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9 8. 삶, 삶, 삶 =========================================================================
시선이 식탁 위의 장식꽃을 향하지만, 실은 장식꽃을 보는 게 아니라 먼 미래를 보는 듯하다.
하이너는 그런 륀체르의 태도에서 지금껏 보았던 것과는 다른 위험한 분위기를 느꼈으나, 이내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그리 큰 신경을 쓸 정도로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리는 하이너와 달리 륀체르의 말을 시답잖은 농담으로 여기며 투덜거렸다.
“뭐얏! 이봐, 길드장! 내가 아까 당신보고 뭐라고 했지? 그냥 부자로 있으라고 했잖아. 그냥 부자만 하고 다른 건 하지 말라고 했잖아! 세상을 먹겠다니, 싫다! 하지 마! 세계 정복 같은 거 하지 마!”
륀체르는 혀를 쭉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 내가 세상을 먹을 건데?”
마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목에 핏대를 세웠다.
“뭐래! 내가 먹을 거거든?”
그러자 륀체르도 함께 일어나 장단을 맞춰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네가 통치의 기본도 모르는데 어떻게 먹어?”
“당신한테 그딴 평가 듣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당신, 돈 좀 있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는 알겠지만, 단지 돈 따위로만 세상을 당신 맘대로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럼 금권 말고 또 뭐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지? 역대 마탑의 마법사들도 돈 때문에 움직였던 것을 알고 있긴 하나? 무조건 돈을 돈 따위라 운운하며 하찮게 보는 버릇은 좀 고쳐. 돈이야말로 모든 것의 척도라고. 그리고 그러는 너야말로 세상을 먹는 게 쉬워 보이나? 아, 혹시 무적의 드래곤을 기사로 부려서 만사가 그렇게 자신만만한가?”
“웃기고 있어! 난 내 기사가 드래곤이 되기 전부터 자신만만한 사람이었다고!”
유치한 싸움으로 번지는 느낌에, 하이너가 그들을 멈추게 하려고 륀체르에게 질문했다.
“세상을 먹을 작정이라니,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다들 뭔가를 정복해야 한다고만 생각할까. 주어진 삶에 만족하는 법 따윈 모르는지? 요즘 들어 평온한 일상의 소중함이 절실하고, 그걸 간절히 원하는 자신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아가씨나 륀체르가 야망하는 것을 도무지 공감할 수 없다.
륀체르는 단순하게 정리해서 대답했다.
“왜냐니. 누구도 내게 달려들지 못하게 하고 싶으니까.”
누구도 달려들지 못하게, 누구도 자신의 자리를 넘보지 못하게, 누구도 자기를 위협하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세상의 절대자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된다면, 혹여나 그때 누가 달려든다 해도 뭐 어떠랴. 적어도 바너의 얼간이 길드마스터들의 음모에 휘말리는 일보다 훨씬 그림이 좋겠지. 증오와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에도 미학이 있는 법이거든. 작은 그림 속 분쟁은 사람을 초라하게 하지만, 큰 그림 속 분쟁은 하나의 역사, 전설이 된다고.
륀체르는 그런 생각에 싱글벙글 웃음 지어 보였다.
하이너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누가 좀 달려들면 어떻지?”
륀체르는 웃음을 지우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성가시잖아. 귀찮다고!”
“여태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나?”
“지긋지긋하다고.”
하이너는 시선을 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참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 그게, 인생 아닌가.”
그러자 마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하이너는 자기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지긋지긋한 것, 그게 인생이란 말은 즉 아가씨와 함께 한 날들을 지긋지긋하게 정의한 것이나 다름없다. 진심은 그게 아닌데 말이다. 그는 큰 실례를 했단 생각에 정정했다.
“내 말은, 지긋지긋한 게 인생이란 말이 아니고…… 그 어떤 삶을 봐도 좋은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일도 겪게 되는 그런 순환을….”
륀체르가 그 말을 끊으며 가당찮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오! 무적의 드래곤에게 인생론을 듣고 싶지 않다고. 현실감이 없단 말이다. 이제 쓸모없는 이야기는 치우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어. 내 패가 되어달라는 부탁까진 하지 않을게. 그동안 너희를 친애하며 돌봐준 사람으로서 감히 부탁할 테니 그것만 들어줬으면 좋겠군. 그러니까, 친구로서, 들어달란 말이야.”
“무슨 부탁?”
륀체르는 하이너의 눈을 마주하며 간절히, 그리고 진지하게 부탁했다.
“포르투바 녀석들이 로귀하르트 작자들(황족, 황제가 된 비오르틴을 뜻함.)과 손을 잡지 못하게 해줘.”
“더 자세히 말해보겠나?”
륀체르는 실렌틴 광산 재건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재건 자본이야 자기가 대면 되지만, 기술자인 포르투바가 변덕을 부렸다. 자신이 아닌 황족과 손을 잡는다니. 세상의 절대자가 될 야심이 있는 자신이 황가에 이득이 가는 일을 멍청히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설사 황태자 아니, 이제는 황제가 된 비오르틴이 예전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이라고 해도.
“마리. 하이너. 너희가 좀 도와줬으면 해. 비오르틴이 기갑체 제조 공정을 장악하게 되면 마력기갑체를 제멋대로 다룰 수 있는 이는 대륙에서 오직 그 하나뿐이 될 거야. 독재의 밑바탕이 다져지게 되는 셈이라고.”
마리는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했다. 절대적인 권력을 위해 황도의 세력가들을 차례로 해치운 비오르틴이 권력의 정점, 허울뿐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정점에 올랐을 때, 독재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그리고 마리에겐 그런 이유 외에도 황제를 견제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비올 그 녀석이 다 해먹게 둬선 안 되지.’
륀체르가 말을 이었다.
“이번 한 번만 부탁하지. 우리가 협력자로 일한 건 처음이 아니잖아. 포르투바 그 녀석 아니, 포르투바 그 부자들에게 드래곤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최면 마법을 걸어서라도 그들과 로귀하르트 작자들이 힘을 합치지 못하게 하자고…… 이 대륙,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지.”
마지막 말-대륙의 평화-에서 가식을 느꼈지만, 마리는 개의치 않고 하이너에게 권했다.
“하이너. 나도 륀체르의 생각에 동의해. 황제가 마력 기갑체 부품 제조 공정의 전부를 독식하면 독재는 피할 수 없어. 제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황제가 아닌 륀체르에게 포르투바의 기술력이 협력 되는 게 옳아.”
“제가 보기엔 독재의 위험성은 사파이어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만.”
마리는 물을 한 잔 마시며 본격적으로 이야기했다.
“글쎄? 태생부터 고귀하신 황족들과 이익에 충실한 장사꾼 중 누가 더 앞일을 정확히 계산하는 데 능할까? 황족들은 저들의 미래에 종종 ‘제국민들은 우리에게 무조건 충성해줄 거다!’라는 망상을 집어넣고 무리하게 나가다가 반역이란 철퇴를 맞지만, 장사꾼들은 저들의 계산에 절대 망상 따윈 집어넣지 않아. 그들은 언제나 순익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손해 보는 짓은 하지 않지. 특히나 사파이어 길드장 같은 큰 장사꾼은 더더욱! 생각해 봐. 비오르틴이 기갑체 제조 공정 전반을 장악해버리고 그것을 제국 정부의 신성한 일이라고 포장하면 역풍을 맞기 쉽지만, 륀체르가 주도자가 됐을 땐 이야기가 달라져. 각 세력은 저들이 갖춘 능력만큼이나 륀체르에게서 기갑체를 정비할 부품을 살 테고, 륀체르는 순수한 상인의 정신으로 그 거래를 할 테지. 그렇게 되면 결국 마력 기갑체는 힘을 원하는 사람들이 골고루 운용할 수 있을 것이고, 각 세력 간 힘의 균형은 맞춰질 거야. 적어도 황가의 독재보다는 훨씬 그림이 좋지 싶은데.”
하이너는 아가씨의 말에 오류가 있다고 여겼다.
“힘을 원하는 사람들이 골고루 운용할 수 있을 것이고…… 이상하군요. 애당초 각 세력이 마력 기갑체를 운용하지 못하게끔 부품 거래를 중단하게 해달라고 사파이어에게 부탁하신 분은 아가씨가 아니었습니까?”
마리는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과거 실렌틴 광산이 폭파된 이유를 되짚어 보자면 자신이 륀체르에게 했던 부탁, 즉 부품 거래를 중단하게 해달라고 했던 사실을 외면하지 못하리라.
하이너는 시선을 내리고 진지하게 자기 생각을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장황하게 말씀하시지만, 결국에는 비오르틴과 포르투바가 손을 잡는 것이 그냥 싫다고 우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아가씨께서 황태자 아니, 이제는 황제가 되어버린 그 사람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 그 사람을 견제하려고 내리시는 명령이라면 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아가씨께선 사사로운 복수에 휘말리기보다 제국, 대륙을 생각하여 움직이는 분이시고, 저는 그런 아가씨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아가씨, 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십시오.”
“으응……?”
“포르투바를 사파이어 길드장과 손잡게 하려는 의도의 진심, 말씀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마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마음 같아서는 륀체르처럼 ‘대륙을 위해, 이 대륙의 평화를 위해’ 이 일을 하려 한다고 연기라도 하고 싶었으나, 정말 대륙의 평화를 위한다면…… 마력 기갑체 공정 따위 모조리 박살 내는 게 옳다. 그런 공정을 만들려는 움직임 자체도 무효화시켜야하겠지.
그래. 결국, 자신도…… 비오르틴에게 분노하고 복수를 원하여 륀체르의 편에 서려는 것뿐이리라.
하지만 자신을 속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고,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호위기사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고 싶진 않다.
“아가씨?”
“그래. 인정할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황도의 그 xx에게 가장 강력한 x을 먹이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미안. 하이너. 내 개인적인 원한으로 대륙 정복이라는 대의에 스스로 누를 끼치려 했네. 나답지 못하고 얼간이 같은 모습이었어. 사과할게.”
륀체르가 짜증이 난다는 듯 포크를 탁! 소리 내며 내렸다.
“뭐야, 마리! 네가 그렇게 말하면 드래곤이 내 부탁 안 들어줄 거 아니야! 아우, 짜증나!”
그는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고, 하이너는 여전히 시선을 내리깔고 있다.
마리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호위기사의 달라진 태도 변화 때문에 심란한 모양인지, 굳은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응접실을 나서며 차갑게 말했다.
“그래. 사실 이 대화에 나는 필요 없을 것 같아. 드래곤께서 알아서 하시는 게 옳지.”
어차피 륀체르가 필요한 것은 그녀의 힘이 아니다. ‘너희’라는 말을 쓰며 ‘너희에게 부탁한다.’고 표현하지만, 결국에는 그녀가 아닌 최강 생물 드래곤에게 부탁하는 것이지 않은가.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자, 륀체르는 어색한 분위기에 두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복잡한 여자의 속을 잘 모르긴 해도, 저 아가씨가 호위기사의 말 때문에 불편해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럴 땐 같은 남자로서 ‘따라가서 달래줘야 하지 않느냐?’고 조언해야 할 테지만, 륀체르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마리를 달래러 갈 뿐.
“참! 마리니시네! 요새 왜 내가 준 반지 안 해? 앙?”
***
혼자 남은 하이너는 피곤한 듯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렸다. 손이 내려가고 그의 눈이 드러났다. 어느샌가 새하얘진 눈은 하이너의 말이 아니라 슈테반의 눈을 하고 있다.
슈테반은 하이너의 내부에서 흡마귀의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근처에 마리아 그 계집 있지 않아? 흐흐…… 정말 맛있을 텐데. 작은 마력이지만 그 애는…….」
더 듣기 싫은 하이너는 서둘러 제 방으로 갔다. 자신에게 스스로 수면 마법을 걸어 당분간 깨지 않을 작정이다.
그런데 그 직전, 그의 방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왔다. 노크를 조심스레 하고 들어온 이는 바로 마리아다.
“무슨 일이지?”
마리아는 슈테반에게 마력을 빼앗기고 회복하는 중이라 다른 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자그마한 목소리를 겨우 냈다.
“부탁이 있어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에 하이너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서로를 특별히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 굴지만, 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긴장하고 있다.“뭐지, 부탁이란 게?”
“…… 제가 마력 쓰는 게 힘들어서 그러는데, 혹시 제게 수면마법을 좀 걸어주실 수 있으세요?”
순간, 하이너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 아이가 이런 부탁을 하기 전에 자기가 먼저 이 아이에게 수면마법을 몰래 걸어뒀어야 했다. 마력생물들이 같은 마력생물들에게 발정하는 시기가 코앞에 닥친 요즘, 성적으로 곤란해지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다. 이 소녀도 그런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다. 당연히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강력한 마력생물, 드래곤을 의식하고 드래곤이 뿜어내는 생기에 반응할 것이리라. 저 아이도 서로 의식하는 것이 불편하기에 수면마법을 해달라고 하는 것 아닌가. 저 아이의 입으로 이런 민망한 부탁을 하게 해뒀어야 했는지…… 하이너는 자기가 배려가 부족했다고 후회했다.
그는 곧바로 마리아에게 수면마법을 걸어주고 일렀다.
“오 분. 오 분이 지나면 기절하듯 잠들게 될 거다.”
“감사합니다. 그럼.”
반나절 정도 자게 해두었다. 온종일 자게 해버리면 마리아의 몸에 좋지 않을 것 같기에, 반나절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깼을 때…… 자기가 이곳에 있으면 피차 불편할 테니…….
‘어디 가 있든가 해야겠군.’
하이너는 마리아가 깨기 전에 어딘가 피해 있어 주기로 했다.
============================ 작품 후기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