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아가씨와 번뇌의 호위기사-104화 (104/122)

00104  8. 삶, 삶, 삶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검은 드래곤 하이너, 오를린의 아가씨 마리니시네, 드래콘 소녀 마리아, 그들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도 하이너가 마법을 써서 모두 어디론가 데려간 게 분명하리라.

그리고 이곳엔 황태자만이 남았다.

황태자는 딸을 안은 채 영혼이 날아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다. 아니카는 기절한 것인지 잠이 든 것인지 조용하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황태자의 눈은 초점이 사라졌다.

검은 드래곤의 난리 통을 헤치고 뒤늦게 달려온 야울 궁 근위대장조는 황제 친위대에 협조 요청을 한 뒤 장내의 이들에게 지시했다.

“황녀 전하를 얼른 모셔라!”

“궁의 마병사들을 모두 소집해!”

“죄송하지만, 마병사들은 모두 의식이 없습니다!”

검은 드래곤이 황궁의 모든 마력을 흡수했기에 마법을 쓰는 마병사들 역시 의식이 없는 상태다.

근위대장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멀쩡한 병사가 있으면 죄다 모으란 말이다!”

그들이 재빠르게 궁을 정리하는 사이 황제 측에선 비상 회의를 소집해야겠다고 알렸다. 황의회의 사람들이 다 모여 이번 일에 관해 논의해야만 한다. 제국의 최고 권력이 사는 곳이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이 퍼지게 된다면, 제국민들은 불안에 떨 것이 분명하다. 권력자들은 힘을 합쳐 검은 드래곤과 대적할 수를 모의해야만 하는 상태다.

시종 하나가 ‘태자 전하께서도 얼른 황제궁에 가셔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태자, 비오르틴은 힘없이 창가로 걸어갔다. 검은 드래곤의 마기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지 하늘의 모습이 우중충하다. 구름대신 검은 기운이 점점이 박혀 마치 하늘에도 곰팡이가 필 수 있단 걸 보여주는 듯하다. 한참 동안 보다 보니, 마치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 같다.

…… 오염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만 여겨진다.

‘죽였어야 했어.’

첫사랑.

약속.

그리움.

그러한 추억에 오염되어 현실을 잊어버렸다. 그녀를 인질로 삼았으면 마땅히 인질로서의 구실을 했어야만 했다. 지금 궁을 보라. 야울 궁과 마탑이 엉망이 되었다. 그녀에게 칼자국이라도 남겨 검은 드래곤에게 협박을 했다면 이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자신은.

그녀의 이름이 저절로 불린다.

“마리…….”

이 현실이 싫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황의회 따위뿐이겠지.

그리고 그 짜증은 뜨거운 물방울이 되어 턱밑으로 흘렀다.

“마리……!”

***

트리아노네.

서한의 수도 광천에서 포르투바를 만났던 로테는 며칠 시간을 두었다가 황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 아니카가 지내는 트리아노네에 바로 달려갔다.

그런데 그곳을 포함한 야울 궁, 마탑의 꼴이 말이 아니다.

대규모 마법사 학살이 벌어졌던 마탑은 재건축이 필요할 정도로 엉망이 되었고, 야울 궁도 보수가 필요해 보인다. 아이가 편안히 지내야 할 트리아노네의 바닥엔 피가 말라붙어 있다. 오는 길에 검은 드래곤 사건을 들은 로테는 어찌하여 궁궐이 그런 꼴이 되었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너무 참혹하여서 할 말을 잃었다.

청소부 하나가 검은 드래곤이 난입한 그때를 떠올리며 공포에 물든 표정을 했다. 실질적으로 궁을 지키는 세력인 마법사들이 사라졌단 사실은 그들에게 기본적인 궁내 예의마저도 잊게 해버렸다. 그들은 황태자비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는데도 그때의 일을 마구 떠들어댔다.

“사람을 산 채로 뜯어 먹었대요! 사람이 사람을 산 채로 막! 어쩜 그런 식인종이 궁에 올 수 있죠?”

“그야 드래곤이니 그렇지! 그나저나, 마법사들이 모조리 사라졌어요! 이제 궁은 누가 지키죠?”

수선을 피우는 사람을 뚫고 시녀장이 나와 헛기침하며 주의하라고 경고하였다. 눈에 주름이 진 시녀장은 황태자비에게 쓸데없는 말을 해대는 이들을 싸늘하게 노려보았고, 그러자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부턴 말을 삼가야 한다. 특히나 그들은 황녀 아니카에게 일어났던 일에 관해선 함구해야만 한다. 어미에게 자식의 불상사를 괜스레 알려줄 필요는 없으니까.

시녀장이 로테에게 물었다.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로테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 입을 떼는 그 순간.

트리아노네의 드넓은 정원을 가로지르며 한 사람이 도착했다. 그는 야울 궁에서 온 자다. 초조한 얼굴의 그는 로테를 보자마자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반색하며 간단히 예를 취했다. 그러더니 트리아노네의 모든 이들에게 고했다.

“자자, 다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닙니다! 큰일이 앞당겨졌어요!”

로테가 궁금하여 물었다.

“큰일이라니?”

“등극식이 사흘 후입니다!”

“하지만 등극식은 아직…….”

로테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등극식이 파격적으로 앞당겨진 이유를 알 것 같다. 검은 드래곤의 마탑 공격으로 황도가 어수선해졌지만, 황실은 등극식을 무사히 치러내서 각 영지에 황권의 건재함을 과시할 작정인 것이다.

그리고 등극식 이후 자신은…….

드디어 황후가 될 것이다!

‘마리! 내가 드디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직전엔 언제나 가슴이 뛰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 이 가슴은 마냥 기뻐서 뛰는 게 아니다. 말 많고 탈 많던 길을 지나오면서 느낀 수많은 감정이 요동치는 것일 뿐.

로테는 등극식 준비에 서둘렀다. 서두르면서 잡념을 잊어버렸다. 엔카드라노 포르투바와 있었던 일, 남편 비오르틴이 마리를 끝내 죽이지 못했다는 따위의 사연들은 최대한 잊으려 했다.

‘그나저나…… 참 잘 된 일이지. 후슈킨과 그 딸이 죽은 것은.’

***

얼음도시 시귀르.

수도 유르.

가을을 앞두었지만, 이 도시는 혹한의 겨울을 보내는 듯 온통 눈 범벅이다.

도시 외곽엔 눈의 결정을 표현한 육각형의 새하얀 건물이 크게 세워져 있어, 마치 유르의 상징물을 자칭하는 것 같다. 제국어로 ‘안식의 겨울’이라는 간판이 달린 이 건물의 진짜 정체는 사파이어 가에서 만든 자선 재단 사무관이다. 대외적으로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사업을 하는데, 실상 사파이어 가에 들어오는 검은 자금을 세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하이너는 이곳을 두 여자가 쉴 장소로 택했다.

륀체르를 싫어하는 그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드래곤인 자신이야 어디에서 어떻게 지낸다 해도 불편할 것이 없다.

하지만 아가씨와 마리아는 자신과 다르다. 아가씨는 검은 드래곤의 소동 때 많이 놀란 눈치고, 마리아는 슈테반에게 마기를 빼앗긴 후라서 몸이 좋지 않은 상태다. 하이너는 그들을 황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유르에서 안락하게 지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왠지 륀체르라면…… 그들을 잘 돌봐줄 것 같았다.

아가씨와 마리아를 쉬게 한 후 자신은 곧바로 길을 떠났다. 혼재된 인격을 다스릴 시간도 필요하고, 끊임없이 마력을 원하는 이 저주를 달랠 시간도 필요했다.

가장 먼저 오를린의 소용돌이 산에 갔다. 그곳이 흡마귀의 저주를 푸는 데 괜찮은 장소라 판단했다. 소용돌이 산의 마력생물들 때문에 고향 농부들이 수확 시기에 크고 작은 피해를 본 적이 있으니, 그곳 마력생물들의 마력을 흡수하는 게 농부들을 편안하게 하는 길이었다. 대규모 사냥이 시작됐고, 농부들은 검은 드래곤 덕분에 올해 농사는 편해졌다고 좋아했다.

그 후 하이너는 동한, 서한과의 교역 거점지인 섬 중천으로 갔다. 중천에는 값비싼 물건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마력을 지닌 물건이 상품으로 상당수 차지한다. 하이너는 그 상품의 마력을 모조리 흡수했다. 상인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흡마귀의 저주는 그렇게 해서라도 해소해야만 했다. 해소하지 못하면 전 대륙을 멸망시켜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런 식으로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력을 사냥하니, 흡마귀의 저주를 참을 수준이 되었다. 안심했다. 아주 잠시뿐일 테지만, 당분간은 마기를 흡수하고 싶은 충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걱정되는 건 다가올 가을. 마력생물들이 발정하는 계절.

대현자의 자제력이 발정을 막아줄 거로 기대해 보지만, 과연 어떠할지. 암흑 지형의 비밀에 눈이 먼 대현자의 인격은 그런 자제력을 조금도 발휘해주지 않을 눈치다.

가을이 되면 어찌한다? 발정이 일어나 버리면 어떻게 해결하지? 대륙의 마력체들은 자신이 거의 흡수해버린 상태인데.

‘역시 마나의 인을 파괴해야 하나?’

마나의 인이 파괴되면 마법 관련 저주들도 어떻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파괴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당장은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겠다. 아직은 고민할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하이너는 아가씨 앞에서 평범한 호위기사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며칠 후에야 유르에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대륙의 정황을 파악했다. 모두 바쁘게 살고 있다. 황태자는 등극식을 마쳐 로귀하르트의 황제가 되었고, 륀체르 사파이어는 기갑체 제조 공정 건에 잡음이 생겨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유르에 있는 마리를 한 번도 만나러 오지 않았다고.

하이너는 아가씨를 만나기 전에 잠시 단장의 시간을 가졌다. 대륙을 돌아다니며 마력을 게걸스레 흡수했던 자신의 야만적이고도 추레한 꼴을 보이기 싫기 때문이다. 상주하는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깨끗이 씻고 깔끔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물론 자신은 마법 최강의 신체를 가졌기에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편하게 정화마법을 써도 되고 최고급 옷가게에서 가장 멋진 옷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낼 수도 있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대륙 최고의 마력생물이 되었어도 아가씨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호위기사, 아가씨를 만날 생각에 설레는 보통의 남자이고 싶었다.

긴 복도를 가로질러 아가씨가 있다는 방을 향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기분이 이상하다. 드래곤이 되어 하늘을 나는 것보다 가슴이 떨렸다.

똑똑.

똑똑똑.

들어오란 말씀이 없다.

‘주무시는가?’

하이너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가씨가 머무는 곳에서만 느껴지는 특유의 달콤하고도 상큼한 향기가 기분을 더 들뜨게 한다. 침대에 똑바로 누워있는 아가씨의 모습이 보였다.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다가갔다. 침대 옆에 조심스레 앉아서 아가씨의 자는 모습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여전하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모습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차가운 공기를 녹이는 것만 같은 금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라는 보석을 품은 기다란 속눈썹, 한 입 베어 물면 달콤한 맛이 느껴질 것 같은 촉촉한 입술, 너무나 안고 싶어 마지않았던…… 작은 몸.

안고 싶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으니까.

가을은 마력생물끼리 서로 발정하게 한다지. 그래서 한때 걱정을 한 적이 있다. 드래곤인 자신이 인간인 아가씨에게 발정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그런 고민 말이다.

그러나 지금 아가씨의 모습을 보니 그런 고민은 그저 기우일 뿐.

만나서, 참 좋다.

그것으로 다른 고민은 그냥 잊힌다.

그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내게 고마운 분이 아닐까?

이런 고마운 분과 평온하게 있을 시간이 주어져 있는데, 그리고 자신은 누구도 두렵지 않을 최강의 생물인데, 대관절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나.

“다녀왔습니다…… 아가씨.”

어느샌가 그의 입술은 천천히 아가씨를 향해 내려가고 있다.

============================ 작품 후기 ============================

감사합니다!

0