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8 8. 삶, 삶, 삶 =========================================================================
얼음도시 시귀르의 중심지 유르.
안식의 겨울의 가장 큰 방.
이 방은 오늘 륀체르 사파이어 개인 손님의 응접실로 이용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때와 같이 시종이나 음악가 등은 함께 하지 않는다. 그만큼 극비로 해야 하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황도 로귀하르트에서 등극식이 성대하게 치러지는 동안, 이곳에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등극식과는 무관한 화제를 이야기하리라.
널찍한 식탁 가득 질 좋은 술과 고급스러운 음식들이 차려졌다. 륀체르가 고귀한 드래곤 일행에게 대접하는 것들이다. 식량이 귀한 냉지에서 이토록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
식탁을 본 마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이 음식들 좀 봐! 이곳, 자선 사업하는 곳으로 아는데…… 저 구두쇠가 사람들한테 무료로 나눠주려고 늘 이런 재료 쟁여두는 거야? 구두쇠가 웬 일이래!’
별일이 다 있다는 듯 보는 눈길에 륀체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마리는 그가 정말 본받아야 할 부자의 표본이라고 여기며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흡사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을 격려하는 듯한 손짓이다.
륀체르는 그 손짓의 속내가 궁금했다.
“갑자기 왜 이래?”
마리는 생각하던 것을 그대로 말했다.
“이제야 알겠어. 네가 왜 구두쇠처럼 구는지.”
“음?”
“사실은 이 좋지 않은 환경에 사는 사람들에게 넉넉히 베풀려고 다른 것에는 돈을 안 썼던 거지, 그렇지? 이 음식들 좀 보라지. 이 음식재료들을 좀 보라고. 추운 곳에서 이런 음식을 뚝딱 요리해 내온다는 건 언제나 이런 재료가 가득 쌓여 있다는 뜻일 테고, 그건 길드장 당신이 사람들에게 늘 베풀 준비가 되어있단 것, 아니야?”
“하하…….”
륀체르는 어이가 없다. 이 아가씨가 어디 동화책에 나오는 마음씨 착한 부자, 굶주린 이들에게 맛좋고 기름진 스프를 마구 퍼주는 그런 부자를 그리나 본데…… 천만에.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마리를 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만졌다. 다정한 태도이긴 하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침이 없다.
“오, 마리. 달콤하고 다정한 그림은 누구나 그리지. 그따위 초 단순한 사고를 하는 아가씨 주제에 어떻게 드래곤을 하수로 부리는지 신기하구나.”
“뭐엇?”
“이 사파이어 님께서 아주 원색적으로, 너무 원색적이라서 유치하게 들릴 정도로 쉽게 가르쳐주지.”
“뭘 가르치는데?”
“넌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세상에 네가 말하는 마음씨 착한 자선 사업가는 없어. 그러므로 나도 그런 자선 사업가가 아니지. 이 건물은 어디까지나 내게 들어오는 검은 자금을 세탁하려고 만든 기관에 불과해. 그러므로 빈곤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질 좋은 식재료를 언제나 가득 쌓아놓는 일 따윈 없다고. 알겠어?”
마리는 발끈했다.
“어머! 당신이 그런 뻔하디뻔한 부자인 줄 몰랐네!”
륀체르는 그런 마리가 재미있어서 더욱 과장된 연기를 했다.
“오호! 이제라도 아는 게 다행이군. 나는 뻔하디뻔한 부자랍니다. 광대들이 자주 연기하는 흔하디흔한 악독 부자이기도 해요! 호호호!”
“뭐가 잘났다고 말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앙?”
“으흠. 내가 뭐가 잘났냐고? 생각해 봐. 뻔하디뻔한 부자라 하지만 어쨌든 무수한 거지보단 잘났기에 이 자리에 오른 거라고. 그것만으로도 내 잘남은 증명돼야 하는 거 아닌가. 무엇보다 나는 부모를 잘 만난 게 아니라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지. 그 사실에 주목하자면 나는 더더욱 뛰어난 부자지. 이쯤 돼서 눈치 챘겠지만, 이건 내 자랑이야…… 참, 그리고 자꾸 나보고 구두쇠, 구두쇠라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리니시네 너만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될 거야. 양심적으로 이제 슬슬 알 때도 되지 않나, 응?”
륀체르는 마리의 두 뺨을 두 손으로 쭉 늘어 당기며 아이에게 장난치듯 했다. 그의 눈이 다정하고도 사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내가 그동안 너한테 들인 돈이 얼만데.
마리는 그런 신호를 충분히 알아듣고 있지만, 모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륀체르는 마리가 했던 베풂이 어쩌고 하는 말이 다시 생각해도 웃겨 혼잣말했다.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도 모르면서 정복을 하겠다니, 원. 애 같아서 귀엽잖아.”
마리는 눈썹을 V자로 만들고 아랫입술을 한껏 깨물었다. 그 모습을 만약 하이너가 보았다면, 아가씨께서 엄청나게 화가 나셨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아. 결국, 륀체르도 다른 녀석들이랑 똑같구나!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그 재산을 합하면 대륙 부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간일 진데, 그런 중요한 위치에 선 자가 어찌 이리 검은 자금에 관해 당당하게 말하는 걸까. 보통, 숨기는 게 정상 아닌가?
자기를 너무 믿는 건지. 아니면 자기가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편하게 말하는 건지.
“마리. 만에 하나 진짜 대륙을 정복하더라도 싸구려 적선은 하지 말라고. 알겠어, 귀염둥이?”
“…….”
“통치에 한해선 내게 많이 배워야 할지도 모르겠군. 후후.”
‘흥. 돈 좀 만진다고 자기가 통치를 운운해? 가당찮아.’
마리는 륀체르가 가르칠 통치란 것을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이 피지배층의 삶에 관심이 없는 거야 잘 안다. 적선이 다 무엇인가. 제공한 노동력에 타당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조차도 인색한데.
그들이 관심 있는 것은 제국민들이 어떻게 하면 더 괜찮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자기들의 힘을 더 키우고 지킬 수 있느냐, 이것뿐이다.
행여나 제국민들이 배가 부르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그들은 더 큰 삶의 만족을 찾을 것이고, 만족하게 되면 이상향의 질을 따질 것이다. 종국에는 권력자들의 입지를 줄이는 결과를 맞이할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자들은 그런 현실이 오기 전에 미리 견제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에게 들어오는 검은 자금을 세탁하려고 이 건물을 지은 륀체르도 그렇고, 황도의 소황이라 불리며 제 입맛에 맞게 권력을 휘둘러왔던 할데바인도 그러했다. 어디 그뿐인가. 당장 로귀하르트의 황태자, 아니, 이제는 등극식을 마쳐 황제에 오른 비오르틴을 보라. 지금껏 그는 개인적인 욕망으로 다른 권력자들을 해치워왔지, 결코 제국을 더 좋게 만들려고 싸운 게 아니다. 그가 등극식을 서두르는 것은 자기보다 더 강한 드래곤이 제국 권력의 상징이 되는 것을 미리 막으려함이 아니던가. 다른 역대 황제들도 마찬가지다. 권력자들은 늘 견제한다. 늘 인색하고 억압하고 군림하려 든다. 자비와 평화와 제국민의 생활상 따윈 전혀 그들의 중요 문제가 되지 못한다.
지금껏 천 년이나 이어진 제국에 조금의 발전도 없다는 게 그걸 증명했다.
그렇다면 제국민으로서 생각할 때, 이런 현실에 마땅히 분개해야 하지 않을까.
사욕을 채우려고 권력에 서서 만인을 지배하려 드는 이를 지배자로 모셔도 되는지……?
‘너희는 모두 죽어야 해.’
차라리 그편이 이 대륙, 이 대륙의 모든 인간이 한 단계 더 진화한 세상에서 사는 길이라고 여긴다.
마리는 어둡고도 무거운 생각을 가리듯 상냥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륀체르.”
“응?”
“잘 들어.”
“난 언제나 너의 말은 잘 듣는데? 다만 잘 듣기만 하고 동의를 안 할 뿐이지. 으하하하!”
마리는 발꿈치를 높이 들어 올려 륀체르의 높은 어깨에 가느다란 두 손을 갖다 댔다.
아아. 이 부자님 얼굴 좀 보라지. 아름답고 고귀하고 고생 따윈 모르는 듯 살아온 매끈한 도자기 같은 얼굴.
…… 이런 얼굴은 그냥 장식품처럼 있는 게 좋다.
마리는 륀체르에게 격려하듯 협박했다.
“부자만 하렴. 다른 건 되지 말고 되려 하지도 마. 그냥 부자로 있어.”
“무슨 말이야?”
“부자 아닌 다른 거, 다른 권력을 탐하면, 이 마리니시네 님께서 가만두지 않을 거야! 호호호!”
“뭐래….”
대충 대꾸하고 있지만, 지금 륀체르는 다른 때보다 비교적 진지한 마리의 얼굴에 놀랐다. 과장을 보태자면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그는 찝찝한 기분을 지우려고 술병에 손을 댔다.
“먹기나 하자고. 네 드래곤 기사님 기다리다가 뱃가죽이 등짝에 달라붙겠어.”
그가 먼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리도 배가 고픈지 신선한 채소를 감싼 밀쌈에 손을 가져갔다. 한 입 베어 무니 입 안 가득 봄의 기운이 퍼지는 듯 신선함이 몰려왔다. 먹음직스럽게 꿀꺽 삼키면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본다.
‘이런 맛 좋은 건 모두가 먹고 살아야지! 아무렴! 마법 만능의 제국에서 그걸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냐고!’
그러다가 문득 뒤늦게야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얼음을 동동 띄운 물을 한 잔 마시고 음식을 삼킨 후 물었다.
“그럼 어쩌자고 이런 음식들을 준비한 거야? 신선한 음식재료 같은 것을 쌓아두는 게 아니라면 이건 언제 다 준비한 거고, 왜 준비한 거지?”
“정말 몰라서 물어?”
“아하! 나 때문에?”
륀체르는 하마터면 솔직하게 ‘당연한 거 아냐!’하고 대답할 뻔했다. 하지만 참았다. 그는 때마침 방으로 들어서는 하이너를 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너 때문이라니. 저기 오시는 귀하신 손님분 대접하려고 그러지. 어서 여기 앉지.”
륀체르는 직접 의자까지 내어주며 하이너를 맞이했다. 하이너는 호의를 미심쩍게 여기며 앉아서 아가씨께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낮고 상냥한, 그래서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목소리가 나왔다.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까칠하고 무례하던 호위기사의 모습은 대관절 어디에? 마리는 이질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잘 잤어.”
“다행이군요.”
어색한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궁금증을 자아낸다. 륀체르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하이너의 잔에 술을 따랐다. 곧 륀체르가 바너에 유행하는 극단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참, 요새 오슬의 수인족 출신으로 꾸며진 극단이 제국을 돈다던데 말이야. 그들에게도 예술가의 피가 흐르는지 몰랐다니까…….”
중요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음식에 곁들이는 배경음악의 용도로 나누는 유형이다.
그 소음 속에서 하이너는 내부의 다른 인격들과 다투느라 바쁘고, 그들이 가진 각각의 야망을 다스리는 것도 바쁘다.
주로 슈테반과 마황이 다투면 얌전히 있던 마르틴이 나와서 둘을 중재하다가 그것도 안 되면 하이너가 나서는 모양새다.
더 큰 마력을 달라는 슈테반과, 암흑 지형에 가서 세상의 비밀이나 파헤치자고 강력히 주장하는 마황, 둘을 말리다가 뜬금없이 ‘영혼이 소멸하지 않았으니 육체만 있으면 다시 살 수 있는 거 아니냐?’며 삶을 희망하고 집착하는 마르틴, 그 셋의 인격을 감당해내느라고 허우적거리는 하이너의 표정을 보고 있기 힘든지 마리가 륀체르를 보았다.
“아무튼, 고마워. 륀체르. 내 일행을 이렇게 거절하지 않아 줘서.”
“무슨 소리. 당연한 일 아닌가. 그나저나 잘 됐지. 마침 드래곤을 내 패로 끌어들이려 했거든. 얼마나 잘 된 일이야.”
륀체르는 스리슬쩍 ‘이미 드래곤 너는 내 편이 되었어!’라고 옭아매려 했다.
그러자 하이너가 아주 피곤한 표정이 되었다. 륀체르의 편에 서서 여러 일을 했지만, 표면적으로 같은 패라고 단언할 관계는 아닌 듯한데…… 단도직입적인 질문이 던져졌다.
“난 당신의 패가 된다고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러자 륀체르가 도리어 해맑게 웃으며 물었다.
“하하. 이상하군. 내 패도 아닌데 왜 내 건물에서 나의 대접을 받지?”
하이너는 담담히 대꾸했다.
“네 그늘 외엔 숨을 곳이 없었다.”
“없다니?”
“나는 아가씨의 호위기사지. 그리고 연인이다. 언제나 이분께서 안전하고 편안하고 아늑하게 지내셔야 할 곳을 찾아 모셔야 해……, 그리고 드래콘의 몸을 회복하려면….”
그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잠시 아가씨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말은 중단됐다.
여전히 륀체르는 하이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어찌 보면 ‘고작 그런 편의를 위해 감히 날 찾았느냐, 내 편에 서지 않을 거라면 이건 좀 무례한 호의호식이 아니냐?’라고 따지는 표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이너는 그런 의뭉스러운 시선을 피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너무나 당당해서 오만하기까지 한 눈으로 륀체르를 본다.
그러자 서서히 륀체르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인정하긴 싫지만, 인간 아닌 초월 생물의 기에 지고 말았단 게 맞겠지.
‘뭐야. 지금 제가 드래곤이라고 재는 거야? 아주 미친 듯이 센 생물이면 내 편의를 마음껏 이용해도 되느냐고!’
그러다가 륀체르는 갑자기 입가를 올렸다.
‘후우, 그나저나…… 호위기사로 머무르길 원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야.’
이 시골 청년은 최강의 존재가 되어서도 여전히 제 아가씨의 호위기사, 연인으로만 머물러있길 원한다. 이런 무욕한 성향이란 게 얼마나 고마운가.
하이너가 할데바인 대공과 같은 탐욕스러운 인간이었다면, 분명 할데바인이 그랬던 것처럼 대륙을 탐욕스럽게 지배하려 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대륙은 어떻게 될지 장담하지 못하리라.
륀체르가 그러한 생각을 하며 포크를 집어 드는데, 마리가 발랄하게 웃으며 물었다.
“길드장. 당신은 내 호위기사를 당신 편으로 들여서 뭐할 생각이었어?”
륀체르는 윤기 나는 소스가 흘러내리는 고기 조각을 썰어 먹었다. 그리고 향긋한 술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마리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 세상을 먹을 작정이거든.”
그의 푸른 눈이 야심을 담아 고요하고도 강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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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