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2 8. 삶, 삶, 삶 =========================================================================
기갑체를 다루는 최고의 기술이 제국 정부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 기술은 권력의 핵이나 다름없고, 황의회는 기갑체 공정의 실질적인 부분을 파고들며 임무를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황후가 엔카드라노 포르투바와 외도를 한다는 소문은 전혀 논란이 되지 않았고, 황제 역시 소문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굴었다. 포르투바와 몇 차례 만나며 실무에 관해 상의하는 황제의 모습은 황후의 불륜 문제를 정면으로 덮는 역할을 했다.
황의회, 포르투바, 황제는 몇 번의 회의 끝에 세 가지 숙제를 만들었다.
현재 쓸 만한 마력자들이 부족하니, 재야의 마력자들을 비밀 장소에 불러들일 것. 그들을 마력 기갑체를 조종할 인재로 키우는 것이 황의회의 목적이다.
그리고 실렌틴 광산의 소유권을 완전히 제국 정부에 귀속시킬 것. 이는 기갑체 공정을 원활히 하려면 필수인 일이다.
마지막으로, 륀체르의 사병, 그가 가진 군대를 전멸시켜 버릴 것. 이 사항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륀체르의 모든 것을 빼앗자는 것이다. 황의회는 황제와 반목한 륀체르를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판단했고, 어정쩡한 적대 관계는 싹을 자르는 게 옳다고 여겼다. 물론 이미 륀체르는 싹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거물이 되었지만 말이다.
바야흐로 제국은 검은 드래곤 소동에 이어 금권과 정권의 전쟁이라는 큰일을 앞두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를 위기라고 여겼다.
황궁은 황의회와 포르투바, 황제가 관련된 심각한 회의를 진행할수록 성대한 연회를 열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속였다. 연회의 취지가 제국기술원 인재들을 격려하는 것이라고 알려졌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륀체르의 귀에 그 실상이 들리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륀체르도 바보는 아니기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는 진즉 자기 사병들을 해체한 후 그 대장들을 각 대륙 곳곳에 분산하여 재야의 마력자들을 끌어모으라고 했다. 제국 정부에서 단 한 명의 마력자도 데려가지 않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 마력자들이 포르투바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마력 기갑체를 조종하여 제국 힘의 상징이 되는 꼴을 륀체르는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만 했다.
륀체르의 능력 좋은 사람들은 금세 마력자들을 모아왔고, 륀체르는 그 마력자들을 전원 비밀 수용소에 거주시켰다. 그리고 그들에게 두 가지 선택권을 던져주었다.
검은 드래곤에게 마력을 바칠 것인지, 아니면 그것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할 것인지.
기꺼이 마력을 바치는 이들에겐 경제적 보상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마력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살아 돌아갈 수도 없으며, 검은 드래곤이 폭주할 시 먹이가 된다.
이 선택권은 한마디로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깡패가 나약한 자들에게 ‘맞고 줄래? 그냥 줄래?’라고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평소 륀체르라면 때리고 빼앗는 것을 택할 테지만, 검은 드래곤과 그의 주인이라는 존재 때문에 그는 최대한 신사적으로 나왔다.
협박을 받은 마력자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일제히 전자를 택했고, 검은 드래곤 하이너는 륀체르의 행동에 침묵했다. 그 침묵은 결국 마력자들이 바치는 마력을 굳이 마다치 않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런 결정엔 마리의 허락이 뒷받침되었다.
사실 마리는 륀체르가 그토록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마력자들에게 선택권을 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혐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반대했다. ‘바너 뒷골목의 건달은 출세하고 나서도 여전히 건달 짓을 한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결국, 현실적으로 반대할 계제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자신의 호위기사는 발정의 기운을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죽이고 있으며, 이런 상황에서 이성의 마력생물, 혹은 마력자들은 그를 괴롭게 한다. 또한, 호위기사는 발정의 기운뿐만 아니라 흡마귀의 저주에서도 자유롭지 못해 폭주의 위험을 껴안고 있다.
그가 폭주해서 많은 희생이 나는 것보다야 차라리 마력자들의 반강제적 희생이 더 낫다고, 마리는 판단했다. 무엇보다 하이너가 마력자들의 마력을 흡수한다고 해서, 마력자들의 생명마저 앗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그녀를 안심하게 했다.
갖은 수모를 견뎌내고 제국의 패왕으로 안착하려는 황제.
그런 황제를 머리 꼭대기에서 다루려는 대부호.
인간들의 싸움보다 자신의 고뇌에 머리가 아픈 최강의 생물체, 드래곤.
그런 드래곤을 보면서 여행 이래 가장 혼란에 빠진 아가씨.
그리고…….
각자가 각자의 일을 떠안고 사는 세계.
대륙의 공기는 얼어붙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열기를 감추고 있다.
황궁은 오늘도 화려한 연회 중이다. 마법사가 사라진 연회는 인간들의 수고가 미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어두운 공간을 밝히는 촛불부터 차가운 공기를 따뜻하게 덥히는 장작, 흥겨운 음악 소리, 모든 것이 인간들의 공이 필요한 구석이다.
이런 때다 보니 모두가 마력자들의 존재를 간절히 바란다. 연회의 황족, 귀족들은 황의회의 자본으로 꾸린 추격단이 재야의 마력자들을 찾아오지 않는 상황에 걱정의 말을 해댔다.
“이런 추운 가을도 처음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언제까지 이런 불편한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아무리 검은 드래곤 때문에 다들 몸을 숨긴다고는 하나, 이건 정말 너무 마력 가뭄 아니오?”
그 와중에 미미한 마력을 지닌 지인을 자랑하는 이들도 있다.
“친척 아이 중에 어디 자랑할 정돈 아니고 재주(마력)를 조금 지닌 아이가 있는데, 이번에 시골에서 데려와서 잘 쓰고 있어요. 장작보다 좋더군요. 적어도 이 궁보다는 따뜻하답니다! 호호!”
“조심하셔야겠네요. 검은 드래곤이 언제 와서 해코지할지 누가 알겠어요?”
“어머. 나타나려면 진즉 나타났겠지요.”
부인들이 대화를 나누는 그때, 요즘 사교계에서 가장 뜨거운 인사가 된 엔카드라노 포르투바가 부인들을 지나쳐갔다. 엔카드라노가 지금 향하는 곳은 황후 로테아르카가 있는 곳이다. 언제나 알 수 없는 불만이 가득해 보이던 그의 표정은 다른 때와는 사뭇 다르다. 누가 봐도 막 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고, 그게 그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아 부인들을 웃게 했다.
자연스레 부인들의 숙덕거림이 시작되었다.
“우리 제국 정부를 살려주신 구원자께서 오늘 밤도 트리아노네에 들르실 모양인가 봐요.”
“그러게 말입니다. 참 대단하지 않나요? 그 아름다운 금발 푸른 눈의 애인들을 다 쳐내버리고 트리아노네에 가서 철학 토론을 하다니. 고상하기도 하셔라.”
“하하! 철학 토론? 언제부터 몸의 대화가 철학 토론이 된 거죠?”
“어머! 몸의 대화라니, 그 무슨 망측한 소리! 트리아노네의 주인께서는 정말 엔카드라노와 철학 토론을 하신다니까요. 다만 조금 격렬할 뿐…….”
부인들은 명백히 황후를 얕잡아 보고 있다. 선황보다 강력한 황권을 가진 비오르틴이라 하더라도 그의 촌뜨기 아내는 여전히 궁 여인들 사이에서 조롱거리의 위치 정도.
그런데 갑자기 부인들을 기겁하게 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을 거요.”
목소리의 주인이 제국 황제라는 것을 알게 된 부인들은 얼어붙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한 말은 단 한마디뿐인데도 부인들의 귀에는 마치 사형을 부르는 공포의 말처럼 들렸다. 황제가 그들을 시린 눈으로 보며 어금니를 악물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간 부인들이 아는 황제는 황후의 외도를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국정에만 힘쓴 이였으나, 저 표정 하나로 그가 황후의 외도 소문을 누구보다 의식하고 있단 사실이 밝혀졌다.
‘이를 어째!’
‘맙소사! 대체 누가 먼저 이 이야기를 시작한 거람!’
황제는 엔카드라노를 어느새 앞질러가 황후의 손목을 잡았다. 부인들은 황제에게 겁을 먹은 와중에도 그 세 사람, 황후, 엔카드라노, 황제의 움직임에 눈을 떼지 않았다.
황제는 공적인 일로 대화를 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게 엔카드라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황후의 손목을 어디론가 갈 듯 잡아끌었다.
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니다. 황후는 황제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그를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황후는 남편의 손을 내쳤다.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포르투바는 한 발짝 물러나며 자리를 피했다. 그 나름 황제 부부의 격을 지켜주려 한 행동이지만, 누가 봐도 황후의 마음을 차지한 자의 오만으로 보인다는 게 문제다.
후에 황제는 더욱 격노한 듯 싸늘한 표정으로 황후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부부는 연회장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부인들은 트리아노네에서 철학 토론이 아니라 부부싸움이 한바탕 일어날 거라고 수선을 피웠다.
***
트리아노네.
아니카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냄새에 까르르 웃었다. 어머니 로테아르카의 달콤한 향기와 아버지 비오르틴에게서 나는 시원한 식물 향이 섞여 났다. 아니카는 작은 팔을 뻗어 허공에 휘저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이 어린 황녀는 향기를 만질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는 아니카의 좋은 기분과는 반대로 흘러갔다.
비오르틴은 로테에게 짧은 말로써 경고했다.
“격을 지켜라. 네가 황후라면 말이다.”
“격, 말씀입니까?”
“자존심도 없나? 한때 간택전에서 널 욕보인 사람과 어울리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의미라. 로테는 소릴 내어 웃었다.
자기를 험담한 남자와 외도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보라. 자신이 엔카드라노를 유혹한 결과, 제국 정부는 바너의 실세에 지지 않을 수 있었다. 검은 드래곤에게 권력의 상징성이 빼앗길까 두려워 등극식도 서두른 반쪽짜리 황제가 바너의 금권에 반역을 당하는 것은 누구나 예측 가능한 일이었는데, 자신이 엔카드라노를 유혹함으로써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외도의 의미는 이미 충분하다.
황제 아닌 다른 이로 얻은 쾌락은 덤이었지…….
로테는 시녀에게 머리 손질을 시키며 태연히 대꾸했다.
“하하. 의미라. 의미는 황의회 사람들이 열심히 찾고 있지 않나요? 매일 매일 포르투바와 회의를 하면서 말이죠.”
로테의 대답에 기가 찬 황제가 거울 앞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지금 뭐라고 했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시녀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로테는 거울 속 비오르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 자리가 저 덕분에, 아니, 그분과 저 덕분에, 이렇게 온전히 유지될 거라는 사실을 감사할 줄 아세요.”
지금 로테는 거의 최초로 자신의 외도를 시인하는 셈이다.
비오르틴은 머리가 뜨거워지면서 눈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아내의 외도와 그 외도가 불러온 제국 정부의 이익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는 사실은 그의 피를 끓게 했다.
그는 거울 앞의 물건을 던졌다. 거울이 와장창 깨지며 그 소리를 들은 아니카가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고, 로테는 태연하게 일어나서 아니카를 보듬어 안았다.
비오르틴이 거친 호흡을 추스르며 다시 물었다.
“뭐가 뭐 덕분에 온전히 유지될 거라고?”
로테는 아니카의 등을 쓰다듬으며 정확하게 대답해주었다. 그것이 남편의 화를 부채질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황위를 책임지는 것은 포르투바 가의 기술력뿐이란 말입니다. 제가 엔카드라노와 친분을 다지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게 가능했을까요?”
급기야 미쳐버린 비오르틴은 로테의 어깨를 세게 잡고 그녀를 돌려세웠다. 아니카가 더 큰 울음을 터뜨렸고, 비오르틴은 아이가 울든 말든 로테를 벽으로 몰고 갔다. 음울하던 얼굴 가득 분노가 차 있고, 그 눈빛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찔러 죽일 듯 날카롭다. 분개심을 압축한 목소리가 파들파들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언젠가 네 목을 칠 거다.”
“……?”
“언젠가 너를 엉망진창으로 만들 거야.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게 그딴 망발을 일삼은 널 벌하고 말겠다.”
로테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황제가 자신의 체면이 상하는 것에 분노하여 이러는 것은 알겠지만, 그 분노가 조금 지나쳐서 같잖게 느껴질 뿐.
……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이러는가?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빼앗겨 분개하는 남자의 표정이라니.
다시 봐도, 당치 않다.
체면이 상해 시비를 거는 자의 표정이 아니라 상처 받은 남자의 표정을 하는 남편이 당치도 않아 견딜 수 없다.
그녀는 차분히 아니카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녀가 비오르틴의 멱살을 잡은 것은 순식간의 일이다.
아내에게 멱살이 잡힌 비오르틴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로테는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그를 바닥으로 밀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비오르틴의 목소리보다 더욱 악독하고 적개심에 가득 차 있다.
“…… 그래! 나도 그런 꿈을 꿨지. 네놈의 명령으로 내 목이 뎅강 잘리는 끔찍한 꿈을! 꾸고 나니 네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알겠더군! 날 엉망진창으로 만들 거라고? 내가 주제를 모른다고? 그 말 그대로 네게 돌려주지! 나는 비오르틴 네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 거야! 주제를 모르는 네놈을 짓이겨 버릴 거라고! 날 죽이고 싶으면 어디 죽여 봐! 가능하다만 말이야!”
폭발하는 화산처럼 감정을 쏟아내는 그녀의 모습에서, 비오르틴은 마리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마리의 등 뒤를 거대하게 지켜주는, 자기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인 검은 드래곤을 본 건지도 몰랐다.
“마리의 동생인 나를……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란 말이야!”
로테의 협박은 비오르틴을 무너지게 했다.
그런 말을 하는 그녀도 비참하긴 마찬가지.
흐애애…….
아니카의 칭얼거림이 공간에 서글프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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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쟁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