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 8. 삶, 삶, 삶 =========================================================================
마리 일행 아니, 이젠 드래곤 일행이라 불러야겠지. 이들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꾸준히 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앞으로 교섭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물론 마리니시네 입장에선 지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바너 길드 마스터가 원하는 일을 제대로 해냈고, 그로써 보수를 받았다고 생각할 테지. ‘지원’이라는 말을 불쾌하게 받아들일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의 입장으로 보자면…….
지원이다. 구두쇠 자신이 그 누군가에게 그만큼 지원을 한 적은 없다.
정말 보수만 주고 끝냈다면 그녀가 그동안 결과적으로 무사히 대륙행을 할 수 있었을까? 오를린 영주 사병들은 그녀를 뒤쫓았고, 남부지역 호위대들도 그녀를 수색했다. 무엇보다 가장 성가신 수색대는 황태자가 보낸 이들이었다. 그들의 뒤쫓음에서 그녀 일행을 나름대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신은 그녀에 관한 각종 거짓 소문을 풀어 수색을 교란했다. 때때론 호위도 붙였는데, 어디 그게 한두 푼이 드는 일이던가. 그것은 단연코 그녀를 지원하고 돌봐주었다고 자부해도 될 일이다.
륀체르는 어깨에 바짝 힘을 주었다. 눈빛이 마치 개구쟁이의 눈빛 같다. 동네 친한 친구에게 맛난 간식을 줬다가 나중에 세 배로 돌려받을 욕심쟁이의 눈빛.
‘너희도 알 테지. 모른 척하기 없기야. 후후.’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곧바로 마리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이 괜찮은지 확인한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잘 보여야겠지. 이런 식으로 신경이 쓰이는 건 처음이다. 마차에서 구두를 팽개치고 온 것이 우습지만, 그 외에는 훌륭한 모습이다.
“흠흠.”
노크를 했다. 그런데 노크를 해도 답이 없고, 이름을 불러도 답이 없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들어가고 보니, 그녀가 잠들어 있다.
“흐음.”
깨우고 싶지만, 괜히 거슬리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자게 내버려 두었다.
아아. 얼마나 좋은지.
잠든 그녀의 얼굴을 원 없이 바라볼 수 있다.
륀체르의 손은 저절로 마리의 얼굴을 향했다. 그러나 그녀가 작은 몸부림을 치는 순간, 황급히 손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갔다.
“젠장!”
예전 같았으면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이마 정도는 만졌을 텐데, 지금은…….
“너, 마리 너 이놈아. 왜 하필 드래곤이랑 사귀느냐고. 슬슬 깨질 때 되지 않아? 나 같으면 그딴 애인, 엄청나게 부담스러워서 도망갈 거라고. 게다가 종도 달라! 파충류라고, 파충류! 그나저나…….”
륀체르는 손이 아닌 눈길로 마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온화한 얼굴을 보고 혼잣말을 하는 것뿐인데, 어느샌가 자신의 표정마저 온화하게 물들어 있다.
“내 생일에 와준다고 했으면서 결국 이렇게 만나네. 반가워.”
다시 만난 인사는 이것으로 충분하겠지. 이후에도 시간은 있으니까.
륀체르는 아쉬움을 털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주 느린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의 눈에는 계속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른거렸다.
“여전히 99.9 점이라니까.”
***
황도 로귀하르트.
황태자의 야울 궁.
황의회에서 등극식에 관한 사항을 논의한 후, 황태자는 일찍 잠이 들었다. 제국 권력의 상징, 제국의 태양이 될 날을 앞두고 그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듯 과거의 꿈을 꾸었다.
***
풍요의 평지 로샤타르트.
봄날, 궁정 여인들이 변복하고 단체로 황금보리 호수에서 소풍을 즐겼다. 황태자 비오르틴의 생모인 황후와 그녀의 시녀들, 그리고 호위차 따라온 마탑의 여인들이 함께 꽃과 봄바람을 즐기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들의 화제는 궁정 음악가, 황도의 소문들에서 점점 다른 것으로 옮겨갔다. 여인들은 대륙 순례를 마치고 온 황태자의 경험담을 원했다.
그러나 입이 무거운 황태자는 좀처럼 오를린의 이야기를 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여인들은 그의 잔잔한 미소로 보아, 황태자가 그곳에서 좋은 일이 있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마탑 분들이 호수에 수성(水性) 라인햐르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구경하러 가요!”
“로샤타르트 남자들도 나와 있다고요!”
“어디 따분한 황도 남자들과 얼마나 다른지 한 번 볼까요?”
“호호호!”
수다스러운 궁정 여인들은 호수의 마법을 볼 겸 지방 귀족 청년들과 어울리려고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비오르틴과 그의 어머니, 황후뿐이었다.
비오르틴은 그제야 숨이 트였다. 황궁을 떠나 지방 귀족처럼 행세하는 건 즐거운 일 같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시녀들의 시선을 받지 않고 어머니와 단둘이 있을 수 있고, 오를린의 아름다운 소녀에 관해 넌지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저기, 어머니.”
“음?”
“어머니께서는 만약 제가 황의회의 성미에 차지 않는 여인을 반려로 맞으려 하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네가 황의회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위엄을 찾으렴.”
황후는 엄중하게 말했지만, 사실은 속으로 빙긋이 웃음 짓고 말았다.
‘오를린에서 맘에 든 아이라도 만난 게지.’
오를린의 여인이라면 보나 마나 평민의 아이이거나, 평귀족일 것이다.
어찌 이리 제 아버지랑 똑같은지. 자신 역시 황의회의 입맛에 맞지 않는 평 귀족 출신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황태자였던 시절 어떻게든 평귀족 출신이었던 자신을 태자비로 맞이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갖은 고생 끝에 혼인은 성사했고, 자신은 먼 훗날 이렇게 황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들도 아버지의 길을 밟으려 하다니.
황후는 슬그머니 자기 생각을 알렸다.
“… 그리고 내 생각이 뭐 중요하겠느냐. 나는 네 아버지를 보고 불가능은 없다고 여겼단다. 네 아버지께서는 나와 결혼하기 전에도 늘 말씀하셨지. 인간에게 긍정을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요.”
“그래. 그 말 덕분에 나도 주눅이 들었던 마음을 버리고 나름 기지를 발휘해 보았었다. 그 기지가 네 아버지의 계략, 계략이라고 하니 말이 좀 이상하구나. 하여튼 네 아버지의 계획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결국에 우리는 부부가 되었지……, 그러니 비오르틴, 무엇이든 네가 마음먹은 대로 이뤄질 거다.”
“예.”
“이제 슬슬 오를린에서 만난 여인에 관해 이야기해주지 않겠느냐?”
비오르틴은 수줍게 웃었다.
황후는 아들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오를린 여인에 대한 대답은 듣지 못할 눈치였다.
사실 이미 비오르틴은 무언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 그 애요, 참 재미있는 아이예요. 황궁의 여인들이랑은 다르죠. 무려 드래콘을 잡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아이니까요. 생김새는 또 어떤데요. 보고 있으면 활기가 돌아요. 목소리는 맑고 힘이 있어 또렷하고요, 바다와 숲을 섞은 듯한 눈동자를 보면 잡념이 모두 사라질 정도예요. 금발 머리도 황도에서 한껏 멋 낸 부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요. 그 아이는 마치…… 나무 여기저기를 바쁘게 날아다니는 황금방울새 같다, 그 표현이 적당할 것 같아요. 방울새처럼 언제나 바쁘죠. 온갖 위험한 마력생물들이 들끓는다는 소용돌이 숲을 제 앞마당처럼 다니면서 자기만의 실험을 해요. 흑마법이니, 연금술이니, 하면서 말이에요. 동물들을 제 친구처럼 데리고 놀고, 시냇물을 제집의 욕조처럼 다루죠. 노래는 또 얼마나 경쾌하게 잘 부른다고요. 이렇게 되새기다 보니…… 또, 또 오를린에 가고 싶습니다. 또 그 애를 만나고 싶어요. 며칠째 그 아이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가슴이 타네요. 어머니.
아버지도 이러던 때가 있었을까요. 아버지는 저와 같은 병을 앓을 때 대체 어떻게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는요.
저도…… 아버지가 그러했듯,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황후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한참 동안 오를린의 소녀를 떠올리며 소리 없는, 오직 마음의 소리로만 이뤄진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주위가 흐려지며 시간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암흑 지형…인가?’
거대하고도 공허한 어둠이 생겼다. 공포감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데, 새하얀 연기가 샘솟으면서 검은 드래곤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꿈 깨.
네가 말하는 그 여자가 과연 궁에서 황후로 살 수 있을 것 같나?
이어지는 현실의 조각들.
삶은 언젠가 반드시 퇴색되고 만다. 현실의 조각들이 그걸 증명했다.
그리운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퇴색하신 아버지는 간악한 할데바인의 조카를 새 아내로 들이셨다. 오를린에서의 추억은 잊고 묻어 둬야만 하는 기억으로 바랬고, 자신의 주위에는 온통 자신을 물어뜯을 생각만 하는, 그저 겉모습만 화려한 짐승들만이 남았다.
살아야 한다. 모두가 지켜보는 투명한 유리 감옥 같은 권력의 무대 한중간에서,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자기편을 만들어갔다. 검황의 아들 헤그와 신뢰와 우정을 쌓고, 바너의 야심자를 황태자의 권한으로 도와 길드 마스터로 끌어올리며 제 편을 만들었다. 황도에서 세력을 키우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만 바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추억 따윈 가물가물해진 청년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황태자비 간택전.
다시 떠오른 과거의 추억 조각을 짚어 오를린의 신부를 맞이했다. 다시 본 그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대했던 것보다 다른 모습이긴 했다. 잘 자라주었지만 어릴 적 모습과는 어딘가 다르다. 당당해도 뭔가 모자란 당당함이었고, 활짝 웃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두려움을 가리려고 애써 과장하여 웃는 웃음일 뿐이었다. 그런 첫사랑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 아내가 된 그녀를 안고 또 안아도 갈증을 채울 수 없는 생활에 염증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훗날 아내가 된 그 여자는 결국…… 첫사랑이 아닌 그녀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사실.
그리고 진짜 첫사랑인 그녀는…….
다시 검은 드래곤이 활개를 치며 추억 조각을 모두 부수어버렸다. 감히 네까짓 게 껴안고 살 게 아니라는 듯 사납고, 거세게.
비오르틴은 꿈속에서 팔을 허우적거리며 조각을 잡으려 했다.
마리니시네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깃든 파편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안 된다… 가지 마! 가면 안 돼……!”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을 땐, 참을 수 없는 갈증만이…….
***
트리아노네.
로테는 아니카를 따뜻한 물에 손수 씻긴 후, 젖을 먹이고 눕혔다. 산뜻하고 배가 부른 기분에 아니카는 놀고 싶은 모양이다. 제 눈을 가린 손수건이 답답한 듯 긁다가 어미의 말소리를 들으면 까르르 웃음소리를 흘렸다.
로테는 등극식을 앞둔 와중에서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모든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다.
동시에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이런 너를 두고 나는……. 아니카.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아니카를 보면 볼수록 독해져야겠다는 마음만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황태자가 왔다. 시종도 없이 혼자 온 그의 표정. 눈동자, 걸음걸이 모두 예사롭지 않았다. 로테는 버릇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이미 비오르틴의 손은 그녀의 목을 감고 있다.
“전….”
로테는 전하라고 부르려던 것을 마치지 못했다. 황태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머리 뒤통수를 쓰다듬는 손길의 감촉도 이상하다. 마치 금방이라도 깨부술 듯 힘이 들어가다가 다시 힘이 빠지는, 그래서 더 긴장되게 하는 손짓이다.
“전하.”
로테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더욱 뒤로 걸었다.
그 순간 비오르틴은 그녀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입술을 가까이 닿을 듯하다. 비오르틴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덮칠 사람처럼 심상치 않은 눈길로 그녀의 얼굴 전체를 샅샅이 보았다.
머리카락은 가을 보리밭을 보는 듯 윤기가 나고 눈동자는 바다와 숲을 합친 듯 청아하다. 뺨에 감도는 생기와 입술의 선명함. 도저히 아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인의 모습이라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게 동한의 조영에서 출산 전의 몸으로 보기 좋게 되돌린 덕분이지만, 비오르틴은 그런 사실은 알지 못한다.
다만 첫사랑과 똑같은 피사체가 여기, 이곳에, 아내로 있다고만 생각할 뿐.
로테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으려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이제 더는 그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 까닭이 없다. 죄인처럼 주눅이 들어야 할 이유도 더더욱 없다. 검은 드래곤이 제국민에게 절대적 힘의 상징으로 먼저 각인되는 게 두려워서 등극식을 서두르는 겁쟁이 황태자 앞에서 대관절 자신이 전전긍긍해야 할 이유가 뭔가.
‘당신이나 나나 피차 동등한 황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로테는 더욱 고개를 치들고 비오르틴을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는 비오르틴의 손에 힘이 빠졌다. 도발적인 아내의 눈에서 아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보이는 듯하고, 그것은 그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잠시 흐려지는 비오르틴의 눈동자가 이상하여 로테가 미심쩍게 보자, 그제야 비오르틴은 황급히 뒤돌아섰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뒤돌아서는 모습이다.
“네 언니에게 전해라.”
“……?”
“아니카를 살려줘서 고마워한다고. 그리고.”
로테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비오르틴은 뒷말을 흐리며 그곳을 떠났다.
“…미……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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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