 호위기사로서 아가씨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나의 인을 파괴하는 게 필수.

그러나 그것을 파괴해 버리면, 동생 마르틴이 영원히 사라질까……, 그게 두려웠다.

그래서 줄곧 외면해왔다. 마황과 대현자의 강요를 외면하고, 시귀르에서 륀체르가 제공하는 마력자들의 소소한 마력을 먹으며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동생은 이제 그러지 말라고 한다.

여기까지 와 놓고, 머뭇거리지 말라고 한다.

「혹시 형의 몸에 마력이 사라지고, 내 영혼도 사라지게 된다 해도 나는 괜찮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형의 동생으로 태어날 테니까.」

하이너는 따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목멘 소리가 나올 것 같기 때문이다.

「나를 배려해주는 건 이제 됐어, 형. 이것으로 충분해. 나는 행복해.」

하이너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허리춤에서 마리티오르를 빼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로 쳐 올렸다. 과거, 오를린에서 동생과 함께 살 적에, 마리티오르를 들고 이렇게 멋진 몸짓을 하면 동생은 언제나 탄성을 지르곤 했다.

마르틴. 미안하구나.

하이너는 사과를 가슴에 묻고서, 황제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드래곤의 강력한 마력은 꽁꽁 잠긴 문도 쉽게 부수어 버렸다.

검은 드래곤에 겁을 먹고 궁인들 대부분 몸을 숨겼지만, 황제를 포함한 황족들, 그리고 시중을 드는 이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차림으로 가장 화려한 방에 모조리 모여서 널찍한 탁자에 둘러앉아 차를 마신다. 죽음을 기다리는 걸까? 아니면 검은 드래곤의 성정이 사람들을 몰살시킬 정도로 잔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여유를 부리는 걸까?

황제는 검은 드래곤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찻잔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갔다. 지금 그는 황권의 상징인 마나의 인을 따로 숨기지도 않고 있다. 검은 드래곤이 다시 궁에 온다는 것은, 어떻게든 마나의 인을 노린다는 의미이고, 황제로서는 그것을 막을 길이 없다. 두려움에 떨면서 마나의 인을 감추기보다는 차라리 태연하게 있기를 택한 것이다.

하이너는 친절하게도 황제에게 지금부터 할 일에 관해 알려주었다.

“들어라.”

황제를 포함한 황족 모두의 시선이 검은 드래곤에게 향했다.

하이너는 건조한 목소리를 뱉었다.

“앞으로, 당신들이 여태 누렸던 안락함을 빼앗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모든 인간은 행복해야 한다는 제국 건국이념 따윈 모른다. 비오르틴 네가 황제로서 지켜야 할 의무 혹은 마나의 인을 향한 권리 같은 것도 관심 없다. 나는 단지……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오를린의 평범한 남자로 되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황족들이 웅성거렸고 비오르틴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는…… 이라고 했나? 그것참 부럽군.”

황후의 눈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황족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하이너는 마지막 말을 던졌다.

검은 드래곤으로서 뱉는 마지막 말을.

“그러니…… 나를 원망하지는 마라.”

마나의 인, 아주 오랫동안 로귀하르트 제국 권력의 핵이 되었던 물건이 파괴되기 직전이다.

검은 드래곤을 괴롭히는 저주와 함께, 마나의 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

대륙 전부가 잠이 들었다. 인간들도, 수인들도, 동물, 식물, 모두가 잠이 들어 꼬박 하루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리던 눈도 허공에 정지하고, 바람에 날리던 앙상한 나뭇가지는 떨림을 멈추었고, 거기서 떨어지는 잎들도 하강을 멈추었다. 암흑 지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들도 그림 속 검은 연기가 된 듯 멈춰버렸다.

세상은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먼 훗날, 사람들은 그날 일을 두고 대륙이 꿈꾼 날이라고 불렀다.

***

검은 드래곤이 마나의 인을 파괴하고, 꼬박 하루가 지났다.

정지해있던 세상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어난 세상은 부자연스럽게 일상을 펼쳐나갔다.

해가 움직이고, 허공에 떠 있는 눈들이 바닥에 닿았다. 눈 쌓인 세상은 점점 하얘졌다.

그리고 이 눈은 암흑지형에도 예외가 없다. 본래 암흑지형에 눈 따윈 내리지 않는데 말이다.

기이하게도 암흑지형이 고대의 모습을 되찾았다. 눈을 내리는 하늘과 땅이 생긴 암흑지형은 이제 더는 암흑지형이라 부를 수 없으리라. 고대처럼, 북쪽 평야로 불릴 것이다.

차원의 균열에서 흘러나온 동물, 사물 들이 모습을 싹 감추었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없는 듯 홀연히 사라졌다. 그 탓에 차원의 균열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거래하던 상인들은 울상을 지어야 했다.

울상을 짓는 사람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자그마한 마력생물을 팔던 상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품에서 마력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

괴지.

사괴탄이 죽은 이후, 폐허가 된 마검제조 공장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음산한 소리가 맴돌았다. 사람들은 그 소리를 마검들의 검성일 거라고 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괴지를 떠도는 사람들의 환청이었을까?

이제 더는 검성이 울리지 않는다.

***

오를린의 소용돌이 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일반 짐승들이 마력생물을 사냥하기 시작했고, 마력생물들은 마력을 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일반 짐승들에게 당하기만 했다.

오를린 사람들을 그것을 보고 ‘이제 소용돌이 산이 위험하진 않겠다!’고 입 모아 말했다.

***

황도 로귀하르트.

잠에서 깨어난 검황 헤세 레 지괴르는 검기와 마기를 조금씩 모았다. 이건 군직에 몸담은 자들이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무조건 하는, 마치 몸에 밴 습관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검기는 모이는데, 마기가 모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

바너.

잠에서 깨어난 륀체르는 자기가 모은 사병들을 한둘 씩 깨워 진행하던 회의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의 비서 홀디네는 마력이 사라진 자기 몸 상태를 마스터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륀체르는 신나게 휘파람을 불었다.

‘뭔지는 몰라도 내가 더 유리해지겠어!’

***

시귀르.

거처에서 잠들었던 마리는 부스스한 모습으로 잠에서 깨어나 호위기사를 찾았다. 어쩐지 다른 날보다 힘이 없는 느낌에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힘이 없는 느낌이 불길하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시름을 떨친 듯 가벼웠다.

***

황도 로귀하르트의 제국의학원.

루돌프는 학원 기숙사에서 공부에 열중하다가 코피를 쏟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닦다가 깊은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찌뿌듯한 몸에 기지개를 켜고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명의 소녀를 보았다.

“마리아 누나? 마리아…… 누나!”

마리아의 특징이던 선홍빛 눈동자가 온데간데없다. 마리아는 지금 진줏빛 머리카락과 어울리는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다. 다른 날과 달라 보이는 이 소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처럼 눈동자를 적시고 있다.

학생들이 그녀를 보고 웅성거렸고, 루돌프는 재빨리 마리아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반가운 듯 그녀의 두 팔을 잡고서 물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가 깜빡 잠이 들었죠? 그런데 누나, 그 눈은 대체…….”

드래콘 소녀, 아니, 이제는 마력을 쓸 수 없게 되어 인간 그 자체가 되어버린 마리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백했다.

“어떻게 해? 나 좀 고쳐줘, 루돌프! 나, 더는…… 더 이상…….”

“예?”

“원래의 모습으로 변할 수가 없어!”

원래의 모습이라. 그 말인즉, 이제 더는 드래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얼떨떨한 말을 들은 루돌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마리아를 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세상은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마리아 누나는 뭔가 변한 것 같다. 인간의 감정, 상실감이 짙은 목소리와 당황에 빠진 표정이 그걸 증명한다.

“너는 의술에 능하니까 내 증상도 잘 알겠지? 내가 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하는지, 잘 알겠지?”

루돌프는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요, 누나.”

“루돌프…….”

마리아는 아예 주저앉아 버렸다. 혼자서 소용돌이 산에 있다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루돌프가 있는 곳까지 왔는데, 오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니 온몸을 휘감는 무거운 느낌, 그리고 둔해진 감각이라니. 마치 인간들의 감각이 몸에 들어선 듯했다. 이런 증상이 불안해서 루돌프에게 물었지만, 아쉽게도 루돌프는 모른다고 한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한다.

“흐흐흑…….”

마리아가 절망적으로 울음을 터뜨렸고, 루돌프는 한숨을 쉬면서 웃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맞춰 앉았다.

“누나가 어째서 이런 눈을 하고 있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요.”

“……?”

“오랜만에 누나를 보니까 정말 좋아요. 누나가 나를 찾아와줘서, 나는 정말 반갑고 기뻐요.”

루돌프는 망설이다가 마리아의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소년이 전해주는 손의 온기가 마리아의 시름은 잠시나마 덜어주었다.

“루돌프…….”

우울하던 마리아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

황궁.

대륙 곳곳에 퍼진 변화, 마력이 사라진 현상은 황궁도 예외가 없다.

로테는 황족 중에서 가장 먼저 눈을 떴다. 품에 아이를 안은 채 잠들어버린 그녀는 아이의 꿈틀거림에 가장 먼저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모두가 잠들어 있다. 남편부터 시작해 선황, 선황의 애인들, 선황의 형제들, 모두가 잠들어 있고, 정신이 든 것은 오직 로테 자신과 딸 뿐이다.

그리고 검은 드래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마나의 인을 파괴해버리고 재빨리 어디론가 몸을 숨긴 게 분명하리라.

로테는 아니카를 안고 찌뿌듯한 몸을 풀 겸 멍하니 한 걸음씩 걸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아이가 웃는 것 같다.

로테는 아이의 얼굴을 샅샅이 보았다. 그아아…… 갸르…… 하고 웃는 소리가 평소와 달라 눈을 뗄 수가 없다.

‘잠깐……?’

안대 주위를 늘 맴돌던 검은 연기 같은 게 보이지 않는다. 로테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아이의 눈을 감싸는 안대를 풀었다.

그리고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마므아…… 기아아…… 꺄!”

높은 목소리로 옹알이하는 아니카, 이 아이의 눈에 더는 검은 기운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검은 기운을 뿜어내던 끔찍한 눈은 제 어미와 같은 청록색 눈, 바다와 숲을 섞은 듯한 아름다운 빛깔로 반짝이고 있다.

감격한 로테의 두 눈에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검은 드래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지금 그녀는 검은 드래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카…… 오오! 나의 아니카! 난 알고 있었어! 난 진즉 알았다고! 네 눈이 이렇게 예쁘다는 걸 어찌 모를 수 있겠니! 아아, 감사합니다! 로젠플라드시여…… 감사, 또 감사합니다!”

기뻐하는 목소리에 아니카도 따라 웃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미의 얼굴을 보는 아이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날 기미가 없다.

그리고 모녀의 웃음소리에, 잠을 깬 또 하나의 사람이 있으니…….

“아니카!”

기쁨의 탄성을 지르는 그는 바로 황제, 아니, 어여쁜 딸아이의 아버지 비올이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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