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11화 (111/122)

00111  8. 삶, 삶, 삶  =========================================================================

웃고 있다고 생각지 못하던 그는 우연히 헤세와 눈이 마주치고 뒤늦게야 자기 표정을 인지했다. 그의 표정에서 금세 미소가 지워졌고, 헤세는 황제의 얼굴에 비쳤던 찰나의 표정에서 황후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속내를 읽었다. 다소 의외인 속내이지만, 헤세 자신이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폐하.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헤세가 읽은 속내가 정답인지, 황제는 굳이 그를 잡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로테에겐 함께 저녁을 먹고 싶어 한다는 황제의 전언이 갔다.

***

황의회에서 한 의원이 ‘포르투바가 누구와 손을 잡는가?’는 안건을 슬며시 꺼냈다. 근래 궁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포르투바가 예정대로 바너의 실세와 손을 잡았다, 아니다, 그는 변심해서 제국 정부와 손을 잡았다, 등 제각기 갈리고 있다. 검은 드래곤 때문에 마력 기갑체를 운용하지 못한다고 해도, 마력으로 돌아가지 않는 물리적인 기갑체 운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최강의 무기를 원활하게 쓸 수 있는 힘이 개인 자본에 넘어가느냐, 제국 정부에 소속되느냐는 황의회의 중대사다.

이 안건을 꺼낸 의원은 포르투바가 황제와 손잡을 거라고 믿는 편에 속하며, 과거에 황제에게 도움을 받았던 륀체르 사파이어가 당연히 황제에게 포르투바의 기술을 양보해줄 거라고 믿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믿고 싶어 한다.’가 바른 표현이리라. 의원은 그간 많은 적을 거침없이 해치웠던 황제가 이번 문제도 시원시원하게 정리를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고려할 사항이 많으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모호한 말로 넘어가 버렸다.

황제가 회장에서 퇴장하자, 의원들 사이에선 또 의견이 분분하게 갈렸다.

“은인에게 양보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사파이어라도 양보하기 싫을 것 같은데. 폐하께 보낸 선물(우리 안의 맹수)을 봐. 사자를 뜯어 먹는 맹수라니. 그건 폐하께 포르투바를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단 뜻 아닌가? 협박이라 봐도 될 정도인데.”

“사파이어가 싫고 좋고 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건 힘의 문제입니다. 전 대륙이 마력을 못 쓰는 이런 상황에서 이번 갈등은 순수하게 금권 겨루기만으로 결론이 날 겁니다.”

“그 말은 즉 사파이어가 유리하단 말?”

“글쎄요. 실질적인 자본력은 사파이어가 우세하지만, 그 자본이 어디로 가는지 제도화하는 힘은 우리 황의회에 있으니…….”

“이거, 이거, 여태 봐 온 그 어떤 싸움보다 흥미진진하겠구먼.”

“싸움이 길어지는 것은 서로에게 손해인 일이오. 황의회가 제도를 만들기도 전에 사파이어가 제국 정부를 장악해버리는 최악의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시오.”

“그건 반역이 아닌지?”

***

륀체르 사파이어가 황제에게 보낸 선물, 우리 안의 맹수는 죽임을 당했다. 진상되자마자 잔인하게 살해된 짐승에 관해 궁정인들의 말이 많았으나 로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도 이제 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엔 면역이 쌓인 건지도 모른다.

오늘 아니카에게 비의 감촉을 전해준 것이 즐거웠고, 아니카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곁에서 돌봐주는 것도 보람차서 좋았다. 궁에서도 이런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게 가능한 것에 즐거워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그리고 곧 시작될 남편과의 저녁 식사도 소소한 일상…….

‘……그건 즐겁다고 할 수 없지.’

식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보면서 부르던 콧노래가 천천히 멈추었다. 시녀들은 궁에서 콧노래를 부르는 황후의 모습이 이색적으로 보다가 콧노래가 멈추어지자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황후가 시녀들을 모두 물려버린 것이다.

“왜 저러시지?”

“폐하와 단둘이 드시고 싶으셔서 그런가?”

“어쩌면 오늘 황자 전하가 생기시려는 거야?”

“어머! 야해라! 싫다! 호호호!”

황제 부부관계에 관해 잘 모르는 신입 시녀들은 긍정적인 추측을 해댔다.

그러나 당연히, 로테는 그들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비오르틴은 세간의 시선, 황제 부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시선을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형식적인 부부의 정 따위를 쌓고자 식사 시간을 제안한다고, 로테는 여기고 있다.

시녀들을 물린 로테는 손에 잡히는 양념통을 닥치는 대로 잡고 음식들에다가 아무렇게나 뿌려댔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어차피 황제는 먹는 것, 음식 따위에 흥미가 없는 인간이다. 맛이 최악이면 식사를 재빨리 끝내고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음식에 장난을 치는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감돌아 생기가 돈다.

‘그 음울한 얼굴 보고 있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어.’

달콤한 음식에는 쓴맛을, 짠 음식에는 지독히 신맛의 조미료를 퍼부었다. 그 후에는 꽃장식의 각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꽃을 만졌다. 꽃장식이라면 오를린에서 아주 지겹도록 배웠고, 솜씨도 좋다는 평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꽃장식을 예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최대한 아무렇게나 흉하게 보이게 하는 게 중요하다. 지나가는 거지가 봐도 별로다, 라고 할 정도로 막 해두는 것. 그게 남편을 향한 자신만의 소심한 분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남편이 들어섰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도 제 아내처럼 시종들을 물려버리고 혼자 들어오고 있다.

‘또 무슨 꿍꿍이야?’

로테는 보는 이가 없지만, 한껏 예를 갖추어 황제에게 인사했다.

“대륙의 지도자이시자 제국의 태양, 그리고 야울의 왕이신 비오르틴 뤼크 피나센토 로귀하르트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외국 사절단이나 할 법한 기나긴 인사인데, 비오르틴은 그 인사가 재미있다는 듯 로테를 보았다. 인사가 끝마쳐지고, 로테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비오르틴이, 손수 그녀가 앉을 의자를 미리 빼준 것이다.

로테는 자기가 뭔가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했다.

‘뭐지…?’

그녀는 바늘방석에 앉는 듯 불편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았다.

황제는 식탁 가득 차려진 윤기가 흐르는 음식들을 보고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시간, 아주 오랜만에 가지는 것 같군.”

로테는 가득 차려진 식탁을 보며 인형처럼 무감정하게 대꾸했다.

“영광입니다, 폐하.”

“먹지.”

두 사람 다 아무런 말없이 식사를 이어갔다.

로테는 식사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불편해졌다. 음식에 장난을 쳐놓았으니 그 맛에 황제가 도망갈 거로 생각했지만, 왠지 비오르틴은 도망가지 않는다. 맵고 짜고 신 음식을 묵묵히 먹으면서 아내의 얼굴을 끈지게 볼 뿐.

그런데 그의 시선에 전과 다른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로테만의 착각일까?

불편한 로테에게 비오르틴은 시선을 놓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어.”

“…… 무슨 말씀인지.”

“그렇게 새 모이 먹듯 먹지 않아도 된단 말이다.”

“새 모이 먹듯….”

“먹던 대로 많이 먹는 게 좋아.”

같잖은 참견이라 생각하며 로테는 식기를 든 손을 내렸다. 아무리 황후라 할지라도 황제 앞에서 식기를 내리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그러나 그녀는 거침없이 그렇게 했고,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저를 잘 모르시는 건 여전하군요.”

“뭐라?”

“아니카를 낳은 뒤로, 지금이 가장 많이 먹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게 많이 먹는 거라고?”

“예.”

그녀는 딸을 낳던 당시 남편이 와서 한 모진 말들을 절대 잊지 않는다. 단 하나 자신 있어 하는 게 아이 낳는 일이 아니었느냐고, 이렇게 다 죽어가는 꼴로 있다간 트리아노네를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협박하던 사람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출산 전후로 그의 눈길은 늘 원망에 가득 차 있었다. 어째서 네 언니가 아닌 네가 이 궁에 있느냐고 따지는 듯했다.

그런 차에 아이마저 눈에 장애를 안고 태어나니 어찌 제정신일 수 있었을까. 죽음까지 생각하며 무너졌던 자신이었다. 그런 자신에게 식사의 즐거움 따위가 다 무엇인가. 죽지 못해 먹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 법한데도, 이 남자는 모르는 모양이다.

비오르틴이 피식 웃었다. 출산 후에 보기 좋게 살이 오른 그녀의 모습은 대관절 어떻게 가능한 건지, 그는 궁금하다.

“그럼 그 살들은 플라미네(미의 여신)께서 붙여주셨나?”

비오르틴은 자기 물음이 어색했는지 뒤늦게야 어색함을 감추려고 낮은 기침을 했다. 보기 좋게 살이 오른 모습의 아내가 잘 먹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 자기도 모르게 질문이 아내가 가진 미를 향한 찬미로 나와 버렸다.

그는 무안한 듯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오히려 로테는 살기에 찬 눈으로 그를 보았다.

“플라미네께서는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 아니지요.”

“……?”

“그리고 폐하의 농담은 제게 적절하지 않은 것 같군요. 저희가 그런 농을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그런 농을 주고받을 사이?”

“플라미네를 운운하시는 건 다른 여인에게나 하십시오.”

비오르틴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까칠한 반응이 신선하다고 여겼다. 조금은 독기 어린 표정이 그녀답지 않아 자꾸 눈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질문을 던졌다.

“둘이서 아이까지 본 사이에 이런 농담쯤은 해도 되지 않는가? 아니면 뭔가? 우리 황후께서는 언니에게 질투하는 건가?”

로테는 속에서 불길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꾹 참았다. 이런 도발에 일일이 반응하면 우스워질 뿐이라고 몇 번이나 자기를 다독였다.

애써 웃음 지은 그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이 좋지 않아 이만 일어납니다.”

“무례하군.”

“참, 그리고 포르투바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갑자기 나온 그의 이름에 비오르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황후 제깟 게 뭘 안다고 포르투바 문제를 운운하는지?

로테는 왠지 모를 승리자의 미소를 던지며 뒤돌아섰다.

“그는 절대 폐하 아니, 이 황실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황제가 의아하게 여기며 자기 거처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앞으로 포르투바의 전언이 도착했다.

제국 정부에 기술력을 협력하겠다는 뜻을 전한 내용이다.

***

얼음 도시 시귀르의 중심지 유르.

안식의 겨울의 륀체르 침소.

륀체르는 황궁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받고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이거, 이거, 그 촌뜨기 황후가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황궁에 심어둔 첩자들에게서 온 소식이 아주 가관이다. 황제가 전과 달리 황후에게 저녁 식사를 제안했다고, 그런데 그 식사 후에 황의회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고, 포르투바가 황제 편에 서기로 했으므로 기갑체 공정에 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거기까지만 보자면 황제에겐 기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마냥 기쁜 일이 아니다. 포르투바가 황제 편에 선 이유 때문이다. 소문에 의하면 로테가 포르투바와 내연 관계라나. 그래서 포르투바는 황실의 편에 선 것이고, 결국 황제는 아내를 팔아 제국 기술의 핵심을 쥐게 된 셈.

제국민이 듣기엔 소문으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지만, 그날 황제가 황의회를 마치고 자기 침소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부수었단 소식이 그 소문이 사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천하의 사자 놈도 건드리지 못하는 게 생겼다니, 이럴 수가…… 불쌍해서 이를 어쩐담! 제 성격대로 아내를 잡자니 그 기술자 놈이 떡 버티고 있으니 이도 저도 못할 테고, 으하하…… 역시 사람은 자기만의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니까. 그게 xx(여성의 성기를 지칭하는 비속어. 이 경우엔 황후의 성기를 뜻한다.)이든 머리(포르투바의 기술력)이든!”

륀체르가 한참 동안 깔깔거리고 웃자, 궁의 일을 보고하던 홀디네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마스터에게 중요한 건 황후의 정략적 외도가 아니라 다른 것일 텐데…….

“황제는 우리가 쉽게 양보해준 것을 수상히 여기고 조사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당분간 내버려 두자고.”

“내버려 두자고요? 하지만…….”

륀체르는 의자 뒤에 목을 대고 느긋하게 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붉은색의 투명한 잔 속에선 검은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는 환상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애태울 이유가 없어.”

“하지만 정부에 빼앗길 이유도 없지 않나요?”

“물론 없지. 다만 나는 황제가 기갑체 기술을 장악하고 어디까지 가느냐, 그게 궁금해졌다는 말이야. 드래곤에 한 번 진 황제가 다시 드래곤을 이기려 들 것인지, 아니면…… 내게 정면으로 맞설 것인지. 그때 내가 움직이면 오히려 명분을 얻을 수 있지. 선량한 자본가를 건드리는 권력에의 항거, 뭐 이런 게 그림이 좋잖아?”

***

황도 로귀하르트.

그 시각, 황제는 궁에서 술독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황의회에서 의원들은 기뻐했다. 포르투바가 황실과 손잡고 결과적으로 황의회는 안심할 수 있었기에, 의원들은 황제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비오르틴이다.’, ‘역시 전 황제와는 다른 능력을 보여준다.’, ‘역시 불가능도 가능하게 한 황제다!’라며 비오르틴을 치켜세웠다.

하지만 비오르틴은 그런 칭찬이 모조리 조롱으로 들리기만 했다.

인간들의 황제일 뿐, 모든 대륙을 아우르는 패왕이 되지 못한다는 탄식은 그를 비참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보다 그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아내의 외도.

그리고 그에 따른 자신의 마음, 자신이 아내를 향해 가진 마음이다.

‘왜……!’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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