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8. 삶, 삶, 삶 =========================================================================
방에 들어간 마리는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들어간 방의 문은 마치 철벽처럼 굳게 닫혀 있다. 그것을 보며 륀체르는 한숨을 쉬었다. 어째 이 문이 그녀 마음의 문으로 보이는 것은 착각인가?
문 너머에는 그녀, 그녀는 아마도 침대에 엎드려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이다. 짜증 나서 지르는 소리,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지르는 소리. 천을 뚫고 나오는 탁한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륀체르는 무엇이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대략은 알고 있다.
‘망할 놈의 기사 놈 같으니.’
그녀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었던 호위기사였다. 까칠하게 굴긴 해도 결국에는 아가씨의 명령대로 움직여 주었는데…….
그랬던 그가 조금 전 응접실에서 보였던 모습은 어떠한가.
평소처럼 까칠하지 않은 것도 이상하고, 아가씨의 명령을 독자적으로 판단하여 면전에서 정중하게 말하는 것도 낯선 모습이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너무 진지해서 아가씨를 무안하게 했다는 것, 그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다.
마리라고 자기가 개인적인 원한으로 비올에게 복수하려고 떼쓰듯 일을 밀어붙인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고 있을까. 전혀. 그녀도 자기 마음의 사사로운 조각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호위기사는 그냥 늘 그랬던 것처럼 장난처럼 투덜거리며 ‘사악하시다.’하고 농담으로 대꾸해줬으면 될 일이었다.
절대, 그렇게 정색하고 진지하게 아가씨의 의도를 물어선 안 되었다.
이것은 그가 아가씨의 명령을 받드느냐, 마느냐와는 관련이 없다. 순수하게 그들 관계의 일상성이 깨지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였다.
‘이래서 어린놈들은 안 된다니까. 최강의 드래곤이면 뭐해. 아가씨의 충실한 호위기사입네 하면 뭐하느냐고. 여자를 모르다니.’
그런 생각을 하는 륀체르도 사실은 난생처음으로 여자를 달래는 거나 마찬가지다.
“마리! 이봐, 와트프라우어 부인! 왜 내가 선물해준 반지에 관해선 대답이 없냐? 그리고 이런 데 와서 꿍하게 처박혀있기엔 시간이 아깝지 않아? 나가서 눈사람이라도 만들며 놀자고. 왠지 너랑 놀면 나이 따위 싹 잊고 정신없이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 후에도 륀체르는 어떻게든 마리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시답잖은 이야기부터 시작해 혼내고 어르고 난리를 쳤지만, 마리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륀체르도 제풀에 지쳐버렸다.
“젠장,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어차피 달래줘 봐야 하이너와 아가씨를 화해시키는 일밖에 더 되나. 화해하고 드래곤이 포르투바를 구워삶는다면야 륀체르 자신에겐 좋은 일이지만, 하이너의 태도를 보니 포르투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
륀체르는 그렇게 판단하고 서둘러 비서를 불렀다. 그의 비서는 대륙 극 서쪽에서 온 흑인 미녀, 홀디네 본이다. 실렌틴 광산 폭파 사건 이후 실업자가 된 그녀는 륀체르의 곁에서 그를 보좌했다.
홀디네는 늘 그렇듯 고혹적이고도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부르셨습니까.”
“음. 황도 얼간이들에게 선물 좀 보내. 등극식에 못 간 것에 관한 적절한 이유 좀 대고. 아, 선물은 황태자비, 아니, 이젠 황후가 된 여자지.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으로 보내면 더 좋아.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거로 골라주라고. 가능하면 전 황도에 다 소문이 나게끔 끝내주는 선물이어야 할 거야. 이 륀체르 사파이어께서 황족을 향한 충성이 지극하다는 것을 대륙 모든 이가 알 정도여야 할 거라고.”
황제 내외에게 지극정성으로 구는 척해야 적어도 표면적으로 황제에게 공격받을 일은 없으리라. 황족들은 체면과 명분에 약한 인간들이라 대외적으로 자기에게 잘해준 인간에게 창을 겨누진 못하는 법이다.
“아, 그리고 우리 고귀하신 아기님(황녀 아니카)의 선물도 잊으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홀디네는 인사를 하고 뒤돌아섰다. 그런데 륀체르가 그녀를 다시 잡았다.
“음, 멈춰 봐. 가장 중요한 용건이 남았으니까.”
륀체르는 한참 생각에 잠기다가 갑자기 기다란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이 향한 곳은 홀디네의 목을 감싸는 시붉은 색깔의 목도리다. 륀체르는 그 목도리를 거침없이 풀었다. 그러자 목도리에 가려졌던 홀디네의 깊은 가슴골이 드러났다. 흑인 특유의 까맣고 탱탱한 살덩이가 뿜어내는 건강한 기운에 가슴 탐애자인 륀체르의 눈길에 갈 법도 하건만, 그는 홀디네의 가슴골에는 관심이 없이 제가 할 일을 했다.
“어디 보자….”
목도리는 하늘하늘한 소재인데, 륀체르는 그것을 펼쳐 손바닥에 대고 염력어를 입력했다. 염력어는 눈 깜짝할 새에 입력됐다.
“이 편지를 반드시 새끼 사자(비오르틴)에게 전해줬으면 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비올. 내게서 포르투바를 빼앗아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우리의 우정이 깨지길 원치 않는다고. 실렌틴 광산처럼 산산조각 나고 싶은 건 아닐 테지?」
***
황도 로귀하르트.
황제 궁.
비오르틴의 등극식은 무사히 치러졌다. 그의 아버지는 할데바인 영지를 내려 받고 황의회에서 영원한 퇴장을 했고, 비오르틴은 로귀하르트, 야울, 로샤타르트, 서쪽 식민지, 수인족의 땅 오슬 등을 다스리는 지배력의 상징이 되었다.
각 영지의 영주들은 황가에 어마어마한 공물을 바치며 황가에 충성을 맹세했다. 제국민들은 강력한 드래곤이 등장해도 제국의 패권은 여전히 황가에 있다고 여겼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국민들은 드래곤에 의해 루앙의 대현자가 사라지고 마탑의 마황마저 패배했으니 이제 드래곤의 목표물은 황제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드래곤은 잠잠할 뿐이다. 제국민들의 눈으로 봤을 때, 이 고요한 시간은 황제와 드래곤 사이에 힘의 균형이 암묵적으로 잡힌 증거였다.
매일 같이 이어지는 축하 연회에선 서쪽 식민지 관리자들, 대부호, 귀족들의 아첨이 끊이질 않았다. 새로 올라선 황제에게 잘 보여 이익을 얻고자 하는 무리로 궁은 연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런데 그 무리 중에 오를린 일족이 껴 있다는 것은 주목할 점이다. 다르게 보자면 황제는 아직 장인 집안과 영지에 등극식을 계기로 한 어떤 특별 혜택도 주지 않았단 뜻이 되겠다. 비오르틴이 아내를 들이기 전까지만 해도 아내의 고향인 오를린에 적잖이 혜택을 주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지금의 태도는 궁금증을 자아내었다.
어찌 됐든 황제가 장인의 영지에 이익이 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영지에도 마찬가지라는 의미.
각 영지의 영주들은 황태자가 베풂에 인색한 속내가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도 언젠가는 이익을 얻지 않을까 싶어서 황제를 향한 아첨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연회, 그간의 연회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마법사들의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이는 검은 드래곤 하이너 그로스 때문이다. 그가 마탑의 마법사들을 가히 학살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없애 버리고, 황도에 있는 모든 마법사, 마병사들의 마기를 흡수한 까닭에 지금 황도에는 마력자의 존재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예전 연회에서는 연회하기 좋지 않은 날씨나 기온 따위는 마법사들이 얼마든지 조절 가능한 것이었다. 궁의 마법사들은 이 너른 궁에 끊임없이 향긋한 향기를 드리울 수 있었고, 낮과 밤에 어울리는 음악을 무한하게 재생해두는 마법을 쓸 수도 있었다. 파란 하늘을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환형 마법을 그릴 수도 있었으며, 술에 취한 귀족들을 깔끔하게 낫게 하는 마의학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능력자들이 사라진 지금, 궁의 연회는 현이 하나 빠진 악기로 연주하는 부산스러운 곡처럼 매우 삐거덕거린다. 참석자들은 추위를 이겨내려 멋을 포기하는 복장을 해야 했고, 궁 곳곳에 감도는 악취를 덮으려고 향수를 써야 했다. 낮과 밤 그 어느 때도 음악이 흐르지 않아 연회 하는 재미라곤 없다. 하여, 혹자가 좋은 말로 포장하길, ‘마력이 없으니 연회에 이런저런 수고스러운 낭만이 생긴다.’고 했으나, 결국에는 불편하단 것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연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눈치를 보면서 한둘씩 자기 영지로 돌아가기 바빴고, 연회는 역대 등극식 중 가장 최단시간에 끝이 났다.
새벽부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부쩍 추워진 날씨에 황제의 침소엔 벽난로가 피워졌다. 장식물에 불과했던 벽난로가 제 기능을 한 것은 궁이 세워진 이래 거의 처음이라 할 수 있다.
타닥. 탁. 타닥.
한쪽에 가득 비치된 장작과 쉴 새 없이 불타오르는 장작불을 보며 비오르틴은 역설적이게도 한기를 느꼈다.
아니, 마법사들의 마력이 아닌 나무에서 타오르는 순수한 불을 보면 볼수록 무력함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 적절하겠다.
현실을 외면하듯 눈을 감는데, 마침 시종이 와서 오늘의 할 일을 일렀다. 따분한 내용의 책을 읽는 듯 얼마간 정신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할 일에 관한 보고가 끝나자, 이번에는 내일 황전에서 받을 공물에 대한 이야기가 미리 보고되었다. 공물이라면 지긋지긋한 비오르틴은 깜빡 잠이 들 뻔하다가, 바너에서 온 공물이란 소식에 정신이 들었다.
“내일 황전에 나가셔서 받으실 그 선물에 황도의 모든 눈과 귀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우리에 든 맹수는 차원의 균열을 타고 흘러온 맹수라고 했습니다. 다들 얼른 폐하께서 그 우리의 가림막을 펼쳐 그 안에 무엇이 으르렁거리고 있는지 확인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공물 또한 바너 사파이어 가에서 온 것으로 황녀 전하를 위한 것인데…….”
비오르틴은 바너 실세 륀체르 사파이어의 속내를 통 모르겠다고 느꼈다. 대관절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간 공물을 바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포르투바를 데려가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면 황가에 관한 충성을 이만큼 보였으니 나중에 제 얼굴에 침 뱉지 말라는 뜻인지?
비오르틴이 생각에 빠져 있는데, 보고를 마친 시종이 갑자기 꼭 드려야 할 것이 있다며 황제에게 뭔가를 건넸다. 이것 역시 륀체르 사파이어로부터 온 전서라고.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폐하.”
시종이 물러나고 황제는 제게 온 시붉은 색깔의 목도리를 보았다. 리본으로 묶여 있는 모습이 마치 풀어달라고 무언의 말을 건네는 것 같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바로 목도리를 펼쳤다.
그리고 보이는 글귀.
「비올. 내게서 포르투바를 빼앗아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우리의 우정이 깨지길 원치 않는다고. 실렌틴 광산처럼 산산조각 나고 싶은 건 아닐 테지?」
황태자가 그 글을 다 읽은 순간 목도리는 기화되어 사라졌다. 염력어로 쓰인 편지, 증거를 남기기 싫은 범죄자들이 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륀체르 사파이어…… 협박을 이런 방식으로 하다니.
얼굴이 싸늘해진 비오르틴은 한차례 몸을 떨었다.
실상 륀체르야 포르투바를 빼앗긴다 해도 무서울 게 없는 인간일 것이다. 대륙 금권의 절반을 저 혼자서 휘두르는 인간이니, 기갑체 제조 공정 건에 황가가 계속 방해를 한다면 그는 제국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장난질을 쳐서라도 반드시 황가를 굴복시키고 말 것이다.
“결국, 실렌틴 광산 사고는 사파이어의 짓이었는가. 엄살 연기 하나는 끝내주는군.”
어차피 이건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다. 저쪽이 금권을 가지고 있다면, 이쪽은 유서 깊은 권력과 제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각자의 무기로 싸우는 거야 두렵지 않지만…….
그는 륀체르와 겨루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는 걸 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드래곤과 겨루는 일.
검은 드래곤의 인간체 모습을 떠올린 비오르틴은 혀를 찼다.
거슬리는 존재를 잊으려면, 몸을 푸는 게 최고다.
“검황에게 연무장으로 오라고 해라.”
그는 검황을 불러 검 대련을 하고자 했다.
검황 헤세 레 지괴르는 등극식 이후 내내 궁에 있는데, 그것은 마병사들이 사라진 궁의 경비를 대신 맡기 위해서였다. 황제 친위대로도 경비를 맡을 수야 있지만, 아무래도 마병사들을 부릴 수 없다 보니 경비를 대폭 강화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명예직인 검황까지 호출되어 황제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새벽에는 추적추적 내리던 가을비가 아침이 되어서는 장대비가 되었다.
황제와 검황, 두 친우는 가을비 속에서 대련했다.
검황 헤그 레 지괴르 아니, 이제는 헤세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그 남자는 여전히 말수가 적다. 그러나 검에 관해선 여전히 제국 최고라 할 수 있다. 황제를 향한 사려 또한 깊다. 일부러 져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황제를 일방적으로 패배자로 만들어버리는 짓도 하지 않는다. 황제가 몸을 풀 수 있도록 적당한 시간을 주면서 황제가 검술 연마 시간을 갖는 것처럼 상대해준 다음에야 황제의 목에 칼을 들이댄다.
지켜보는 이들은 매우 놀라 웅성거렸다.
“아무리 검황이라 해도 감히 폐하의 목에…… 저런 걸 보면 루빈의 지휘관이었던 남자가 생각나는구만.”
“그래. 헤그 그자도 검황 예하처럼 황제 폐하의 목에 칼을 대곤 했었지.”
“뭐, 그만큼 폐하께서 검황을 격 없이 대한다는 것 아니겠나.”
대련 후에 황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둘만의 대화를 시작했다. 오직 친우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는 고민이 던져졌다.
“세상엔 내가 이길 수 없는 게 너무 많군.”
검은 드래곤을 떠올리며 한 말에, 헤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태 이기기만 하셨잖습니까. 한두 번쯤 지는 것도 폐하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로 봅니다.”
비오르틴은 씁쓸히 웃었다. 기탄없는 말이 고맙긴 하나, 한두 번쯤 지는 것으로 끌날 문제가 아니다. 상대는 검은 드래곤이지 않은가. 검은 드래곤과 진심으로 맞서게 되면 지고 말고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 설 것이다.
“그리고 늘 싸우며 살 수도 없는 법입니다. 검은 드래곤의 조용함을 긍정적으로 여기셔도 될 듯합니다.”
“긍정적으로 여기라?”
“그는 권력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 말입니다.”
헤세는 자기가 보고 느낀 하이너에 관해 말했지만, 비오르틴은 그 점에 동의하지 못했다. 검은 드래곤이 권력에 관심이 있든 없든, 황제 자신보다 더 큰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황제가 죽을 때까지 신경 쓰이는 일이 될 것이다.
황제는 비에 젖어 우는 것 같은 얼굴로 먼 곳을 보았다. 철제 장미 덩굴 장식 울타리 너머엔 황족들이 간단한 운동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그곳에 비를 뚫고 한 무리의 사람이 걸어오고 있다.
“로… 아니카.”
비오르틴은 무의식적으로 아내의 이름을 부르려다 딸의 이름으로 바꿔 불렀다. 아내가 이런 비 오는 날, 그것도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어찌 밖으로 나오는지 모를 일이다.
헤세 역시 흥미로운 눈길로 황녀와 황후의 모습을 보았다.
연무장에 황제가 있는 모습을 보고 시녀들은 멀리서 예를 갖춰 인사했으나, 로테는 눈인사만 할 뿐 그 이후에는 전혀 남편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마치 남편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보다 더 무의미한 것처럼 대했다.
딸 아니카를 안으며 비를 맞는 그녀가 집중하는 일은 오직…….
“아, 차가워! 미끌미끌 거린다! 톡톡 튀고! 입에도 들어가고! 옷이 젖네! 아, 차가워! 차갑다! 미끌미끌 거리고 톡톡 튀고! 또 톡톡 튀고! 피부가 따갑네!”
바로, 딸에게 비를 느끼게 해주는 행위.
시녀들 역시 그녀 곁에서 그녀의 말을 따라 한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하늘로 뻗게 해 보기도 하고, 아이의 눈을 가리는 안대를 풀어주기도 했다.
그녀가 하는 짓을 비오르틴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는 아내를 실성한 사람 보듯 하며 중얼거렸다.
“대체 저게…… 무슨 해괴한 짓이지?”
왜 저런 짓을 하지? 유모와 보모를 없애버리니 반항을 한다고 저러는 건가?
황제는 심지어 그런 생각도 했다.
헤세는 아이에게 비를 가르쳐주고 비와 연관된 언어를 익히게 해주는 황후가 이제 보니 마리와 상당히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끼며 대답했다.
“해괴한 짓이 아닙니다. 폐하.”
“아니라면?”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황후 폐하께서는…… 한 아이의 어머니로서 소소하면서도 가장 위대한 일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말수가 적은 헤세가 그렇게 감상적인 느낌으로 말한 것은 처음이다.
비오르틴은 뒤늦게야 로테가 하는 일을 깨달았다.
앞을 볼 수 없어도 손가락을 움직이며 비의 감촉을 느끼고 까르르 웃는 소리를 내는 딸의 모습에 답이 보였다.
‘로테…!’
아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그의 입가는 그가 의식도 하지 못한 사이에 서서히 올라갔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에 M83의 wait라는 곡을 들으면서 썼어요. 그곡 뮤직비디오의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비오르틴을 잠시 생각했습니다. ㅠㅠ.
아, 그리고 이 소설에서 19씬을 뺀 일반 연재(무료)를 한다면 과연.... 독자님들의 생각은 어떤지 좀 여쭤 봐도 될까요? 조심조심...
그럼 내일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